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강조되는 것은 믿음이고, 그 믿음은 결국 교회 안에서의 종교 행위와 윤리적 행동으로 해석되어 요구되고 있는 것이 지금의 교회 현실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러한 수준의 믿음은 이미 하나님에 의해 거부되었음을 성경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사야 1:13절의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는 말씀이나 미가 6:6-8절의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 일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를 인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는 말씀이나 호세아 6:6절의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는 말씀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는 인간의 종교 행위와 윤리적 행동과는 상관이 없는 것임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종교 행위에 있어서 이스라엘의 열심은 참으로 대단한 것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러한 모든 열심들이 하나님에 의해 거부되었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믿음에 대해서, 그리고 믿음의 대상에 대해서 큰 착각 속에 빠져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현대 교회 역시 이러한 착각에 빠져서 믿음 아닌 것을 믿음으로 간주하면서 이스라엘과 동일한 비신앙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부르고 있음을 또한 엿볼 수 있기에 하나님을 신앙한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과연 하나님을 신앙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이 문제는 출애굽기 20:3절에서 말씀하는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는 계명을 바르게 이해함으로써 알 수 있다.
대개의 기독교인들은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는 계명에 대해 크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든 자신은 다른 신을 결코 섬기지 않는다고 장담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다른 신이라는 말을 하나님으로 불리는 신이 아닌 다른 신, 즉 부처나 무당들이 말하는 귀신 등으로 이해한다면 거의 모든 기독교인들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않는다고 말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적어도 교회를 다니면서도 절을 찾아가 부처에게 절하며 기원을 하고, 점쟁이를 찾아가고 무당을 불러 굿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말이다.
하지만 다른 신이라는 말의 의미는 그렇게 간단하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교회를 다니고 하나님만 신으로 인정한다고 해서 다른 신을 섬기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른 신이라는 것은 신의 명칭에 의해서 구분되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나 부처처럼 이름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 다른 신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부른다고 해서 그것이 곧 하나님을 신앙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것이 아니란 것을 알아야 한다.
출애굽기 20:2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십계명을 주시면서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는 말씀을 하신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인간의 요구에 따라 일하시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계획과 목적에 따라 일하시는 분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것은 하나님의 언약이었다. 출애굽기 6:2-5절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로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가나안 땅 곧 그들의 우거하는 땅을 주기로 그들과 언약하였더니 이제 애굽 사람이 종을 삼은 이스라엘 자손의 신음을 듣고 나의 언약을 기억하노라”고 말씀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하나님이 세우신 언약에 따라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출하신 것이다.
즉 하나님은 인간의 소원을 이루어주시기 위해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 언약을 성취하시기 위해 일하시는 분임을 말하는 것이다. 이처럼 자기 백성에게 언약을 세우시고 언약을 성취하시기 위해 일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아는 신자라면 자기 소원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을 수는 없는 것이다.
모세가 하나님을 부름을 받고 시내산으로 올라가서 내려오지 않을 때 산 밑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기다리지 못하고 아론에게 ‘일어나라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출 32:1)고 요구한다. 그리고 금을 모아 송아지 형상을 만들고 “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출 32:4)고 선언하고 그 앞에 단을 쌓고 제사를 드린다.
대개의 사람들은 이스라엘이 송아지라는 형상을 만든 것을 두고 우상을 섬겼다고 이해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들이 송아지 형상을 만든 이유다. 그 이유는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한 길을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그것을 숭배하며 그것에게 희생을 드리며 말하기를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 하였도다”(출 32:8)는 말씀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자신을 위한 신을 자기들의 곁에 두고 싶었던 것이다.
