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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현대 사회는 소위 공동체 운동이라는 것으로 넘치고 있다. 가히 공동체의 시대라고 할 만큼 여러 가지의 이름과 형태를 가진 공동체 운동이 현 시대를 채우고 있는 것이다. 공동체 운동은 인간이 서로 신뢰하는 것을 근본으로 하고 있다. 공동체 운동이 추구하는 것은 ‘더불어 함께 사는 사회’를 만드는 것에 있기 때문에 서로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무너지면 공동체는 존재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 공동체 운동은 굳이 ■■공동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어딜 가든 그 형태와 모습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서 요즘 농촌에서는 농산물을 가꾸고 출하할 때도 개인으로 하는 것보다는 마을 전체가 함께 하는 것, 즉 공동 작업과 공동 출하가 급속도로 퍼져가고 있다고 한다. 농기계를 구입할 때도 마을이 공동으로 구입해서 순번을 정해 돌아가면서 사용한다. 비싼 농기계를 개인이 구입하는 것보다 공동으로 구입하여 사용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옛날부터 내려오던 ‘품앗이’라는 방법으로 농사를 짓는 것 역시 ‘공동체’의 한 형태라고 말할 수 있다.


왜 이러한 형태를 취하는가? 그것은 개인의 힘보다는 전체의 힘이 더 강하기 때문이다. 힘에는 힘이라고 했던가? 자본주의는 가진 자가 강자다. 그러므로 강자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힘이 있어야 하는데 가진 것이 없는 자로서 어떻게 힘을 가질 수가 있는가? 그러므로 등장하는 것이 소수의 힘을 모으는 방법을 취하는 것이다. 개인의 힘보다는 전체의 힘이 강하기 때문에 현시대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고 자신들이 추구하는 바와 권리를 잃지 않기 위해서 힘을 모으는 것이 최선의 방법으로 등장한 것이다.


회사에는 ‘노조’라는 것이 있다. 이 것 역시 회사 사주라는 가진 자의 힘에 맞서기 위해서 결성된 것이다. 회사의 사주에 대해 노동자가 개인으로 맞설 수 없다. 그야말로 계란으로 바위치기가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누리고 부당한 대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만든 것이 노조라는 것이다. 이것 역시 공동체라는 이름은 붙이지 않았으나 공동체인 것은 사실이다. ‘서로 힘을 모아서 우리가 추구하는 목적을 이루자’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적 소유를 근간으로 하는 치열한 대립과 착취가 행해지는 악한 사회구조와 외적 환경을 문제로 보고 그러한 사회구조와 외적환경을 극복하고 개선하기 위해서 힘을 모아야 할 필요성을 갖게 된 것이 공동체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공동체는 무엇에 대한 추구가 강조된다. 그리고 무엇을 추구하느냐에 따라 여러 종류의 공동체가 형성되는 것이다. 가령 문명의 발달로 인한 환경 파괴를 현 사회의 존재를 위협하는 것으로 보는 사람들은 환경을 보호하기 위한 취지를 가지고 힘을 모은다. 가장 많이 알려진 녹색연합운동 등의 환경운동이 그것이다. 그리고 개인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을 단체라는 이름으로 하게 되는 것이다. 이들은 환경을 보호하기 위해 일하는 것을 자신의 인생의 의미로 여긴다. 그리고 여기에 함께 동조하는 사람들이 모이게 되고, 결국 환경을 보호하기 위한 하나의 공동체가 형성되는 것이다.


반면에 환경보호보다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원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소외된 계층을 도와주기 위해서 역시 하나의 단체를 형성한다. 가난한 이웃을 도와주기에는 개인으로서는 역부족이기에 자신의 취지에 동조하는 다른 힘을 모아서 자신이 추구하는 것을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처럼 공동체는 누가 무엇을 추구하느냐로 시작되어서 거기에 동조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힘을 모음으로 인해서 결성이 되어진다. 결국 ‘서로’와 ‘함께’라는 것을 힘으로 승화시켜서 인간이 추구하는 것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 곧 공동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약자들에게는 공동체라는 것이 하나의 보호막이 될 수 있다. 강자들에게는 눈에 가시같은 것으로 여겨질 수 있겠지만 힘이 없어서 강자에게 빼앗기고 부당한 대우를 받아서 제대로 항변 한번 못해봤던 약자들에게는 유일한 피난처의 구실을 할 수 있는 것이 공동체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힘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한 사회구조 속에서 약자들이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은 살아남기 위한 자구책으로서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물론 강자라고 해서 공동체가 없는 것은 아니다. 절대적 강자가 존재하지 않는 현 사회에서 가진 자들 역시 자신들을 위협할 수 있는 세력으로 스스로를 지키고 보호하고 유익을 추구하기 위해서 힘을 모을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예를 들어보면 ‘전국 경제인 연합회’, 약칭하여 전경련으로 불리우고 있는 경제인들의 모임이 그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공동체 운동에는 여러 가지의 형태와 목적과 방향이 있지만, 현대 교회에서 주로 추구하는 공동체는 ‘더불어 사는 사회’, 즉 서로 섬기고 함께 하며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는 것으로의 공동체이므로 여기에 대해서 다루어 보고자 한다.




