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생활의 가장 큰 덕목을 윤리적 삶에 두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윤리적 삶을 추구하는 것이 자신의 삶에 의를 구축하여 그 의로서 자신을 정당화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윤리적 삶을 선으로 규정하고 실천을 통하여 자기 믿음을 확인하고자 하며 자신의 선으로 하나님께 영광돌리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은 곧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의 본질과 의미를 정확히 알고 있지 않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물론 신자는 윤리적 삶과 상관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신자는 분명 윤리와 도덕적 삶에 있어서 세상으로부터 비난을 받아서는 안된다. 다만 윤리적 삶을 신앙의 본질이나 믿음의 덕목으로 여겨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신앙생활의 덕목을 윤리적 삶에 초점을 두다보니 결국 하나님의 말씀도 윤리와 도덕에 초점을 맞추어 해석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예수님을 윤리강연이나 하는 분으로 전락시켜 버리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부분이 산상수훈일 것이다. 또한 사도들이 기록한 서신서의 많은 부분도 윤리적 삶과 연결하여 해석하는 것도 많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마 5:13-14)라는 말씀은, 신자는 세상에서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한다고 해석하면서 윤리적 삶으로 세상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강조하고,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마 6:3-4)는 말씀은, 신자는 좋은 일도 은밀하게 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마 7:1-2)는 말씀은 예외없이 남을 비판하는 것은 나쁜 것이니 비판해서는 안된다는 윤리와 도덕으로 해석해 버린다.
또한 벧후 1:5-7절과 같은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고 말씀하는 내용은 대개가 믿음의 덕목으로 강조하면서 신자가 힘써 실천해야 할 삶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믿음의 덕목을 실천함으로써 믿음이 성장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가르치기도 한다.
갈 5:22-23절의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고 말씀하는 성령의 열매도 성령 받은 신자가 실천해야 할 덕목으로 강조해 버린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주신 것을 그러한 덕목을 실천하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들이 성경을 도덕 교과서로 여기는 것과 바를 바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사실 신자가 세상에서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하고, 남을 비판해서는 안되고, 덕을 세워야 하고, 인내해야 하고,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하고, 형제 우애가 있어야 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모르지 않다. 또한 굳이 그러한 사실들을 성경을 통해서 비로소 알게 되는 것도 아니다. 설사 성경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이라고 해도 그들이 가지고 있는 윤리적 상식을 통하여 얼마든지 알고 있고 또 그렇게 살려고 애를 쓰는 사람들도 많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교회에서 비판하지 말고, 덕을 세우고, 사랑을 하고, 겸손할 것 등을 힘쓰라고 강조하며, 그것이 곧 믿음을 지키고 믿음이 성장하는 길이고 신자가 힘써야 할 삶이라는 것을 가르치는 것을 보면 참으로 답답할 뿐이다.
신자가 그러한 삶을 실천하기 싫어서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무작정 실천을 힘쓰라고 강조하면 사실 듣는 신자입장에서도 답답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설사 ‘열심을 내서 실천해야지’라는 각오를 하였다고 해도 얼마가지 않아 벽에 부딪히게 되고 마음과 달리 실천을 이루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 낙담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믿음의 열매를 맺지 못하고 실천을 하지 못하는 원인을 자신이 정욕에 눈이 멀었거나, 현재의 상황에만 집착하거나, 시험과 유혹에 빠져 들었거나, 말씀과 기도에 게을렀다는 것 네 가지로 분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그 대책으로 당연히 이 네 가지를 시정하려 들게 된다. 욕심을 줄이며 주위 여건을 바라보지 않고 죄에서 돌아서서 더욱 기도와 말씀에 열심을 내면 믿음의 성화가 이루어지고 열매를 맺을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이처럼 성경의 내용을 단순히 열심과 실천으로 강조하는 것은 마치 향방 없는 달음질을 하는 것과 같고, 허공을 치는 것과 같을 뿐임을 알아야 한다. 윤리와 도덕은 얼마든지 인간의 각오와 의지와 열심으로 실천할 수 있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열매들은 맺어지는 것이지 내 의지로 맺을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도는 벧후 1:8-9절에서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이런 것이 없는 자는 소경이라 원시치 못하고 그의 옛 죄를 깨끗케 하심을 잊었느니라”는 말을 한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는 덕, 지식, 절제, 인내, 경건, 형제 우애, 사랑의 열매가 있는 것인데 이러한 열매가 없다면 그것은 눈앞만 보고 멀리 바라보지를 못하는 소경과 같고, 옛 죄를 깨끗케 하심을 잊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옛 죄를 깨끗케 하심을 잊었다는 것은, 죄가 깨끗하게 된 신자가 또 다시 죄를 짓기 때문에 열매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자신이 어떤 상태와 형편에서 구출되었는가를 잊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강도들처럼 흉악한 죄 중에 있을 때, 그것도 하나님을 외면하고 그분과 원수 상태에 있을 때에 십자가에 흘리신 주님의 보혈의 공로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어졌음을 잊고 있다는 것이다.
