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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만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하시든 내 편에서는 전혀 불만이 없이 수긍하고 들어가는 것이다. 만약 내편에서 어떤 결과를 기대하고 하나님께 나온다면 그것은 믿음이라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기대와 요청에 따라서 일하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께 나올 때는 항상 자신의 기대와 요구를 들고 나온다. 그리고 하나님이 자신의 기대와 요구에 따라서 움직이시도록 하기 위해서 기도와 헌금, 예배, 봉사라는 종교적 행위를 동원하는 것이다. 즉 인간의 종교 행위에 자신의 정성을 담아서 하나님께 나오면 하나님이 그 정성을 보시고 자신의 요구를 들어주실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인간의 하나님을 향한 요구와 기대는 모두 힘으로 집약되 있다. 그것이 어떤 형태이든 결국 나에게 힘으로 작용하는 것을 원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인간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어떤 힘을 믿고자 한다는 것을 간파할 수 있다. 즉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현재 세상에서 자신의 지위와 권위를 보장해 주는 힘으로 형태화 시키고자 하는 열망인 것이다. 이것은 모든 인간의 종교심이다. 종교가 기독교이든, 불교이든, 유교이든 이런 종교심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때문에 세상 사람들에게는 무신론자라는 것이 없다. 모두가 무엇인가를 믿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자신은 종교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나는 무신론자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도 비록 종교는 갖고 있지 않더라도 자신이 세상에서 믿고 사는 것은 있다. 자신의 지위를 믿든지, 지식을 믿든지, 힘을 믿는 것이다. 믿는 것이 자기에게 신이 되어 있다.


사람들의 믿음의 중심에는 돈이 있다. 자기의 지식을 믿고 힘을 믿는 것도 돈을 수중에 넣기 위해서이다. 불교에서 기독교에서 신을 찾는 것도 돈을 목적한 것이 부지기수이다. 직접적으로 돈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해도 결국 그 마지막은 돈으로 결론되어진다.


예를 들어서 대학 시험을 봤을 때 붙게 해 달라고 하나님을 찾는다. 다른 욕심은 하나도 없으니까 내 자식만 붙게 해달라고 애원을 한다. 하지만 이것이 진짜 자식의 합격만을 원하는 것인가? 자식이 대학에 합격하기를 기를 쓰고 원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 내면에는 대학을 나와야 좋은 직장에 취직해서 돈을 벌고 잘 살 수 있다는 계산에서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의 모든 것을 주관하신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이 나를 어떤 길로 인도하시든지 그 길을 수긍하고 인정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면 내 편에서는 순종할 수밖에 없고 그것이 고통이든 죽음이든 결국 하나님 편에서는 나를 유익된 길로 이끌기 위해서라는 것을 믿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런 믿음이 아니다. 하나님을 잘 섬겨서 하나님의 힘을 이용해서 세상에서 곧게 서보자는 것이다. 세상에서 힘이 없으면 남에게 고개를 숙여야하고 행세를 하지 못한다는 사고방식이 뿌리깊이 박혀 있기 때문에 세상에서 큰소리 칠 수 있는 도구들을 얻기 위해서 신을 찾아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신의 도움을 얻기 위해서 소위 나의 정성을 가지고 나오는 것이다. 그것이 헌금이다. 그리고 헌금 외에 부수적으로 교회에서 봉사하고, 기도하고, 성경보는 것까지 하나님의 돌보심으로 세상에서 편안하게 살 수 있는 힘을 얻어내는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이다. 결국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고, 그 표시로 헌금하고, 봉사라는 것을 해 놓고는 대가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 대가는 축복이다. 결국 믿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다.


교회에서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라고 외친다. 십일조만 철저하게 하면 하나님께서는 넘치는 복을 주실 것이라고 말한다.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인데 하나님의 것을 바치지 않으면 도적질 한 것이 되고,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면 그에 다른 징계가 분명히 있을 것이라고 엄포를 놓는다. 십일조를 안하면 믿음이 없고, 십일조를 잘하면 믿음이 있는 것으로 가르친다. 결국 십일조가 믿음 판단의 기준이 되어 버렸고, 교회에서도 십일조를 잘하는 사람이 목사에게 대우받고 존경받는 형편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십일조는 구약에서의 이야기이다. 신약에서의 십일조는 구약과 다르게 말해야 한다. 구약의 규례가 모두 그리스도를 향해 있고,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모든 규례가 다 마침이 되었다면 십일조도 당연히 마침이 되어야 한다. 즉 그리스도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가 축복을 말하면서 십일조를 강조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흔히들 하는 말이 신자들이 십일조를 하지 않으면 교회를 어떻게 운영하느냐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교회 운영에 대한 염려가 먼저가 아니라 재정이 넉넉해야 목회자의 생활비가 넉넉하게 지급될 것이고, 또 교회를 건축하고 많은 집기들을 들여놓고, 많은 재정을 통해서 자신의 능력을 나타내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목회자들이 만나면 꼭 일년 결산이 얼마나 예산이 얼마인가를 물어보고 교인수가 몇 명인가를 물어보는 이유가 무엇인가? 상대방의 교회가 얼마나 큰가에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모습인가?