본론  

오늘날 현대 교회는 공동체 운동에 대하여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은 타 공동체 운동에 대하여 지원을 하는 것에 관심을 둔다기보다는 개교회를 공동체 정신이 투철한 교회로 만드는데 관심을 보인다는 얘기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자신의 교회를 이상적인 교회로 만들고자 하는데 있다. 이기적 성향이 강한 현대인들이 모인 교회를 이상적인 바람직한 교회로 만들기 위해서는 개인지향적인 교인들을 하나로 만드는 것이 필수적인 것이다. 또 그것을 교회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이것은 목사만이 가지고 있는 소망이 아니라 교인들도 이러한 교회를 꿈꾸고 선호한다.


사람은 즐거움과 기쁨이 있는 쪽으로 그 마음이 기울어지게 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을 기쁘게 해주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철저히 외면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인간은 누구나 자기 기쁨과 즐거움을 위해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한 예를 들어보면 남을 위해서 봉사하고 구제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거기에는 자기만의 기쁨과 즐거움이 감추어져 있는 것이다. 비록 자신의 노력과 돈이 들어가는 일이지만 본인은 그 일을 통해서 기쁨과 즐거움을 찾기 때문에 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본성이 교회에 대해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즉 자신을 기쁘게 해주고 즐겁게 해줄 수 있는 교회를 선호하고 찾는다는 것이다. 자기 취향에 맞는 교회를 고르게 된다는 것이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제공해줄 수 있는 교회, 자신이 추구하는 것을 충족해줄 수 있는 교회를 찾아다니는 것이 현대인들이다. 그리고 교회는 그러한 민중들의 심리를 알고 있다. 교회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민중들이 기뻐하고 자신의 교회를 떠나지 않을 것인가를 잘 아는 것이다. 교회가 공동체 운동에 관심을 두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상적이고 아름다운 교회로 만들어서 모든 사람들이 선호할 수 있는 교회로 만드는 것이 곧 교회가 성공할 수 있는 길임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교회가 추구하는 공동체 운동은 한마디로 말해서 서로 연합하고 사랑하는 것을 의미한다. 비록 공동 생활의 형태는 가지고 있지 않다 하더라도 교회 내적으로 하나되어 이웃의 필요와 요구에 동참하여 약자들을 돕는 사랑의 실천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처럼 공동체 운동을 강조하는 교회는 교회의 재정을 교회 내에서만 사용하지 않고 구제와 선교 등 외적인 사업에 큰 비중(약 50%를 설정한 교회가 많음)을 둔다. 그것을 교회가 실천해야 할 본질로 여기는 것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교회를 선호한다. 흔히 말하는 나누고 섬기는 교회를 이상적인 교회상으로 본다는 것이다. 물론 서로 나누고 섬긴다는 것 자체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신자라면 당연히 나눔이 있어야 하고 섬김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성경을 기초로 한 것인가를 따져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서로 나누고 섬기며 연합하고 사랑하는 형태의 모임은 교회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일반 사회나 다른 종교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즉 어려운 이웃을 돕고, 사로 사랑하기 위해 힘쓰고, 서로 섬기는 것은 기독교만이 추구하는 정신이 아니라는 것이다. 비록 기독교는 그러한 것을 그리스도의 정신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사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정신이라면 엄밀히 말해서 교회에서만 발생되어야 할 그리스도의 정신이 그리스도와 상관이 없는 이방인이나 또는 소위 우상을 섬긴다고 하는 타종교에서까지 보여지는 모순이 발생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교회가 이웃을 사랑하는 것과 이방 사회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과연 다른가? 교회는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하는 사랑이고, 이방 사회는 다만 인간의 양심과 윤리로 하는 사랑인가? 좋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하는 사랑이고 이방사회는 다만 인간의 양심과 윤리로 하는 사랑이라고 하자. 그렇다고 해서 사랑의 본질이 다르다고 말할 수 있는가? 교회가 하는 구제와 사회가 하는 구제, 그리고 이방 종교가 하는 구제가 서로 다른 점이 무엇인가? 누구의 이름을 내건다고 해도 본질이 같다면 그것은 같은 것이다.