죄를 용서하신 예수님의 은혜를 잊었기에 은혜를 보답하는 삶을 살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다. 이전에 예수님을 몰랐을 때의 내 삶이 얼마나 더럽고 추했는지, 정말 흑암의 세력에 눌려 살았던 그 때의 삶이 너무나 악했음을 깨달았기에 또 다시 그 길을 가지 않겠노라는 각오가 있는가를 묻는 것이다. 예수님 없이 스스로의 판단과 힘과 열심으로 사는 것은 헛될 뿐이고 아무런 가치가 없으며, 그런 삶의 열매라고는 오직 영원한 죽음으로 끝날 뿐이기에 아예 꿈도 꾸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사단은 신자가 스스로의 힘으로 윤리적 삶을 살겠다고 노력하는 것을 방해 하지 않는다. 어차피 며칠 못 가 또 실패하고, 실패하면 할수록 낙담에 빠지고 게을러지며, 결국에는 아예 포기하게 될 줄 뻔히 알기 때문이다. 사단에게는 신자가 스스로 도덕군자가 되겠다고 설치는 것만큼 옆에서 박수치고 좋아하는 일이 없는 것이다.
옛 죄를 깨끗케 하심을 잊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을 잊었음을 뜻한다. 물론 완전 기억 상실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존재하는 지금의 모든 것이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인한 것임을 잊고 산다는 것이다. 긍휼과 자비하심이 자신의 모든 죄를 용서하고 의의 자리로 이끌었음을 잊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겸손이 있을리 없고, 덕이 있을리 없고, 온유와 사랑과 절제 등이 있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은 신자가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과 긍휼과 자비하심에 머물러 있을 때 맺어지는 열매들이기 때문이다.
갈 5:24-25절을 보면 성령의 열매에 대해 언급한 후에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라는 말을 한다. 이 내용을 보면 신자가 성령으로 사는 것을 그 정과 욕심이 십자가에 못박힌 자로 사는 것으로 얘기 한다. 즉 십자가의 은혜 아래서 자신의 무능함을 철저히 인식하는 것이다. 이것이 성령의 권능이다. 결국 성령의 열매 또한 인간이 실천해야 할 내용이 아니라 그 열매들을 통해서 우리가 무엇에 붙들려 살아가는가를 확인하게 해주는 것이다.
신자의 싸움은 십자가를 잊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는 싸움이어야 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의 열매들은 모두가 그리스도에게 있는 것들이기에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을 알아감으로써 맺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개의 경우 이러한 싸움에 대해 전혀 생각지 않는다. 이미 예수님을 잘 알고 있고 십자가의 은혜도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엡 3:17-19절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고 말씀하는 것처럼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날마다 깨달아 가야 한다. 즉 감히 ‘나는 사랑을 안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의 분량이 어떠한가를 알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서 날마다 새롭게 사랑을 발견하고 깨달을 수 있는 길로 이끌어 가시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믿음의 풍성한 열매를 나타내시는 것이다. 십자가를 잊지 않는 자로 사는 것, 이것이야 말로 신자가 날마다 힘쓰고 싸워야 할 삶이다. 십자가를 잊지 않고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의 권능에 내 마음이 점령당할 때 신자는 믿음의 열매가 나타나는 삶을 외면할 수 없게 된다.