십일조를 많이 했던 교인이 다른 교회로 가게 될 때 목회자는 힘을 잃는다고 말한다. 그것이 진심으로 교인을 사랑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마음인가? 그렇다면 십일조를 전혀 하지도 못한 가난한 사람이 다른 교회로 가게 될 때도 같은 마음일까? 결국 함께 생활했던 형제와 헤어지는 것이 섭섭한 것이 아니라 재정이 줄어드는 것이 섭섭한 것이다. 이것이 과연 하나님을 믿는 것인가?


교회를 향해서 십일조를 없애자고 말한다면 대부분의 교회는 소리를 칠 것이다. 이단이라고까지 말할지 모른다. 그러면 그 이유가 무엇인가? 진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해서인가? 하나님께 십일조를 하는 것이 신자의 모습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인가? 그렇다면 십일조를 하되 아예 무명으로 하자고 말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성경에는 분명히 십일조를 이름을 적어서 하라는 것은 없다. 그러면 무명으로 하는 십일조는 가르칠 수 있겠는가?


물론 무명으로 하는 헌금만이 정당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무명으로 하는 헌금을 가르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말하고 싶은 것이다. 결국 십일조를 폐지하든 무명으로 하든 사람이 염려하는 것은, 하나님의 가르침에서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하는 것보다는 헌금이 적게 나오는 것이다. 이것이 과연 하나님을 믿는 것인가?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이다. 머리는 그리스도이시다. 목사의 교회도 아니고 장로의 교회도 아니다. 철저하게 하나님께서 붙드시고 하나님께서 책임지시는 것이 교회이다. 그 교회를 있게 하시든, 없애시든 이것은 하나님의 소관이지 우리의 소관이 아니다. 교회가 할 일은 하나밖에 없다. 하나님의 뜻을 세워 가는 것이다. 말씀대로만 가르치고 나머지는 염려하지 않고 주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따라갈 뿐이다.


교회의 재정이 얼마가 되고 교인 수가 얼마가 되든 그것은 우리가 관심 둘 일이 아니다. 교회로 모이는 우리는 단지 하나님께서 맡기시고 허락하신 것 안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면서 하나님을 전할뿐이다. 그것이 교회이고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적인 수단으로 교회 재정을 늘이고, 교회를 크게 하고자 하는 것들을 절대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해서 자신의 힘을 키우고 있고, 결국 자신이 쌓아놓은 업적을 자랑하면서 자신을 믿는 것에 불과하다. 교회는 돈으로 세워지는 것이 아니다. 돈으로 지탱되는 것이 아니다. 이 말에 반발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교회가 하나님을 말하고 하나님의 힘으로 세워진다고 하면서 왜 결국은 돈으로 끝나려고 하는 것인가? 결국 기대하고 있던 하나님의 힘은 돈을 부어주는 하나님이 아니던가.


신자들이 헌금을 하는 것도 하나님을 믿고 하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의도로 하는 것인지 생각해 봐야 한다. 헌금을 자신의 신앙의 증표로 삼으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 상관없는 헌금이다. 일억을 바친다고 해도 하나님은 모르시는 헌금이다. 복을 전제로 하고 하나님께 바칠 때 그것은 오히려 저주의 도구가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신에게 무엇인가를 바쳐서 복을 받는다는 것은 이방종교가 외치는 말이다. 그 외침에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기독교가 따라간다면 그것은 결코 기독교라고 할 수 없다.


돈은 인간이 필요로 할뿐이지 결코 하나님께서 필요로 하시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인간들은 자기들의 욕심 때문에 자기가 원하는 재물을 마치 하나님께서 필요로 하신 양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신자들의 헌금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을 곡해하여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그 헌금에 많은 신자가 참여토록 하기 위해서 헌금을 바치는 행위에 복으로 갚아주신다고 말한다.