그리스도의 마음은 분명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에게서는 보여질 수 없다. 오직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를 믿게 된 신자에게서만 보여지는 독특한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그리스도의 마음과 같은 모양과 본질을 이방 사회에서도 볼 수 있다면 그것은 분명 교회가 그리스도의 마음과 정신에 대해 오해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즉 인간의 양심과 윤리에서 공통적으로 표출되어지는 것에 그리스도의 이름을 붙여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떠들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교회가 표방하는 공동체 운동이라는 것이 이방 사회나 타종교가 추구하는 것과 전혀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필자가 교회의 공동체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철저하게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현대 교회나 사회가 이해하는 식의 공동체는 성경적으로 분명히 문제가 있음을 말하고 싶다. 그 문제가 무엇인가를 찾아보고 성경적인 공동체를 위하여 기도하고 힘쓰는 것이 그리스도의 참된 교회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성경에 등장하는 공동체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성경에는 공동체라는 말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에 등장하지 않는 말이니까 쓰지 말자고 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공동체의 의미는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경에 등장하는 최초의 공동체는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을까?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이다. 이스라엘이 성경에서 보여주는 공동체적 민족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현대 교회가 말하는 공동체란 무엇인가를 이스라엘을 통해서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무슨 공동체 운동이라는 것을 했을까? 그것은 아니다. 이스라엘은 다만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살았을 뿐이다. 이스라엘의 공동체는 출애굽부터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출애굽은 마지막 장자 재앙에서 그 의미를 찾아야 할 것이다. 출애굽의 마지막 장자 재앙에서 살아난 사람은 이스라엘이란 민족이 아니라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사람들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을 살리신 것이 아니라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사람들을 살렸다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이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을 살리신 것이라면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것은 단지 허식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란 민족의 하나님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애당초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란 민족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었다. 어린양의 피의 정신이 살아있는 이스라엘을 만들고자 하신 것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명하신 것은 유월절이었다. 출 12:14절의 “너희는 이 날을 기념하여 여호와의 절기를 삼아 영원한 규례로 대대에 지킬지니라”는 말씀이 이를 말해주고 있는데, 이것은 단지 어떤 절기를 하나 만들어주시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어떤 정신으로 살아야 할 것인가를 가르쳐주기 위한 절기인 것이었다. 이스라엘이 어린양의 피로써 살아난 그 날을 기념하는 유월절을 절기로 지키면서 자신들이 무엇으로 인해서 살아났는가를 기념하는 것이다. 즉 어린양의 희생의 피 덕분에 살았다는 것을 생각하고 그 정신으로 함께 하는 것이 곧 이스라엘이라는 공동체가 되는 것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언약 공동체’라고 말하기도 한다. 어린양의 피가 언약이 되어서 이스라엘을 살리는 공동체라는 의미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존재 의미는 오직 어린양의 피에만 있다. 어린양의 피를 떠나서는 이스라엘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을 깨닫고 어린양의 피의 은혜를 감사하는 무리가 이스라엘이며, 이들을 언약 공동체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에서 볼 수 있는 공동체의 시작인 것이다.


따라서 성경에서 말하는 공동체라는 것은, 인간이 어떤 이상과 목적을 내세우고 거기에 동조하는 무리들이 함께 어울려서 힘을 형성하는 그러한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아무리 이웃과 나누고 섬기기 위해서 하는 공동체 운동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을 예수님이 원하는 공동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앞서 말한대로 예수님이 원하는 것이 소위 좋은 일을 하는 공동체라면 그러한 공동체는 굳이 기독교 안이 아니라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그렇다면 그들은 예수님이 원하는 좋은 일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예수를 믿지 않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부인 당하는 것인가? 오늘날 기독교가 이러한 논리를 내세우기 때문에 타종교로부터 종교의 이기성이란 말을 듣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와 기독교가 아닌 것의 차별성은 분명 그리스도를 믿는가 믿지 않는가에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느냐 믿지 않느냐는 것은 교회를 다니느냐 다니지 않느냐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교회를 다니는 불신자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상이 현대의 교회를 보면서 신자와 자신들의 차이는 다만 교회를 출입하고 안하는 것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 외의 것에서는 자신들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고 여기는 것이다.


