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1.04 23:39

기독교와 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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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9~12)라는 이 말씀 한마디로 인간에게서는 선이 나올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선을 행하고자 하는 인간의 노력은 모두 헛된 것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선한 일을 행하기 위해서 힘쓰는 윤리라는 것도 하나님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한낱 허구에 불과한 것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도대체 윤리가 무엇인가?

사람은 사회적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이 사회적 관계 속에서 요구되는 규범과 질서는 다른 사람에게 해가 되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개인의 자유가 타인의 행복을 침해해서는 안 되고 국가의 발전을 저해해서도 안 된다. 국가의 발전은 곧 국민의 행복과 직결된다.


때문에 국가의 발전과 질서를 무너뜨리는 행위는 곧 악이 되고 민중들의 분노를 살수밖에 없다. 결국 윤리라는 것은 내가 살아가고 있는 국가라는 단체, 즉 대한민국이라는 사회가 아름답고 이상적인 삶의 환경으로 되어지기를 기대하는 인간의 희망사항을 내포하고 있는 규범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윤리는 사회적인 관계에 있는 인간들이 자신들의 환경을 좀더 선하고 의로운 쪽으로 만들어 가고자 하는 열망과 기대감에서 도출된다. 자신의 환경이 선하고 의로운 쪽으로 성숙되어 갈수록 그 혜택은 결국 자신에게로 돌아오기 때문에 윤리로 가득 찬 이상 사회를 꿈꾸게 되는 것이다.


살기 좋은 세상, 도둑이 없고 폭력이 없고 밤거리를 마음대로 나다닐 수 있고 아이들을 마음놓고 학교에 보낼 수 있는 좋은 환경의 사회를 기대한다. 타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 윤리를 요구하는 것이다. 때문에 민중들은 윤리를 거부하고 파괴하는 행동을 용납하지 않는다. 반윤리적인 행동이 자신이 원하는 아름다운 사회에 대한 꿈을 무너뜨리기 때문이다.


이같은 인간 세계에서는 과연 어떤 사람이 위대한 영웅으로 등장하면서 민중들의 찬사와 존경을 받겠는가? 당연히 윤리적인 사람이다. 결국 사람들이 윤리적인 환경을 원하는 것은 이상적인 사회에 대한 기대감에서이고, 스스로 윤리적인 사람이 되고자 하는 것은 사람들의 칭찬과 존경을 받고자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사회적인 관계 속에서 살아갈 때 가지는 강한 충동 중의 하나는 자신의 우월성이 찬양받고 존경받고자 하는 욕망이다. 이 우월성은 여러 가지로 나타난다. 육체의 우월성은 힘과 건강이고, 정신의 우월성은 지혜와 총명이고, 소유의 우월성은 물질이며, 지식의 우월성은 학력이다. 그 가운데서 덕스러움, 관대함, 공정함, 용기, 온유함, 겸손 등을 포함하고 있는 '윤리'는 인간다움의 최고의 우월성으로 자리하고 있다. 때문에 자신의 우월성을 증명하고 싶은 욕망에 사는 인간으로서는, 윤리적인 사람이 되고 싶어하는 것은 극히 자연스런 모습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사람들은 자신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 윤리적인 사람이 되고자 하고 이것을 근거로 해서 칭찬과 존경을 받기를 원하는 것이다. 윤리에 대한 '욕구'인 것이다.



윤리와 종교와의 접목

이러한 윤리의 개념은 종교적인 차원으로까지 올라간다. 종교는 사람들의 윤리적인 능력을 계발해서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하고자 한다. 그것이 종교가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종교는 윤리를 내포한다. 윤리를 내포하지 않은 종교는 사람들에게 외면 당한다. 때문에 모든 종교는 자기 종교가 참 종교이고 사회에 꼭 필요한 종교이며 아름다운 사회를 건설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종교라는 것을 부각시키기 위해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윤리를 실천의 덕목으로 내세우게 되는 것이다.


고대로부터 모든 종교는 인간으로 시작해서 인간으로 마쳐진다.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종교이다. 종교는 인간이 신과 함께 하는 세계를 만들어 놓고 신에게 파격적인 권위와 가치를 부여한 데서 시작한다. 그리고 인간 편에서 신을 치장하면서 신에 대한 의식을 계획하고 실행해 나간다. 신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교리라는 것도 신이 직접 계시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기의 종교를 다른 종교와 차별화하기 위해서 짜놓은 각본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는 그 교리에 인간 스스로 권위와 가치를 부여해서 종교에 참여하는 모든 민중들에게 믿음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교리 안에 윤리가 내포된다.