이스라엘은 분명히 하나님이라는 신을 버리고 다른 이름의 신을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분은 인간의 소원과 계획과 목적을 위해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언약을 위해 일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자기를 위해 송아지 형상을 만든 것이다. 다시 말해서 단순히 형상을 만들었기에 우상이 아니라 자기를 위해 신을 섬긴다는 것이 우상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친히 언약을 세우시고 언약을 성취하시기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이 자기 소원을 가지고 그 소원을 이루기 위해 찾는 하나님이라면 그것이 곧 다른 신이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이처럼 자기 소원을 이루기 위해 신을 찾을 때 틀림없이 등장하는 것은 믿는 자의 정성과 열심이다. 그리고 ‘내가 이러한 정성과 열심을 보였더니 신이 나의 소원을 이루어 주셨다’는 자기 자랑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종교성이다. 그리고 이러한 종교성에 의해 만들어진 모든 신은 다른 신으로 간주될 뿐이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하나님이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시고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 그리고 우리는 그 아들 안에서 구속, 곧 죄사함을 얻었다(골 :13-14). 신자에게는 이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 있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모두 우상일 뿐이다. 비록 ‘하나님’이라는 명칭을 부른다고 해도 말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시고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셔서 구속을 얻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 앞에 우리는 과연 무슨 다른 소원을 내어 놓을 수 있는가? 만약 하나님의 은혜 앞에 다른 소원을 내어 놓는다면 그것은 우리를 구속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도 부족하다는 것을 뜻할 뿐이다. 즉 하나님의 은혜를 멸시하는 것일 뿐이다.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서 해야 했던 것은, 자신들을 바로의 권세에서 건져 내시고 어린양의 희생의 피에 참여하게 하셔서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게 하신 은혜를 감사하고 높이는 것이었다. 이것이 이스라엘다움이며 참된 신앙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길을 예비하시고 가장 복되고 선한 길로 인도하신다. 복되고 선한 길이란 세상의 가치관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세상의 것으로 풍족한 길을 간다고 해도 그 마지막이 영원한 죽음으로 끝난다면 그 길은 저주의 길에 불과할 뿐이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예비하신 복되고 선한 길은 우리의 생명이 사는 길이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그러한 복된 길로 인도하신 분임을 믿는 것이 신앙이며, 이러한 신앙에는 세상에 목적을 둔 자기 소원은 존재하지 않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베푸신 복된 것들에 비해 나의 소원이라는 것들은 모두 썩어질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길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만을 신뢰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참된 신앙이다.
이사야 1:13절의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는 말씀이나 미가 6:6-8절의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 일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를 인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는 말씀이나 호세아 6:6절의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는 말씀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는 인간의 종교 행위와 윤리적 행동과는 상관이 없는 것임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종교 행위에 있어서 이스라엘의 열심은 참으로 대단한 것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러한 모든 열심들이 하나님에 의해 거부되었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믿음에 대해서, 그리고 믿음의 대상에 대해서 큰 착각 속에 빠져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현대 교회 역시 이러한 착각에 빠져서 믿음 아닌 것을 믿음으로 간주하면서 이스라엘과 동일한 비신앙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부르고 있음을 또한 엿볼 수 있기에 하나님을 신앙한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과연 하나님을 신앙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이 문제는 출애굽기 20:3절에서 말씀하는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는 계명을 바르게 이해함으로써 알 수 있다.
대개의 기독교인들은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는 계명에 대해 크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든 자신은 다른 신을 결코 섬기지 않는다고 장담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다른 신이라는 말을 하나님으로 불리는 신이 아닌 다른 신, 즉 부처나 무당들이 말하는 귀신 등으로 이해한다면 거의 모든 기독교인들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않는다고 말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적어도 교회를 다니면서도 절을 찾아가 부처에게 절하며 기원을 하고, 점쟁이를 찾아가고 무당을 불러 굿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말이다.
하지만 다른 신이라는 말의 의미는 그렇게 간단하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교회를 다니고 하나님만 신으로 인정한다고 해서 다른 신을 섬기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른 신이라는 것은 신의 명칭에 의해서 구분되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나 부처처럼 이름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 다른 신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부른다고 해서 그것이 곧 하나님을 신앙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것이 아니란 것을 알아야 한다.