교회가 착한 일을 추구한다면 세상도 착한 일을 추구한다고 여긴다. 교회가 윤리와 도덕을 말한다면 세상도 윤리와 도덕을 말한다. 오히려 교회보다 더 열심히 한다고 스스로 자부하는 것이 세상 사람들이다. 이것은 결국 교회가 교회로서의 본질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진정한 교회의 모습은 잃어버리고 세상 속에서 다만 기독교라는 종교의 모습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세상이 교회를 보면서 자신들과의 차별성을 느끼지를 못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종교 일치 운동’이라는 것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섬기는 신은 다르지만 본질은 같기에 얼마든지 하나될 수 있다는 것이다.


세상은 이러한 종교계를 보면서 박수를 친다. 화합하고 일치하는 모습이 보기 좋다는 것이다. 비록 종교의 일치를 반대한다 하더라도 차별성의 문제에 들어가면 할말을 잃어버리는 것이 현대 교회의 나약한 모습이다. ‘하나님만이 유일신이다’라는 것은 교회의 독선이고 주장이라고 여길 뿐이고, 세상은 다만 ‘너희나 우리나 다를 바가 없다’고 판단할 뿐인 것이다.


이러한 세상이 칭찬하는 교회는 분명 사회적으로 좋은 일을 하는 교회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 역시 자신들과의 차별성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너희와 우리가 다르다’는 인식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상은 교회 역시 한 종교단체로서 좋은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밖에 하지 않는다. 종교의 의무를 선한 일을 하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부처를 믿는 상관하지 않고 다만 사회에서 좋은 일을 많이 하는 그러한 종교를 종교다운 것으로 보고 환영하는 것이 곧 세상의 시각인 것이다. 그리고 교회는 이러한 세상으로부터 긍정적인 존재로 부각되고자 하는 유혹에서 헤어나지를 못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즉 세상에 잘보여야 전도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세상으로부터 미움받는 것은 예수님께 영광되지 못하는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이들에게는 아마 ‘너희가 내 이름을 위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라’(마 10:22)는 구절이 없는 것 같다.


물론 교회가 물질 만능 주의로 나가고 서로 다투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미움받는 것을 예수님의 말씀과 연관지어 해석할 수는 없다. 그러나 진정한 교회의 본질을 가진 교회라면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을 것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이라면 ‘도대체 왜 그런가?’ 한번이라도 깊이 생각해 보는 자세를 가져야 하지 않는가?


우리가 생각하는 교회의 본질이라는 것은 서로 연합하여 사랑하고 나누고 섬기는 그런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데, 교회가 그러한 모습을 보여준다면 세상으로부터 미움받을 일이 없지 않은가? 그런데 왜 예수님은 믿는 자는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을 것이라는 이해하지 못할 말씀을 남겨 놓으셨느냐는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것에 대한 바른 이해 없이 교회 공동체에 대해 섣불리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즉 우리의 상식으로 만들어 낸 공동체를 교회 공동체로 말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로서의 본질은 무엇인가? 참된 교회 본질을 담고 있는 교회 공동체란 무엇인가?

필자는 그것을 이스라엘이라는 언약 공동체, 즉 어린양의 피로써 형성된 이스라엘에게서 찾고 싶은 것이다. 이스라엘을 언약 공동체라고 부르는 것은 ‘어린양의 피를 바른 자는 산다’는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살아난 존재들이 곧 이스라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날을 기념하여 절기로 삼아 영원히 대대로 규례로 지키라는 말씀안에 있는 것이 이스라엘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이스라엘다움은 유월절을 지키는 것에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유월절을 지킨다는 것은 단순히 절기만 지내면 되는 것이 아니었다. 유월절의 정신이 이스라엘 안에 살아있어야 했던 것이다. 절기를 지키라는 것은 바로 그 정신을 잃지 말아라는 하나님의 요구이기도 한 것이다. 이처럼 어린양의 피라는 하나님의 언약으로 인해서 살아난 이스라엘은 오직 유월절의 정신을 가진 자들만 허락되어진다. 유월절의 정신으로 존재하지 않는 자는 이스라엘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 언약공동체인 이스라엘인 것이다.