결국 종교를 통해서 나오는 윤리는 이런 식으로 해서 무한한 권위와 가치를 지닌 채, 신의 요구사항으로 등장하게 된다. 윤리에서 이탈하는 것은 신의 명령에 대한 불복종으로, 신의 노여움을 살수밖에 없는 행위로 규정지어 버린다. 그래서 고대로부터 윤리를 벗어난 행동은 하늘의 진노를 사게 되고, 반면에 윤리 안에서 착함과 의로움을 보일 때는 신으로부터 주어지는 상이 있음을 말해왔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 스스로 인간의 감정과 정서에 맞는 신을 만들고, 신의 명령을 만든 가운데 스스로 신의 통제 속으로 들어감으로써 아름다운 사회를 깨뜨리는 인간의 나쁜 행동을 제약하고, 사회를 선한 쪽으로 유도하고자 하는 '종교'인 것이다. 그리고 윤리에 대한 실천을 신에 대한 믿음으로 내세우는 것이다. 결국 종교란 이상적인 사회에 대한 인간의 기대감과 열망을 싣고 있는 허구의 세계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 어떤 결과가 생겼는가?

이렇게 종교가 윤리에 대한 가치를 높이 평가할 때 나타나는 필연적인 현상은 신을 윤리적인 감정과 종교적 상상력을 가지고 묘사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종교들은 절대자의 모습을 하나같이 대자대비와 자애로움과 사랑으로 묘사한다. 불교는 부처의 모습을 대자 대비한 분으로 보여주기에 힘쓰고, 천주교에서도 예수님의 모습이나 마리아의 모습을 나타낼 때 인자하심과 사랑과 자비가 풍성한 모습으로 나타내기에 힘쓰지 않는가? 이것은 기독교도 예외가 아니다. 이것이 윤리적 감정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신에 대한 종교적 상상인 것이다.


어른이나 어린이에게 예수님의 얼굴을 그려보라고 한다면 백이면 백 모두가 자비하고 사랑이 많은 모습으로 표현하려고 한다. 영이신 하나님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리는 것은 성경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해서 그리지는 않지만 모든 사람들의 머리 속에는 자비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으로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이런 모든 것이 윤리적 감정을 가지고 있는 인간들의 종교적 상상력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인간을 죽이시는 하나님은 전혀 상상하지 못한다. 사랑의 하나님이 그럴 리가 없다고 한다. 무서우신 하나님이 아니라 손자를 귀엽게 바라보고 있는 할아버지 같은 하나님이 하나님답다고 생각한다.


결국 이러한 윤리적 감정과 종교적 상상력에 빠진 채 하나님을 찾고 성경을 보기 때문에 오늘날 기독교가 윤리를 신앙화 해서 믿음의 기준으로 세워버린 것이다. 이 때문에 교회가 하나님과 윤리를 함께 뒤섞어 버렸다. 윤리적인 하나님, 윤리적인 예수님을 가르친다. 그렇게 됐을 때 윤리가 부족한 신자는 자연히 신앙이 부족한 신자가 되어버린다. 윤리가 있으면 신앙이 좋고, 윤리가 없으면 신앙이 좋지 않은 자로 간주된다. 윤리가 있는 신자가 천국 가고 윤리가 없는 신자는 천국에 갈 수 없다는 식이다.


물론 윤리가 우리를 천국 보낸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렇게 되면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이단이 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윤리를 소홀히 할 수도 없다. 하나님을 믿는 신자가 세상 사람보다 윤리에서 뒤떨어지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로 여기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도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이것이 '기독교 윤리'로 포장된 채 교회에서 가르쳐지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윤리적인 분임을 증명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계시를 뒤진다. 하나님의 계시 안에서 윤리를 찾아내기에 혈안이 된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윤리에 대한 인간들의 기대와 요구를 들어주고 있는 것 같은 구절들만 추출하여 사용한다.


이런 자들에게 산상수훈은 눈이 번쩍 뜨이게 하는 말씀일 것이다. '남을 미워하지 말아라' '오른손이 한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는 등의 말씀들이 완벽한 윤리의 말씀으로 들린다. 타종교들도 최고의 윤리로 가득 차 있는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에는 머리를 조아릴 수밖에 없다고 으스댄다. 역시 기독교만이 참된 진리라고 자화자찬하고 만족해한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윤리(?)