이것은 결코 기독교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도 아니다. 그런데도 교회는 왜 헌금에 매여 있는가? 왜 헌금에 대하여 자유하지 못하는가? 왜 교회부흥을 성경적인 고찰도 없이 무조건 하나님의 뜻이라고 외치고 있는가? 이것은 자기의 욕심이 교회를 통해서 드러나고 있을 뿐이다. 진실로 교회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외에는 힘으로 삼는 것이 없어야 한다. 교인이 한 사람도 없어도, 헌금이 없어서 굶게 되는 형편 속에서도 오직 하나님을 힘으로 삼는 그 모습이 진정으로 십자가를 아는 것이고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구약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십일조를 바치라고 한 것은 그들이 얻은 수확이 그들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얻어진 결과임을 고백하라는 것이었다. 즉 그들이 가나안 땅에서 얻게 된 수확의 십의 일을 하나님께 바칠 수 있게 된 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선택해서 애굽에서 빠져나오게 하시고 약속의 땅으로 들여보내신 구원사역의 결과였던 것이다. 결국 십일조는 단지 소득의 십분의 일은 하나님의 것이니까 하나님께 바쳐라는 의미가 아닌 것이다.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이 정복할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이 전쟁에서 승리하셨기 때문에 얻어진 것이다. 이스라엘 자신들의 노력은 전혀 개입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십일조는 자신들의 노력은 전혀 개입되지 않고 단지 하나님께 선택받은 백성으로서 하나님이 자신을 위해서 싸우심으로 약속의 땅에 거하게 된 것에 대한 신앙고백적인 행위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유월절 희생의 피가 개입되어 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유월절 어린양의 피가 있었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유월절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생명을 얻은 자가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십일조에는 이 유월절 희생까지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니 가나안 땅에서의 소득은 그들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얻을 수 없는 것을 오직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은혜로서 얻어진 것들이었다.


따라서 십일조는 자기의 것에서 일부를 떼어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라면 도저히 얻을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이 주셨다는 고백과 함께 드리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입었기 때문이라는 고백인 것이다. 따라서 드리는 것도 은혜이며 이 은혜는 은혜받은 자만이 나타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헌신이라고 말한다. 헌신은 내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물론 교회는 우리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인데 그중 십분의 일을 바침으로 그것을 표시한다고 가르치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십일조만 바치고 나면 나머지는 내것이니까 내마음대로 사용해도 괜찮다는 의도가 담겨 있다. 즉 십분의 구를 내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십분의 일을 헌금하는 것이다. 이것도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것이다.


그럼 이 십일조가 오늘날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 십일조에는 유월절 희생이 담겨 있다고 했다. 유월절 희생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말한다. 즉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인해서 새로운 생명을 얻었고 이제는 그리스도안에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의 힘으로는 얻을 수 없는 구원에 참여한 자가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 밖에서는 죽은 자에 불과하다. 오직 그리스도안에서만 생명이 있는 자로 살 수 있을 뿐이다. 사망의 종노릇하던 우리가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하나님나라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생명인 것이다. 애당초 우리는 생명과는 상관없는 자였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생명에 참여한 자가 된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그리스도안에서 얻을 수 있는 열매이다


우리의 힘이 개입되지 않은 것이다. 오직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허락하신 은혜요 선물이다. 이 예수님의 피와 살로 주어진 생명을 감사하고 언제나 그리스도안에서 존재하는 것이 곧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 즉 십일조인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나를 죽이고 오직 그리스도를 좇아가는 것이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는 헌물인 것이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그리스도의 피가 발려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늘날 십일조는 바로 나 자신입니다. 내가 곧 하나님께 십일조가 되는 것이다.


신자는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자이다. 자신의 구원을 알고 감사하며 주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 세상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오직 주님이 가신 고난의 길을 기쁨으로 가는 것이 곧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헌금을 낼 때는 나의 구원에 담겨 있는 그리스도의 피와 살을 기억하며 기쁨으로 자원해서 내는 것이 되어야 한다.


돈의 액수가 문제가 아니다. 나에게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고 나는 그것을 맡은 자로서 이웃과 나누기 위해서 하나님께 바칠 때 그것이 곧 진정한 헌금이 되는 것이다. 돈이 헌금이 아니라 하나님께 가지고 나온 그 신앙의 자세가 하나님께 바쳐지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자세이다.


하나님을 믿는가? 헌금을 믿는가? 실로 교회와 신자들이 깊이 생각해야 할 문제이다. 헌금에 매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는 신앙이 되어야 한다. 헌금의 액수에 흔들리는 교회는 교회가 아니다. 단지 돈을 힘으로 삼고 있는 맘몬 신앙일 뿐이다. 하나님만을 힘으로 삼는 자는 헌금에 매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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