민 9:13절에 보면 “그러나 사람이 정결도 하고 여행 중에도 있지 아니하면서 유월절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니 이런 사람은 그 정기에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지 아니하였은즉 그 죄를 당할지며”라고 말한다. 여기 보면 정당한 사유 없이 유월절을 지키지 않는 자는 그 백성, 즉 이스라엘 중에서 끊쳐질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다만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적 행사인 유월절 절기에 참석하지 않았으니까 이스라엘 사람으로 인정해주지 않겠다는 의미가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국가적 횡포에 지나지 않는다.


오늘날 공동체 운동에서도 이러한 것을 볼 수 있다. 즉 어느 한 공동체가 규칙을 정해 놓고 그 규칙에 위반된 자는 공동체에서 축출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곧 자기 공동체의 규칙을 지키기 위한 횡포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여기에 대해서는 뒤에 다시 언급하기로 하자.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유월절 예물을 드리는 것은, 우리의 생명은 어린양의 피에 있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이 유월절을 지키지 않아도 되는 사람은 앞서 말한 민 9:13절에 보면 정결한 자와, 여행 중에 있는 사람이다. 이스라엘 내에 있지 않고 여행 중에 있으니 절기에 참석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한 부득이한 경우는 제외하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결한 사람은 유월절에 참석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정결하다는 것은 깨끗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죄가 없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죄가 없으면 유월절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면 유월절은 죄와 연관이 있다는 결론이 된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 다시 출애굽으로 돌아가 보자.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장자 재앙에서 살아난 사람들은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사람들이다. 그리고 장자를 죽이기 위해서 온 천사들은 문설주에 발려진 피를 보고 그 집을 넘어 갔다. 이것을 두고 앞에서 언급하기를 이스라엘이기 때문에 재앙에서 무사하게 된 것이 아니라고 했다.


즉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라는 민족과 애굽이라는 민족을 구분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는 애굽이나 이스라엘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같은 죄인이라는 의미다. 같은 죄인인데 단지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장자 재앙에서 제외된 것이라면 결국 구원은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국가 구원이 되버린다. 그리고 그 원칙은 지금도 계속 진행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아다시피 지금의 구원 원칙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 원칙은 처음부터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이 아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이 장자 재앙을 통해서 확실하게 드러나는데, 어린양의 피를 바른 자들만 살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 은 어린양의 피를 믿는 자들에게만 해당된다는 하나님의 구원 원칙을 보여주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어린양의 피를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살아난 것은 오직 어린양의 피로 인해서입니다’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믿음이나, 우리가 잘나서 살아난 것이 아니라 어린양의 희생의 피가 우리의 죄를 용서 했기 때문에 산 것임을 고백하는 것이 이스라엘에게서 사라지면 안될 유월절 정신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린양의 희생의 피가 필요없는 자는 정결한 자다. 정결하다면 용서받아야 할 불의함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사람은 유월절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민수기의 내용인 것이다. 하지만 정결하지 못한데도 불구하고 유월절을 지키지 않는다면 그 죄를 당할지라고 말한다. 그 죄를 당한다는 것은 유월절을 지키지 않은 벌을 받는다기 보다는 본래 자신의 죄 값을 치르게 된다는 의미로 보는 것이 옳다. 유월절의 어린양의 은혜가 없기 때문에 자신의 죄값으로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이스라엘이라는 언약 공동체가 주장하고 지키는 것은 어린양의 피라는 것을 알 수 있고, 어린양의 피의 은혜를 중심으로 모인 그 무리를 가리켜서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 ‘이스라엘’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희생의 피로써 구원을 얻는다는 하나님의 언약을 믿고 언약안에 모인 무리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부터 지금까지 언급한 언약공동체로서의 이스라엘을 염두에 두고 신약시대의 교회란 어떤 공동체를 의미하는가를 생각해 보자. 구약과 신약은 서로 단절된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안에서 계속되어지는 연속성 가운데 있다. 즉 구약과 신약이 서로 전혀 다른 장르로 펼쳐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동일한 가르침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피로써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이다. 다만 구약에서는 하나의 모형와 그림자로 계시된 의미가 신약에서는 그 실체를 확실하게 드러낸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것이 바로 구약에서의 어린양이 신약에 와서 예수 그리스도로 드러난 것이다.


마 3:1-3절에 보면 “그 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가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였으니 저는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하였느니라”고 말한다. 세례 요한은 무엇 때문에 광야에서 전파하였는가? 이왕이면 사람들이 많은 예루살렘안에서 전파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고 상식적인 일이 아닌가? 그런데 그는 광야에서 전파한 것이다.