(2008. 3)
물론 신자는 윤리적 삶과 상관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신자는 분명 윤리와 도덕적 삶에 있어서 세상으로부터 비난을 받아서는 안된다. 다만 윤리적 삶을 신앙의 본질이나 믿음의 덕목으로 여겨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신앙생활의 덕목을 윤리적 삶에 초점을 두다보니 결국 하나님의 말씀도 윤리와 도덕에 초점을 맞추어 해석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예수님을 윤리강연이나 하는 분으로 전락시켜 버리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부분이 산상수훈일 것이다. 또한 사도들이 기록한 서신서의 많은 부분도 윤리적 삶과 연결하여 해석하는 것도 많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마 5:13-14)라는 말씀은, 신자는 세상에서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한다고 해석하면서 윤리적 삶으로 세상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강조하고,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마 6:3-4)는 말씀은, 신자는 좋은 일도 은밀하게 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마 7:1-2)는 말씀은 예외없이 남을 비판하는 것은 나쁜 것이니 비판해서는 안된다는 윤리와 도덕으로 해석해 버린다.
또한 벧후 1:5-7절과 같은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고 말씀하는 내용은 대개가 믿음의 덕목으로 강조하면서 신자가 힘써 실천해야 할 삶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믿음의 덕목을 실천함으로써 믿음이 성장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가르치기도 한다.
갈 5:22-23절의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고 말씀하는 성령의 열매도 성령 받은 신자가 실천해야 할 덕목으로 강조해 버린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주신 것을 그러한 덕목을 실천하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들이 성경을 도덕 교과서로 여기는 것과 바를 바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사실 신자가 세상에서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하고, 남을 비판해서는 안되고, 덕을 세워야 하고, 인내해야 하고,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하고, 형제 우애가 있어야 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모르지 않다. 또한 굳이 그러한 사실들을 성경을 통해서 비로소 알게 되는 것도 아니다. 설사 성경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이라고 해도 그들이 가지고 있는 윤리적 상식을 통하여 얼마든지 알고 있고 또 그렇게 살려고 애를 쓰는 사람들도 많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교회에서 비판하지 말고, 덕을 세우고, 사랑을 하고, 겸손할 것 등을 힘쓰라고 강조하며, 그것이 곧 믿음을 지키고 믿음이 성장하는 길이고 신자가 힘써야 할 삶이라는 것을 가르치는 것을 보면 참으로 답답할 뿐이다.
신자가 그러한 삶을 실천하기 싫어서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무작정 실천을 힘쓰라고 강조하면 사실 듣는 신자입장에서도 답답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설사 ‘열심을 내서 실천해야지’라는 각오를 하였다고 해도 얼마가지 않아 벽에 부딪히게 되고 마음과 달리 실천을 이루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 낙담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믿음의 열매를 맺지 못하고 실천을 하지 못하는 원인을 자신이 정욕에 눈이 멀었거나, 현재의 상황에만 집착하거나, 시험과 유혹에 빠져 들었거나, 말씀과 기도에 게을렀다는 것 네 가지로 분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그 대책으로 당연히 이 네 가지를 시정하려 들게 된다. 욕심을 줄이며 주위 여건을 바라보지 않고 죄에서 돌아서서 더욱 기도와 말씀에 열심을 내면 믿음의 성화가 이루어지고 열매를 맺을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이처럼 성경의 내용을 단순히 열심과 실천으로 강조하는 것은 마치 향방 없는 달음질을 하는 것과 같고, 허공을 치는 것과 같을 뿐임을 알아야 한다. 윤리와 도덕은 얼마든지 인간의 각오와 의지와 열심으로 실천할 수 있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열매들은 맺어지는 것이지 내 의지로 맺을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도는 벧후 1:8-9절에서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이런 것이 없는 자는 소경이라 원시치 못하고 그의 옛 죄를 깨끗케 하심을 잊었느니라”는 말을 한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는 덕, 지식, 절제, 인내, 경건, 형제 우애, 사랑의 열매가 있는 것인데 이러한 열매가 없다면 그것은 눈앞만 보고 멀리 바라보지를 못하는 소경과 같고, 옛 죄를 깨끗케 하심을 잊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옛 죄를 깨끗케 하심을 잊었다는 것은, 죄가 깨끗하게 된 신자가 또 다시 죄를 짓기 때문에 열매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자신이 어떤 상태와 형편에서 구출되었는가를 잊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강도들처럼 흉악한 죄 중에 있을 때, 그것도 하나님을 외면하고 그분과 원수 상태에 있을 때에 십자가에 흘리신 주님의 보혈의 공로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어졌음을 잊고 있다는 것이다.