그러면 예수님은 신자를 단지 윤리적인 고상한 인간으로 만들기 위해서 산상설교를 하셨는가? 그렇다면 석가나 공자 맹자와 같은 사람들의 가르침과 다를 바가 무엇인가? 미워하지 말라는 것이 어디 기독교에만 있는 말이던가?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하라는 말을 예수님만 하셨는가? 공자도 했고 석가도 했다.


종교적 윤리의 이상은 사랑이다. 종교는 자애심을 절대화하여 그것을 도덕생활의 규범과 이상으로 삼고 있다. 그리고 이웃의 생명에게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해서 이웃을 사랑의 대상으로 삼는다. 이러한 종교 안에서 기독교가 우리의 사랑만이 절대적이다라고 주장할 수 있는가? 사랑의 내용이 전혀 다르지 않는데 어떻게 차별화를 둘 것인가? 결국 교회가 예수님의 용서와 사랑을 계시적인 차원에서 보지 못하고 단지 윤리적인 차원으로 해석해버렸기 때문에 그 결과로 인해서 공자나 석가와 다를 바가 없는 윤리가 교회에서 튀어나오게 되는 것이다.


지금 교회에서는 소위 기독교 윤리가 있다. 그리고 세상은 세상 나름대로의 윤리가 있다. 이런 상호관계 속에서 모순이 발생한다. 인간 세계에서 가르치는 윤리는 선한가? 악한가? 만약 세상의 윤리가 선한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악하고 더럽다고 선언한 말씀에 위배된다. 세상에 있는 것이란 인간의 모든 정신과 사상, 윤리 도덕까지 다 포함하는 말이다.


때문에 세상의 윤리를 절대로 선하다고 말할 수 없다. 윤리가 선하다면 예수님은 세상에 오실 이유가 없다. 단지 선한 윤리를 실천하면 구원을 얻기 때문이다. 만약 윤리를 악하다고 할 것 같으면 분명히 산상설교는 세상 윤리와는 같아서는 안 된다. 세상 윤리가 악한 것인데 어떻게 산상설교가 세상 윤리와 같은 모습을 가질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불구하고 지금 교회는 산상설교를 단지 세상 윤리차원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져야 할 중요한 덕목으로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산상 설교를 인간의 악함을 고발하고 인간의 실체를 깨닫게 하는 계시적인 차원에서 이해하지 못한다. 산상설교는 인간에게는 의가 전혀 있을 수 없음을 고발하는 율법의 역할을 하고 있다. 스스로 의를 행하고자 하는 인간의 악함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의는 자신에게 의를 행할 가능성이 없음을 인정하고 완벽한 죄인으로서 주님을 의지할 때 주어지는 것임을 계시하는 것이 산상 설교다. 미워하는 것도 살인이고, 마음에 음욕을 품는 것도 간음이라는 말씀 앞에서 도대체 누가 윤리를 운운하겠는가? 그런데도 산상설교를 힘써 실천해야 할 신자의 덕목으로 가르쳐 버리기 때문에 사람들이 의를 스스로의 노력으로 창출해서 죄인의 자리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것이다.


신앙을 윤리로 치장하려고 하고 신앙의 부족함도 윤리를 통해서 메우려고 한다. 거듭남의 모습도 윤리를 통해서 확인하고자 하고 소위 성화라는 것도 윤리적 삶의 확대로 이해하며 경건의 모습 또한 윤리에서 찾으려고 한다. 윤리주의자인 마귀에 의해서 철저하게 기만당하고 있는 것이다.


신앙은 윤리를 요구하고 있지 않다. 신앙의 세계는 인간의 세계와 전혀 다른 세계이다. 인간 세계 안에 신앙 세계가 포함된 것이 아니다. 완전한 구별이고 단절이다. 따라서 인간 세계의 것이 신앙 세계로 들어올 수 없다. 하나님은 인간 세계의 것은 철저하게 부정하신다. 모두 더럽고 악한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윤리도 마찬가지이다. 윤리가 선으로 가장해서 신앙의 세계로 들어오는 것을 하나님은 결코 용납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왜 윤리를 용납하지 않으시는가?

교회는 이상적인 사회에 대한 기대감을 가지고 있다. 윤리와 도덕으로 잘 포장되어 있는 사회를 기대하고 교회가 거기에 보탬이 되고자 한다. 그들은 세상이 악해있는 이유를 인간의 비윤리적인 삶에서 찾고자 한다. 그리고 인간이 윤리적인 삶으로 나아가기만 한다면 설사 완벽한 선한 세상은 아니라 하더라도 인간이 꿈꾸는 이상적인 사회는 이루어갈 수 있지 않느냐고 한다. 윤리가 악을 저항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윤리가 악을 저항 할 수 있다면 세상은 분명 천국으로 점점 변해갔어야 한다. 고대로부터 인간세계는 윤리를 강조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의 악은 전혀 달라진 바가 없다.