다시 5-6절을 보면 “이 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라고 되어 있다. 우리는 이 장면을 주의 깊게 살피지 않을 수가 없다. 앞서 말한대로 요한이 설교 장소를 광야로 삼았다는 것, 그리고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강 사방에서 그에게 나아와 세례를 받았다는 것, 과연 여기에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할 수 있는가?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의 출애굽이다. 즉 마 3장의 얘기는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배경으로 해서만 제대로 납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요한은 예루살렘안에서 외친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 밖 광야에서 외쳤다고 했다. 그리고 그 외침을 들은 사람들이 예루살렘과 유대에서 나와 세례를 받는다. 이것을 출애굽과 연관시켜 보면 결국 어디가 애굽이 되는가? 바로 예루살렘과 유대가 애굽이라는 결론이 된다. 다시 말해서 세례 요한은 예루살렘과 유대를 애굽으로 보고 광야에서 외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지역적인 의미에서 이해하면 안된다. 세례 요한은 예루살렘과 유대가 가지고 있는 사고방식이 바로 애굽적이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에서 나온다는 것은 애굽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야 할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사고방식으로 살아가야 할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 새로운 사고방식이라는 것이 바로 요한이 어린양이라고 말한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를 믿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은 7절부터 말하고 있는 이스라엘에 대한 책망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요한은 이스라엘을 독사의 자식이라고 책망한다. 애굽같은 이방인이나 들어야 할 말을 이스라엘이 듣고 있는 것이다. 사실 요한은 이스라엘을 이스라엘로 여기지 않고 있다.


마 3:9절에 보면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을 보면 요한은 혈통적 이스라엘을 부인하고 있는 것이다. 참된 이스라엘은 혈통적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 요한은 무엇을 참된 이스라엘로 보는가? 그것은 구약에서 유월절을 지키는 무리들, 즉 어린양의 피를 믿는 무리들이 참된 이스라엘이었다면 지금은 어린양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를 믿는 그들이 곧 언약 공동체인 이스라엘이며 교회인 것이다.


이스라엘은 어린양의 피로서 살아난 무리들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이스라엘은 어린양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 살아난 무리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교회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교회는 구약의 이스라엘이 유월절을 지킴으로써 어린양의 피로써 살았다는 유월절 정신으로 살아야 했던 것처럼 지금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의 정신이 존재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본질이다. 교회는 이러한 정신이 있는 무리들로 이루어지는 것이고, 이러한 무리 즉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것이 신약 시대의 언약 공동체인 교회인 것이다.




그럼 이제부터 인간이 추구하는 공동체가 왜 언약 공동체인 교회와 다른가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현대 기독교라는 종교 안에서 행해지고 있는 공동체 운동은 여러 가지가 있고 그중 많이 알려진 것으로는 두레마을, 다일 공동체, 예수원 등이 있다. 이 가운데 두레마을과 예수원은 공동 사회생활을 하고 있으며, 다일 공동체는 아다시피 밥퍼주는 것으로 유명하다. 소외되고 가난한 이웃들에게 밥을 제공하고 요즘은 병원을 지어서 돈이 없어서 병원이 가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무료로 진료를 해주기도 한다. 그리고 이것을 위해서 많은 후원자를 모집하기 위해서 많은 광고와 선전을 하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공동체를 세상이 마다 할 리가 없다. 그리고 저런게 진짜 예수 믿는 것이라고 칭찬하기도 한다. 앞서 말한대로 종교를 윤리와 도덕의 기준으로 판단할 때 개교회 예배당이나 크게 지을려고 애쓰는 것보다는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이 더 교회답게 보일 것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그런 교회를 선호하게 되는 것이다. 좋은 일을 하는 교회에 속했다는 것으로, 그리고 그러한 교회에 헌금을 한다는 것으로 자신이 그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착한 일을 하고 있다는 기쁨을 만끽할 수 있기 때문에 윤리와 도덕적인 교회를 선호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좋은 일을 하기 때문에 무조건 그리스도적이라는 생각은 금물이다. 교회란 좋은 일을 하기 위해서 모인 공동체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를 높이기 위해서 모인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교회란 무엇인가? 그리스도를 믿는 무리인가 아니면 좋은 일을 하는 무리인가? 답은 분명 그리스도를 믿는 무리들이다. 교회다운 것도 좋은 일을 많이 함으로써 교회다운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로 살았다는 것만을 주장하는 것이 교회다운 모습인 것이다.