죄를 용서하신 예수님의 은혜를 잊었기에 은혜를 보답하는 삶을 살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다. 이전에 예수님을 몰랐을 때의 내 삶이 얼마나 더럽고 추했는지, 정말 흑암의 세력에 눌려 살았던 그 때의 삶이 너무나 악했음을 깨달았기에 또 다시 그 길을 가지 않겠노라는 각오가 있는가를 묻는 것이다. 예수님 없이 스스로의 판단과 힘과 열심으로 사는 것은 헛될 뿐이고 아무런 가치가 없으며, 그런 삶의 열매라고는 오직 영원한 죽음으로 끝날 뿐이기에 아예 꿈도 꾸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사단은 신자가 스스로의 힘으로 윤리적 삶을 살겠다고 노력하는 것을 방해 하지 않는다. 어차피 며칠 못 가 또 실패하고, 실패하면 할수록 낙담에 빠지고 게을러지며, 결국에는 아예 포기하게 될 줄 뻔히 알기 때문이다. 사단에게는 신자가 스스로 도덕군자가 되겠다고 설치는 것만큼 옆에서 박수치고 좋아하는 일이 없는 것이다.
옛 죄를 깨끗케 하심을 잊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을 잊었음을 뜻한다. 물론 완전 기억 상실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존재하는 지금의 모든 것이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인한 것임을 잊고 산다는 것이다. 긍휼과 자비하심이 자신의 모든 죄를 용서하고 의의 자리로 이끌었음을 잊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겸손이 있을리 없고, 덕이 있을리 없고, 온유와 사랑과 절제 등이 있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은 신자가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과 긍휼과 자비하심에 머물러 있을 때 맺어지는 열매들이기 때문이다.
갈 5:24-25절을 보면 성령의 열매에 대해 언급한 후에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라는 말을 한다. 이 내용을 보면 신자가 성령으로 사는 것을 그 정과 욕심이 십자가에 못박힌 자로 사는 것으로 얘기 한다. 즉 십자가의 은혜 아래서 자신의 무능함을 철저히 인식하는 것이다. 이것이 성령의 권능이다. 결국 성령의 열매 또한 인간이 실천해야 할 내용이 아니라 그 열매들을 통해서 우리가 무엇에 붙들려 살아가는가를 확인하게 해주는 것이다.
신자의 싸움은 십자가를 잊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는 싸움이어야 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의 열매들은 모두가 그리스도에게 있는 것들이기에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을 알아감으로써 맺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개의 경우 이러한 싸움에 대해 전혀 생각지 않는다. 이미 예수님을 잘 알고 있고 십자가의 은혜도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엡 3:17-19절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고 말씀하는 것처럼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날마다 깨달아 가야 한다. 즉 감히 ‘나는 사랑을 안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의 분량이 어떠한가를 알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서 날마다 새롭게 사랑을 발견하고 깨달을 수 있는 길로 이끌어 가시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믿음의 풍성한 열매를 나타내시는 것이다. 십자가를 잊지 않는 자로 사는 것, 이것이야 말로 신자가 날마다 힘쓰고 싸워야 할 삶이다. 십자가를 잊지 않고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의 권능에 내 마음이 점령당할 때 신자는 믿음의 열매가 나타나는 삶을 외면할 수 없게 된다.
(2008.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