앞서 말한 대로 윤리가 악에 대한 저항력을 가지고 있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십자가는 죄를 이길 수 있는 그 어떤 수단과 방법이 세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선언인데 윤리로서 죄를 극복하고 이상적인 세상을 건설하고자 하는 것은 십자가에 대한 정면 도전이 되는 셈이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십자가를 믿으면 선한 삶을 살게 되고 죄를 이길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한다는 것은 아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점이다.


'인간은 죄인이다. 죄인이라는 것은 죽었다는 선언이다. 죽은 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은 믿음이다. 그러나 죽은 자가 스스로 믿을 수는 없다. 외부의 힘에 의해서 믿음이 가능하다. 그래서 믿음을 은혜라고 한다.' 여기까지는 그들도 이해할 것이다. 하지만 다음부터 꼬이기 시작한다. '믿음으로 살아났으니까 선한 삶을 살아가야 하지 않는가?'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믿음이 있기 전에는 죽은 자이니까 선한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믿음이 주어졌다면 당연히 선한 삶을 살아가면서 죄를 극복한 모습이 보여져야 한다는 것이다. 선한 삶, 즉 온유하고 겸손하고 어려운 자들을 돕고 교회에서 봉사하고 교통 질서를 잘 지키는 등 윤리적인 선한 모습을 믿음의 증표로 여긴다. 이것이 믿음이 없는 자의 주장이다.


은혜를 말하면서 은혜를 제공하신 분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자기를 바라보고 있다. 하나님은 인간 세계의 것은 철저하게 부정하신다. 인간의 윤리도 마찬가지이다. 윤리가 선으로 가장해서 신앙의 세계로 들어오는 것을 하나님은 결코 용납하지 않으신다.


진심으로 은혜를 아는 자는 자신을 십자가 뒤에 감추어 버린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또한 성령을 받은 자는 하나님의 은혜만 알고자 한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2:12)


하나님은 우리에게 선한 삶을 통해서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라고 성령을 주신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하시기 위해서다. 그렇다면 성령 받은 자, 즉 거듭난 자는 자기의 가능성을 모두 포기하고 은혜만을 앞세울 것이다. 은혜만 앞세운다는 것은 자기 부인을 말한다.


믿음은 행함을 위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도록 하기 위해서다. 속에 불의가 없는 자는 보내신 이의 영광만 구한다(요 7:18). 자기 영광이 아니라 보내신 이의 영광만 구한다는 것은 자신을 죽이는 것이다. 이것이 성령의 일하심이다. 육체의 소욕을 죽이고 성령을 따라 살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믿음이 인간으로 하여금 선을 행하도록 하고 성령을 받기만 하면 자동적으로 능력이 주어지고 슈퍼맨이 되어서 윤리적인 삶이든 능력이든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은혜 아래 있지 아니한 것이다.


이런 자들이 많이 애용하는 성구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라는 말씀이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는 능력은 궁핍하든 풍부하든 자족하는 것을 말한다(빌 4:11,12).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궁핍하든 풍부하든 물질에 매이지 않고 주님으로 만족하는 삶을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주님으로 만족하는 삶을 스스로 행할 수 있는가? 만약 스스로 행할 수 있다면 인간이 윤리를 주장하는 것은 타당하다. 자신의 환경이 어떠하든 원망과 불평 없이 주님으로 만족하고 사는 삶만큼 고차원적인 윤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으로 만족하는 삶은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한 일이지 인간의 능력이 아니다.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안에 있다는 것은 윤리적인 삶을 사는 것으로 증거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가능성을 다 포기하고 주님만 의지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이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모습이다.


인간은 영원히 죄의 그림자를 벗어날 수 없다. 그런데 윤리로서 죄의 그림자에서 조금씩 벗어나고자 한다면 그것은 교만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능성을 앞세운다. 자존심이다. 인간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하나님의 선언에 벌컥 화를 낸다. 그리고 인간의 윤리와 종교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성취해 보겠다고 설친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을 도저히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나는 은혜로 하는 것이지 내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한다. 내면에는 이런 일을 하고 있는 자신에 대한 가치와 우월성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 '은혜로 한다'는 말을 하는 것은 그 말 한마디까지도 자신의 신앙의 우월성을 드러내기 위한 위장극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결국 윤리란 인간의 가능성을 앞세우는 교만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윤리를 용납하지 않으시는 것이다.



