대하 8:11>http://onlycross.net/videos/2chr/2chr-0811.mp4
<본문>
11.솔로몬이 바로의 딸을 데리고 다윗 성에서부터 그를 위하여 건축한 왕궁에 이르러 이르되 내 아내가 이스라엘 왕 다윗의 왕궁에 살지 못하리니 이는 여호와의 궤가 이른 곳은 다 거룩함이니라 하였더라
<설교 요약>
인간이 선악과를 먹음으로 죽음의 존재가 되었다는 것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선한 것을 배출할 수 없음을 말합니다. 따라서 인간의 행위를 기준으로 선과 악을 구분하는 것은 예수님의 성육신을 부인하는 것이 됩니다. 선함과 악함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준으로만 구분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다’라는 말씀으로 분명히 드러난 사실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인간의 행위를 선한 것과 악한 것으로 구분합니다. 인간을 죽음의 존재로 보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믿는 자에게 선한 행위를 요구하신다는 주장은 죽음을 알지 못한 자의 착각입니다. 에덴동산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두시고 인간을 죽음의 존재로 만들어 시작하시는 하나님의 취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의 참된 선을 세상에 나타내시고 증거하셔서 선하신 하나님으로 영광 받기를 원하십니다. 이 일에 인간의 죽음을 활용하십니다. 인간의 죽음을 통해서 세상에 없는 선함의 참된 실체를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일하심과 인도하심에는 인간을 선한 자가 되게 하시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인생의 시작과 끝이 몇 년이든 죽음을 나타내는 세월을 살아가는 것으로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간의 실상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여 자신의 선함과 믿음을 나타내고자 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죽음의 존재로 살아온 지난 세월은 아예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인간 됨이 솔로몬의 말 한마디에서 드러난다는 것이 오늘 우리가 주지해야 할 내용입니다.
본문은 “솔로몬이 바로의 딸을 데리고 다윗성에서부터 그를 위하여 건축한 왕궁에 이르러 이르되 내 아내가 이스라엘 왕 다윗의 왕궁에 살지 못하리니 이는 여호와의 궤가 이른 곳은 다 거룩함이니라 하였더라”(대하 8:11)라는 내용입니다.
솔로몬은 왕궁을 건축한 후에 다윗 왕궁에 있던 바로의 딸을 데리고 옵니다. 그런데 왕궁에 이르자 ‘내 아내가 이스라엘 왕 다윗의 왕궁에 살지 못한다’라는 말을 합니다. 다윗 왕궁이 여호와의 궤가 이른 곳으로 거룩하다는 것이 그 이유입니다. 다시 말해서 언약궤가 있는 거룩한 곳에 이방 여인이 함께하는 것은 하나님의 규례에 어긋나기 때문에 데리고 나왔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시각에서 언약궤는 하나님이 자신들을 만나 주시고 함께 하심을 나타내는 거룩한 증표입니다. 그런 점에서 언약궤가 있는 다윗의 왕궁이 거룩하다는 것은 솔로몬과 이스라엘 백성의 같은 시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처럼 거룩한 곳에 이방 여인이 기거한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시각에 충돌되는 일이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열왕기상 3장에서 솔로몬은 바로와 혼인 관계를 맺고 그의 딸을 맞이하여 다윗성에 거주하게 합니다. 그때도 다윗의 성에 언약궤가 있었고, 따라서 솔로몬에게는 거룩한 곳이었기에 이방 여인인 바로의 딸을 거주하게 하면 안 되었습니다. 그런데 스스로 거룩하다고 한 그곳에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바로의 딸을 거주하게 했다가 자기 궁으로 데려오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본문의 말을 한 것입니다.
솔로몬은 왜 이러한 말을 했을까요? 본문에서 ‘그를 위하여 건축한 왕궁’으로 말한 것을 보면 솔로몬은 자기 아내를 위해 왕궁을 건축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그만큼 바로의 딸을 사랑했다는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솔로몬은 바로의 딸 외에 이방의 많은 여인을 사랑했습니다. 그렇게 보면 바로의 딸 한 여인을 위한 왕궁이 아니라 자기가 사랑하는 여인들을 위한 왕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여인을 위해 건축한 왕궁으로 사랑하는 아내를 데려오면서 ‘내 아내가 다윗의 왕궁에 살지 못한다’는 말이 필요한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스라엘이 언약궤가 있는 다윗 왕궁을 거룩한 곳으로 여겼다면 20년이 넘도록 이방 여인을 거주하게 한 솔로몬의 행보는 백성들에게 흠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것으로 비난을 받았을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시각에서 보면 솔로몬의 말은 왕으로서의 바른 행보를 보여주기 위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본문은 간단하면서도 우리가 죽음을 의식하지 않고 살아온 세월에 대한 지적으로 다가옵니다. 죽음의 존재인 인간이 보여줘야 할 자신의 선함과 믿음은 없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의 말에는 ‘자기 부인’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진심으로 언약궤가 있는 다윗의 왕궁을 거룩한 곳으로 여기고 그것을 이방 여인인 자기 아내가 살지 못하는 이유로 말한다면 그동안 거룩한 곳에 바로의 딸을 거주하게 한 자신의 모든 세월이 악하다는 고백이 앞서야 합니다. 이것이 솔로몬의 자기 부인으로 이어진다면 백성들에게 왕 다운 믿음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악한 일임을 눈치채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세월은 죽은 자로서의 행보가 전부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것을 위해 살아온 세월이 전부입니다. ‘믿음으로 살았다’라고 자랑할 것은 없습니다. 그런 우리가 오늘 타인에게 믿음을 보이려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무슨 의미와 가치가 있을지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십자가를 향한 믿음은 우리를 자기 부인으로 끌어갑니다. 자기 부인이 없는 믿음은 자기를 나타내려는 개인의 탐욕으로 드러난다는 점에서 믿음이 아닙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바리새인의 믿음을 믿음으로 인정하지 않으신 이유입니다.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십자가를 믿으라거나 십자가를 믿는 신자답게 선한 삶을 살라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주와 함께 죽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육신으로 살아온 모든 세월이 죽음의 죄로 가득한 자가 되어 십자가에서 주와 함께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주의 원함을 무시한 채 나의 아름다움에 시선을 둡니다. 주의 말씀은 이러한 우리의 완악함을 뚫고 들어와 십자가의 은혜로 풍요함을 이룹니다. 이것이 기쁨이 되게 하는 주의 일 덕분에 사는 세월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