그러면 좋은 일을 하지 말라는 것인가? 가난한 자들을 도와주고 그들과 나누는 것을 하지 말란 것인가? 그것은 아니다. 필자가 지금껏 말한 것은 좋은 일을 한 행위가 기준이 되어서 교회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기준이라는 말을 한 것이다. 즉 좋은 일을 하지 말라는 것을 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단적으로 말하건데 교회는 나누고 섬기는 것이 있어야 한다. 또한 형제 사랑도 있어야 한다. 그것이 없으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말할 수 없다. 요한일서에서는 형제를 미워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이라고까지 말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은 나누고 섬기며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어린양의 피, 즉 그리스도의 피로서 살았다는 은혜를 아는 자에게서는 자연히 맺어지는 열매라는 것이다. 말씀을 깨닫고 말씀으로 살아가는 신자에게서는 섬김과 사랑이 자연히 맺어지게 되는 것이지, 인간이 모여서 나누고 섬기자는 목적을 내걸고 실천하기 위해서 애쓸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나누고 섬기는 사랑은 인간에게서 나와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있을 때 그 사랑에 의해서 표출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구약에 보면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보호하기 위한 규례가 있다. 신 14:29절에 보면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우거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로 와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고 말씀한다. 이 말씀을 보면 오늘날 공동체 운동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실천하고자 하는 것과 같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공동체 운동이라고 일으키고 계시는 것인가?


당시 레위인은 가나안 땅에서 기업이 없었다. 때문에 그들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바치는 제물에서 허락된 것을 취함으로써 생계를 유지했던 것이다. 그리고 고아 역시 기업이 없다. 과부, 나그네 역시 기업이 없는 존재들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이들을 배부르게 하라고 하신다. 이것을 가리켜서 ‘약자 보호법’이라고 하기도 한다.


이렇게 생각해보자. 하나님은 얼마든지 고아나 과부같은 약자들을 직접 도와주실 수 있다. 분명 하나님은 그런 능력이 있는 분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라엘 안에 기업이 없는 약자들이 존재하도록 하시고 이스라엘에게 그들을 배부르게 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이다. 왜 그렇게 하시는가? 단지 가난한 자들을 돕는 것이 목적이고 배부르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라면 하나님이 직접 그렇게 하실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하나님의 의도를 깨달을 수 있다. 이스라엘에 가나안에 들어가게 된 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다. 어린양의 피로써 애굽에서 나오게 되었고, 광야의 원망으로 인해서 죽어도 할 말이 없는 그들을 하나님은 인도하셔서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들어오게 하신 것이다. 결국 가나안은 어린양의 피의 은혜로 이루어진 복의 나라인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가나안 안에서는 인간의 힘과 능력을 내세울 것도 자랑할 것도 없는 것이다. 자신들이 한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가나안에서 열매를 얻었지만 그것은 그들의 노력의 결과가 아니었다. 모두가 하나님이 주신 것이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가나안에서 할 것은 다만 모든 것을 이루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면 되는 것이었다. 모두가 한마음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살렸고 이 기업을 주셨음을 노래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이러한 정신으로 존재한다면, 그들에게는 ‘내 것’이란 결코 존재할 수 없다. 그들이 일해서 얻은 것은 하나도 없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이기 때문에 자기 손에 있는 기업은 결코 내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내것이 아니기에 가진 것을 기준으로 해서 상대적으로 적게 소유한 자를 얕볼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이스라엘안에 있는 약자가 주리며 살아간다면 그것은 어떤 증거인가? 바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정신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증거인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중심으로 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에게 있는 것을 내것이라고 여기게 되고, 결국 다른 사람의 것과 비교하면서 적게 가진 자나 없는 자를 무시하게 되고, 그로 인해서 약자들이 고통을 받고 배고픔을 겪게 되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이 이스라엘안에 약자를 있게 하시고 이스라엘에게 그들을 도우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로 존재하는가를 확인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직접 약자를 돕지 않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약자를 돕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아는 마음에서 자연히 발생하는 것이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윤리와 도덕에서 나와지는 것은 아닌 것이다. 인간의 윤리와 도덕에서 보여지는 사랑과 나눔이라는 것은 많이 가진 자가 적게 가진 자를 도와주는 수준이다. 공동체가 주장하는 것도 그것 아닌가? 가진 자들에게 호소하여 가지지 못한 자를 위해 얼마를 내놔라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은 결코 그런 수준이 아니다. 하나님은 원래 너희는 똑같은 자였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모두가 애굽에서 종되었던 사람들이고, 자신의 기업이란 없었던 사람들이고, 애굽에서 나그네로 살았던 사람들이다. 그것이 이스라엘의 본래 모습이었던 것이다. 똑같이 애굽에서 종으로 살고 나그네로 살던 입장에서 가진 자 못가진자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한 그들이 나님의 은혜로 기업을 얻게 되었다. 나그네와 종으로 살던 그들에게 기업이 주어지게 된 것이다. 이스라엘은 이것을 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이라는 공동체는 가진 것을 기준으로 해서 강자와 약자가 존재할 수 없는 공동체였고, 약자가 강자에 의해서 고통을 받는 것이 있어서도 안되는 것이었다. 그것이 진정한 공동체인 것이다. 어떤 일을 하기 위해서 뜻을 모아서 모인 공동체가 아니라, 모두가 동일한 본질을 가진 인간으로서의 공동체라는 것이다. 모두가 죄인이고 잘난 사람도 못난 사람도 없는 공동체고, 그래서 배운 자 못배운 자의 차별이 없고, 가진 자 가지지 못한 자의 구별이 없는 것이 진정한 공동체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날 교회라는 공동체를 말하는 것이다.