이상 세계 건설은 우리 능력 밖의 일

종교인들이 윤리를 통해 이상적인 세계를 꿈꾸는 것도 하나님의 계획과 정면으로 대치되는 것이다.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은 심판이다. 세상의 보존은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다(벧후 3:7). 심판과 멸망은 인간의 윤리와 도덕도 포함하고 있다. 하나님은 세상에 대해 기대하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 세상에 대한 기대감을 가지고 계신다면 무엇 때문에 세상을 멸망시키겠다고 하시는가? 하나님은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해서 일하시지 결코 고상하고 이상적인 나라로 만들어 가시기 위해서 일하시지 않는다. 우린 그것을 이스라엘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이스라엘은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이 땅에 파견된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심판을 보여주기 위해서 택함 받은 나라이다. 하나님은 세상을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기준으로 해서 죽음과 생명으로 나누신다는 것을 이스라엘을 통해서 증거하시고자 하신다(출 12:!3). 결국 이스라엘은 윤리와 도덕을 통해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그들의 할 일이 아니라 유월절 어린양의 피의 의미를 드러냄으로서 세상의 심판을 선포하는 것이다.


요 3:17절에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은 세상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신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 구원은 세상의 변화라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말하는 세상이란 땅 전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안의 택함 받은 백성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리스도는 분명히 세상을 위하여 존재하시지 않는다. 요 17:9절의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라는 말씀이 분명히 이를 증거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피로 교회를 세우신 것은 세상의 구원을 위해서가 아니라 십자가의 정신을 드러냄으로 그리스도밖에 있는 자들의 심판을 외치라는 것이다. 그럴 때 세상에는 차별화가 일어난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 받는 자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이고 구원을 얻는 자에게는 능력의 말씀으로 들려지기 때문이다(고전 1:18). 육체의 소욕을 죽이기를 원하는 십자가 앞에서 진짜와 가짜가 여실히 증명되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가 되어야 한다. 교회의 교회 됨은 십자가이지 결코 윤리의 모습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리를 교회다운 모습, 신자다운 모습으로 주장한다면 그 윤리는 분명히 교회에서만 보여져야 한다. 참된 교회의 모습이 불교에서는 보여질 수는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사랑이 교회의 모습이라면 그 사랑은 교회에서만 보여지는 것이 당연하지 불교나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들에게서는 보여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기독교가 말하는 사랑은 기독교외에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현 교회가 윤리적인 예수를 가르치다 보니까 많은 사람들은 교회가 가르치는 윤리가 교회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다른 종교에도 있다는 점을 주장하면서 모든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윤리로 세상을 바꿀 수 없다!

흔히들 교회가 세상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한다. 도대체 어떻게 변화시킨다는 것인가. 아름다운 세상으로? 사랑과 자비로 가득 찬 세상으로? 교회가 사랑을 베풀고 덕을 보이면 세상이 하나님을 찾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사랑과 덕이 하나님을 찾는데 도움이 된다면 왜 예수님 때는 온 세상이 총체적으로 복음을 거부했는가? 주님의 사랑이 부족해서인가? 주님이 덕이 없어서인가?


사실 예수님은 윤리적 감정에 파묻힌 인간이 상상하는 사랑과 덕을 내세워서 복음을 전하지 않으셨다. 선지자 사도들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예수, 선지자, 사도들에게서 훌륭한 인품과 덕목을 떠올리겠지만 성경에는 전혀 그런 모습이 나타나지 않는다.


목사도 마찬가지다. 종교인들은 목사를 윤리의 대표자로 여긴다. 목사는 또한 최대한 인품과 덕목으로 자신을 위장하고 무장해서 민중들의 신임을 받고자 한다. 십자가, 복음은 관심 밖이다. 오히려 십자가 지신 주님은 교회에서 몰아내고 훌륭한 인품을 소유한 윤리가인 예수를 내세운다. 고매한 인품을 소유함으로 자신의 가치를 드높이고 존경과 칭찬을 받고자 하는 민중의 욕구에 부응하기 위해서다.


