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12.30 12:14

명령법에 대한 소고

조회 수 2139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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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볼 때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은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의 십자가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신 그 사랑이다. 다른 말로 하나님은 조건과 상벌로 우리를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명령과 결과의 원리로 대한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명령이라고 하면 우리 모두 잘못된 선입관을 갖고 있다. 하나님이 신자에게 명령하신 것은, 힘들어도 반드시 지켜야 하고 무조건 순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형편과 처지와 상관없이 강제적으로 부과된 임무처럼 오해한다. 그래서 그 명령대로 순종하면 하나님이 상을 주고 불순종하면 벌을 주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즉 명령하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대해 인간이 얼마나 자율적으로 순종하였느냐가 상을 받는 관건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일단 한가지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그것은 과연 인간이 자율적으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수 있는 자질을 가지고 있느냐는 것이다. 가령 '용서하라'고 하셨을 때 이것을 실천을 요구하는 명령으로 받아들인다면, 이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서는 필히 명령을 받은 자에게 자율적으로 타인을 용서할 수 있는 자질이 있어야 한다. 용서의 자질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용서하라'는 명령을 한다면 그것은 분명 명령하는 자의 잘못이기 때문이다.


가령 군 입대 영장을 받은 청년에게 소총을 주면서 '이 소총을 분해하라'고 명령한다면 그것은 분명 잘못된 명령이다. 명령에 대한 실천을 원한다면 먼저 소총을 분해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친 뒤에 명령하는 것이 옳은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용서하라'는 말씀이 실천을 요구하는 명령이라면 인간에게는 예수님의 명령을 실천할 수 있는 자율적 능력이 있다는 것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인간에게는 타인을 용서할 수 있는 자질이 있는가?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용서할 수 있다고 여길 것이다.


물론 세상이 이해하고 있는 도덕적 개념에서의 용서라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또한 용서의 자질을 갖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수준의 자질은 신자가 아니라 신자 아닌 자들에게도 얼마든지 있다. 왜냐하면 도덕과 윤리, 그리고 인격만 어느 정도 갖추면 실천할 수 있는 것이 도덕적 개념의 용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신자 아닌 자도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할 수 있다는 이상한 결론이 내려지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타종교에서도 동일하게 가르치는 것과 같은 수준의 것으로 인정하는 결과 밖에 되지 않는다.


누구에게 명령을 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명령을 받는 사람이 어떤 일정한 능력과 수준과 위치에 도달되어 있다는 것이 전제가 되어야만 명령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용서하라'는 명령을 한다면 명령을 받는 사람이 용서 할 수 있는 능력과 수준에 도달되어 있다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과연 그러한가? 자율적으로 타인을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며 그러한 수준에 도달하였다고 말할 수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용서하라'와 같은 말씀들은 분명 우리가 실천해야 할 명령들이고, 명령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순종할 수 있는 능력과 수준에 있으면서도 순종치 않았다는 책망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명령에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이 없으며, 그러한 수준에 도달하지도 못한 것이 우리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일단 실천해야 할 명령법이라는 것 자체가 틀린 것이 된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우리의 수준이 어떠한지를 잘 아실 것인데 순종할 수준도 못되고 그러한 능력도 없는 자에게 실천을 요구하는 명령을 하신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남은 것은 우리가 명령에 순종할 능력과 수준에 도달했다는 것인데, 그렇게되면 결국 우리의 능력과 자질로 선을 행할 수 있다는 의미가 되고 만다. 하지만 이것은 롬 3:10-12절의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는 말씀에 맞지 않으며, 또한 시 14:3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는 말씀과도 맞지 않는다.


성경이 인간이 선을 행할 능력도 자질도 없음을 선언한다. 그런 인간에게 '용서'라는 선을 실천할 것을 명령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을 실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선'을 세상의 도덕과 윤리의 시각으로 이해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유대인들이 율법을 이해하는 시각과 다를 바 없다. 율법의 내면을 보지 못한 것처럼 예수님의 명령의 내면을 보지 못하기에 다만 실천해야 할 덕목으로만 보는 것이다.


그러면 왜 이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을 요구하는 명령으로 받아들이려고 하는가? 그것은 인간의 선한 행동이 믿음에 포함되어야 믿음의 가치가 향상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결국 자기 행함으로 말미암아 의를 이루고자 하는 종교적 욕망인 것이다.


이러한 욕망은 예수를 말하되 예수께 관심을 두지 않는다. 관심은 다만 자기 자신이다. 믿음의 가치를 향상시킴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높이고자 하는 몸부림일 뿐이다.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성취된 의에 관심을 두지 않고 자신의 행함으로 의를 성취하여 하나님 앞에 가치 있는 자로 존재하고자 하는 것이다.


믿음의 여부 또한 행함을 기준으로 하여 판단하게 되고 결국 동일하지 않은 행함을 구별하기 위해 행함에 차별을 두게 되고 상급을 언급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복음'과는 전혀 상관없는 주장일 뿐이다.


마 9:17절을 보면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고 말씀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는 것인데, 이것은 구약에서 말하는 것처럼 행함이 의가 되는 세대는 끝났음을 뜻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구약에 행함으로 의롭게 된 자가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행함으로 의롭게 된 자는 단 한 사람도 없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신 것이고, 의로우신 예수님이 흘리신 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고 의롭다 여김 받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넣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자의 의란 의로우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의로운 자로 여김 받게 되었음을 믿는 것이지 예수님의 명령을 실천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소위 명령법이란 무엇인가?