때문에 현대 교회가 교회안에서 가진 자와 못가진 자를 은연중 구별하고 차별을 하며, 가진 자가 힘있는 자로 등장하고 약자는 힘없는 자로서 차별을 받는다면 그리스도의 피의 정신으로 모이지 않는 종교로서의 교회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현대 교회가 공동체로 존재하기 위해서 지켜야 할 것은, 그리스도의 피의 정신이다. 그리스도의 피 앞에서는 그 어떤 사람도 죄인일 수밖에 없다. 부자든 가난한 자든 동일한 죄인인 것이다. 같은 죄인이기 때문에 ‘나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삽니다’라는 고백을 같이 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몸이고, 공동체로서의 교회라고 일컫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를 공동체로 이끌어 가기 위해서는 ‘무엇을 하자’라고 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살아갈 것을 가르쳐야 한다. 세상의 기준 다 포기한 채 다만 예수님의 보혈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모이면 되는 것이다. 만약 어떤 규칙을 요구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인간의 공동체를 지키기 위한 수단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참고로 예수원에서 요구하는 규칙 중에 이런 내용이 있다. ‘여기서는 "예수의 몸의 원리" 라고 부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원에 들어오는 사람도 이 몸의 한 지체가 되는 것입니다. 아무도 독립적으로 행동할 수 없습니다. 지도는 주께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지도가 진정 주께서 내리신 것이라면 이것은 "예수원" 단체(몸)에게도 주어져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단체 지도에 자기를 내맡길 의사가 없는 한 "예수원"의 회원이 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느낄 수 있는가? 비록 예수의 몸의 원리라는 말을 하고 있으나 예수원이 원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아니라 예수원이라는 조직의 몸이 되어주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그들은 그들이 규칙을 세워놓고 복종하지 않는 자는 몸으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진정한 공동체는 인간의 조직의 일원이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라는 조직으로서의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공동체만 요구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런 공동체를 원하시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중심으로 모이는 공동체가 예수님이 원하시는 공동체다. 서로가 세상의 기준을 버리고 죄인에게 주어진 은혜와 사랑과 자비를 중심으로 모인다면, 그러한 공동체에서 보여지는 것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고, 내 것을 제것이라 여기지 않고 필요한 자에게 나누게 되며,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게 될 것이고, 미움이 있다가도 오히려 형제를 미워하는 자신을 안타까워 하고 애통해하는 그런 모습일 것이다. 오늘날 교회는 이러한 공동체를 위해서 힘써야 하는 것이다. 힘써야 할 것은 날마다 그리스도의 은혜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결론

참된 공동체란 인간이 내세운 이상과 뜻에 동조하여 모이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아무리 좋은 일을 한다고 해도 그것은 인간의 연합에 불과하다. 인간의 뜻이 서로 일치된 연합일 뿐입니다. 그러나 참된 공동체는 인간의 뜻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뜻을 중심으로 한다. 인간의 뜻을 중심으로 한 공동체는 그 뜻에 동조하지 않을 때는 결국 함께 할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뜻을 중심으로 하는 공동체는 인간의 모든 뜻을 그리스도의 뜻에 복종한 자들이 모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안에는 자기 뜻이란 없다. 다만 예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라고 묻는 것만 있을 뿐이다. 인간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모이지 말고 그리스도의 뜻을 이루어가기 위해서 모이자. 그것이 오늘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이며 예수님이 원하시는 진정한 공동체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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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적인 공동체는 과연 무엇인가 신윤식 2009.12.23 25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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