목사의 인품과 윤리, 또는 신자들의 윤리와 덕이 전도에 도움이 된다는 생각은 오직 성령이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알게 하신다는 말씀에 위배된다(요 14:26). 성령의 활동은 독자적이다. 그런데도 인간의 윤리가 도움이 된다는 생각은 결국 은혜를 바라보지 못하고 인간에게 가능성을 두고 있는 불신앙에 불과하다. 성령의 지배를 받는 자가 아니라 조력자, 협력자로 자신을 내세우는 것이다.



인간의 행함은 오직 악함 뿐

윤리적 감정 속에서 그리스도를 찾고 성경을 해석하고 사랑과 덕을 앞장 세워서 세상을 변화시키고 죄인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겠다는 발상 자체부터 악이다. 의는 행함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어진다(롬 3:28). 아브라함의 의도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주어진 의다(롬 4:1-5). 행함이 믿음을 증거한 것이 아니라 믿음이 믿음을 증거한 것이다. 따라서 믿음의 결과란 우리에게 행함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행함만 의지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인간의 행함에는 그 어떤 가치도 두어서는 안 된다. 윤리 역시 마찬가지다.


윤리를 주장하면 필연코 새로운 법칙이 등장하게 된다. 성도로서 갖추어야 할 덕목을 제정해서 신자에게 요구하는 것이다. 결국 신자는 교회가 가르치는 몇 가지의 덕목에 순종함으로서 스스로 신자 되어 가는 줄로 착각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회개의 범위도 축소되어 버린다. 한가지 덕목을 순종할 때마다 자신에게서는 회개거리가 한가지 줄어드는 셈이 된다. 그리고 회개거리가 줄어들수록 신앙에 자신감을 가지게 되고 교만에 빠지게 된다.


흔히 야고보서의 행함을 윤리로 연관지어서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여기서 행함이란 주님의 길에 대한 순종을 말한다.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약 1:22)"에서의 '도'란 십자가의 도를 가리킨다. 즉 윤리적인 행함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길에 대한 순종이다. 윤리를 나타내기 위한 행함이 아니라 십자가에 자신을 헌신하는 결단을 말한다.


결국 믿음이란 그 어떤 행함도 요구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신자에게 요구하는 것은 십자가만 바라보는 것이다. 윤리적인 삶이 없어서 불안해하는 것은 구원의 능력이신 십자가를 불신하는 것이다. 모든 일을 주님이 하신다. 성령이 내 안에 내주 하심으로 터져 나오는 것이 성령의 열매이다.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을 때 성령의 주도 아래 보여지는 것이다(갈 5:24). 그럼에도 인간 스스로 성령의 열매를 맺고자하는 것은 성령을 가장한 육의 모습에 불과함을 알아야 한다.



우리의 삶은 오직 은혜로 인함이다.

윤리란 인간의 망상이다. 신자는 오직 은혜 아래 살뿐이다. 행함이란 십자가 앞에 자신을 부인하고 성령의 다스림 아래 있을 때 자연적으로 발산되는 것이다. 십자가 아래서 자신을 바라보는 자는 모두가 죄인임을 알기에 우월감이 드러나지 않는다. 자랑이 없고 교만이 없다. 주님이 계시는 것으로 만족하기 때문에 욕심이 없고 시기와 미움이 발산되지 않는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인생에 순종하기 때문에 불평과 원망이 없다. 이런 것들이 성령의 다스림을 받아 살아가는 신자의 모습이다. 인간의 행함으로는 전혀 나타낼 수 없는 삶이다.


신자는 윤리를 추구할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의해 온전히 점령된 삶을 추구해야 한다. 성령이 우리 안에 오셨다는 것은 모든 일은 주님이 하시겠다는 뜻이다. 인간의 계획과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성령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계획과 목표에 순종하기 위해서 성령을 구해야 한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는 말씀과 같이 우리는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그렇다고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우리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가지에 불과하다. 열매란 가지 스스로 맺는 것이 아니라 나무에 붙어 있기에 저절로 맺어진다. 성령의 인도를 받아 살 때 성령의 의해서 맺어지는 것이다. 선은 자기를 극복한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서만 보여지는 것이지 결코 우리의 노력이나 의지로서 보여지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행할 수 있는 윤리라면 그것은 이미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너희가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데 왜 하지 않으려고 하느냐' 이것을 말씀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너희는 할 수 없는 존재인데 왜 자꾸 너희 힘으로 하려고 하느냐'를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이것을 안다면 우리가 우리의 인격과 양심을 가지고 윤리와 도덕으로 나아가려고 하는 것이 얼마나 헛된 것이며, 하나님의 뜻과 반대된 것인가를 알 것이다. 윤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서 자연스럽게 보여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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