먼저 명령법을 '~ 하라'는 형식의 말씀으로 이해할 때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대개 사람들은 예수님의 명령이 '용서하라' '사랑하라' '기뻐하라' '감사하라'와 같이 윤리적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오해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요한복음 5장에 보면 38년 된 질병으로 인해서 스스로의 힘으로는 움직일 수 없는 병자에게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말씀한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분명 병자에게 하신 명령이다. 그런데 이 병자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일어나 걸어가게 된다. 이 경우 병자가 예수님의 명령에 대해 자율적 의지와 노력으로 실천한 것인가?


38년 된 병자로서 스스로의 힘으로는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다고 했다. 그렇다면 명령에 스스로 실천하기를 원해서 '일어나 걸어가라'고 명령하신 것이라면 병자의 상태를 생각지 않는 우스개 명령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어쨌든 병자는 일어나 걸어가게 된다. 이것을 두고 병자가 자율적 의지로 명령에 순종했다고 할 수 있는가? 병자가 일어나 걸어가긴 했지만 그것은 병자의 자율적 의지로 인한 결과가 아니다. 요 5:9절에서 말한 대로 병자가 나았기 때문에 일어나 걸어가게 된 것이다.


예수님은 '네가 나았으니까 일어나 걸어가라'고 말씀한 것이 아니라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하신 것뿐입니다. 그러나 병자는 이미 낫게 하시는 예수님의 능력 아래 있었던 것이다. 즉 명령에 대한 결과는 인간이 자율적 의지와 노력으로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명령에 대한 결과에 이미 자기 백성을 집어 넣으셨다는 것이다. 따라서 명령이란 명령받은 자가 어떤 위치에 있는가를 선포하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병자가 일어나 걸어간 것은 분명 병자의 움직임, 즉 행함이지만 이미 병자는 병을 낫게 하시는 예수님의 능력 안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병자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내가 일어나 걸어간다. 내가 참 대단한 존재다'가 아니라 '나를 낫게 하신 분이 누구인가?'를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다른 예를 하나 더 들어 본다면, 겔 37:4절을 보면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라고 말씀한다. 이 역시 소위 말하는 명령법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의 상식에 도저히 맞지 않는 명령이다. 왜냐하면 명령을 받은 대상이 마른 뼈이기 때문이다.


마른 뼈란 죽은 것을 뜻한다. 죽어서 뼈만 남은 상태, 즉 하나님의 어떤 말씀에 대해서도 자율적 의지로 반응할 수 없는 상태이다. 이런 상태의 존재를 향해서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는 명령을 하시는 것이다. 즉 명령에 대한 실천을 기대하신 것이 아니란 것이다.


그런데 마른 뼈들이 살아나고 생기가 들어가서 군대가 된다(겔 37:5-10). 이것이야말로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성취되어진 하나님의 일인 것이다. 명령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고 명령을 이루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인간은 단지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증거물로 하나님 앞에 서 있을 뿐인 것이다.


결국 '용서하라' '사랑하라' '기뻐하라' '감사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의미하는 바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과연 어떤 사람이 용서, 사랑, 기쁨, 감사를 실천할 수 있는가? '용서하라' '사랑하라' '기뻐하라' '감사하라'는 명령 역시 마른 뼈에게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는 것과 같고, 38년된 병자에게 '일어나 걸어가라'고 명령하는 것과 같다.


마른 뼈에게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라고 하는 것은 이미 마른 뼈가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 존재가 되었음을 뜻한다. 그러기에 그와 같은 명령이 가능한 것이 아니겠는가? 38년 된 병자에게 일어나 걸어가라고 하시는 것도, 이미 일어나 걸어갈 수 있는 인간이 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따라서 '감사하라'고 하신다면 '너는 범사에 감사하는 인간이 되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안에서 죽은 자를 살리시는 능력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인간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이해할 때 '감사하라'는 명령은 실천에 대한 요구가 아니라 그리스도안에서 어떤 인간이 되었는가를 보게 하시는 말씀인 것이다.


그렇다면 범사에 기뻐하는 모습이 있다고 해도 그것을 인간의 자율적 실천, 또는 행함이라고 말할 수가 없다. 다만 범사에 기뻐하는 인간으로 새롭게 창조하신 하나님의 능력만이 증거 될 뿐인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행위라 할 수 없는 것이고 인간의 행위가 아니기에 차별도 없고 자랑도 없으며 행위로 인한 상이라는 것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신자는 그리스도의 의안에서 죽은 자를 살리시는 능력으로 말미암아 새 생명이 된 자이다. 그러므로 신자는 새 생명 안에서 그리스도의 의를 자랑할 뿐이다.


예수님의 명령은 예수님이 이루신다. '기뻐하라'고 명령하신다면 '예수님은 나를 기뻐하는 인간으로 만들기를 원하시는구나'라는 생각으로 나아가는 것이 옳다. 예수님의 명령은 인간의 행함의 차원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을 방해하는 것이 우리의 옛 사람이다. 그래서 성령이 날마다 우리를 죽이며 예수님을 바라보게 하고 감사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명령에 얼마나 실천했느냐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예수님의 명령은 죽은 자에 불과한 나를 보게 하고 그러한 나를 새 생명이 있는 자로 만드신 예수님을 보게 한다. 그리고 감사하게 한다. 이것이 믿음이며 이 믿음으로 사는 것이 곧 행함인 것이다.
  • 기타로달릴까 2009.12.30 13:45
    복음이 지금처럼 기쁘게 느껴진적이 없었습니다.
    신약의 명령법에 대해서 이제사 알게 되네요..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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