출애굽기 20:2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십계명을 주시면서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는 말씀을 하신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인간의 요구에 따라 일하시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계획과 목적에 따라 일하시는 분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것은 하나님의 언약이었다. 출애굽기 6:2-5절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로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가나안 땅 곧 그들의 우거하는 땅을 주기로 그들과 언약하였더니 이제 애굽 사람이 종을 삼은 이스라엘 자손의 신음을 듣고 나의 언약을 기억하노라”고 말씀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하나님이 세우신 언약에 따라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출하신 것이다.
즉 하나님은 인간의 소원을 이루어주시기 위해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 언약을 성취하시기 위해 일하시는 분임을 말하는 것이다. 이처럼 자기 백성에게 언약을 세우시고 언약을 성취하시기 위해 일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아는 신자라면 자기 소원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을 수는 없는 것이다.
모세가 하나님을 부름을 받고 시내산으로 올라가서 내려오지 않을 때 산 밑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기다리지 못하고 아론에게 ‘일어나라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출 32:1)고 요구한다. 그리고 금을 모아 송아지 형상을 만들고 “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출 32:4)고 선언하고 그 앞에 단을 쌓고 제사를 드린다.
대개의 사람들은 이스라엘이 송아지라는 형상을 만든 것을 두고 우상을 섬겼다고 이해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들이 송아지 형상을 만든 이유다. 그 이유는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한 길을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그것을 숭배하며 그것에게 희생을 드리며 말하기를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 하였도다”(출 32:8)는 말씀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자신을 위한 신을 자기들의 곁에 두고 싶었던 것이다.
이스라엘은 분명히 하나님이라는 신을 버리고 다른 이름의 신을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분은 인간의 소원과 계획과 목적을 위해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언약을 위해 일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자기를 위해 송아지 형상을 만든 것이다. 다시 말해서 단순히 형상을 만들었기에 우상이 아니라 자기를 위해 신을 섬긴다는 것이 우상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친히 언약을 세우시고 언약을 성취하시기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이 자기 소원을 가지고 그 소원을 이루기 위해 찾는 하나님이라면 그것이 곧 다른 신이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이처럼 자기 소원을 이루기 위해 신을 찾을 때 틀림없이 등장하는 것은 믿는 자의 정성과 열심이다. 그리고 ‘내가 이러한 정성과 열심을 보였더니 신이 나의 소원을 이루어 주셨다’는 자기 자랑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종교성이다. 그리고 이러한 종교성에 의해 만들어진 모든 신은 다른 신으로 간주될 뿐이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하나님이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시고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 그리고 우리는 그 아들 안에서 구속, 곧 죄사함을 얻었다(골 :13-14). 신자에게는 이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 있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모두 우상일 뿐이다. 비록 ‘하나님’이라는 명칭을 부른다고 해도 말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시고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셔서 구속을 얻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 앞에 우리는 과연 무슨 다른 소원을 내어 놓을 수 있는가? 만약 하나님의 은혜 앞에 다른 소원을 내어 놓는다면 그것은 우리를 구속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도 부족하다는 것을 뜻할 뿐이다. 즉 하나님의 은혜를 멸시하는 것일 뿐이다.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서 해야 했던 것은, 자신들을 바로의 권세에서 건져 내시고 어린양의 희생의 피에 참여하게 하셔서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게 하신 은혜를 감사하고 높이는 것이었다. 이것이 이스라엘다움이며 참된 신앙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길을 예비하시고 가장 복되고 선한 길로 인도하신다. 복되고 선한 길이란 세상의 가치관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세상의 것으로 풍족한 길을 간다고 해도 그 마지막이 영원한 죽음으로 끝난다면 그 길은 저주의 길에 불과할 뿐이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예비하신 복되고 선한 길은 우리의 생명이 사는 길이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그러한 복된 길로 인도하신 분임을 믿는 것이 신앙이며, 이러한 신앙에는 세상에 목적을 둔 자기 소원은 존재하지 않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베푸신 복된 것들에 비해 나의 소원이라는 것들은 모두 썩어질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길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만을 신뢰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참된 신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