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8.16 21:03

언약을 따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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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2,13일에 거제도에 위치한 영북교회에서 강의한 교재입니다.
약 4시간 강의한 내용이어서 언약의 중심 부분만 다루었습니다.


언약을 따라서

신윤식 목사

성경을 어떤 시각으로 보고 해석해야 하는가는 기독교의 존재성과 연결된 매우 중요한 문제다. 성경에 대한 잘못된 시각과 해석으로 인해 기독교로서의 본질이 무너지고 여느 종교와 다를 바 없는 종교의 수준으로 전락되는 것이 현재의 기독교가 당면한 심각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성경 해석은 크게 하나님 중심의 해석과 사람 중심의 해석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무엇이 바른 해석인가?’라고 물으면 당연히 ‘하나님 중심의 성경해석’이라고 답할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하나님 중심의 성경 해석’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간과한 채. 자신의 성경 해석을 정당화하기 위해 ‘하나님 중심의 성경해석’을 강조하는 수준에 있는 것이다.

고후 5:15절에 보면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 말한다.

십자가는 인간의 존재 가치를 무너뜨린다. 자신의 존재 가치를 향상시키기 위해 사는 인간을 십자가라는 은혜의 세계에 속하게 함으로써 인간 존재의 무가치함을 드러내고 십자가만이 가장 가치 있는 것임을 알게 한다.

그러므로 십자가에서 드러난 은혜의 세계에 눈을 뜬 성도는 자신의 존재 가치를 추구하지 않게 되고, 오히려 그리스도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새롭게 된 자신의 존재성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고후 5:17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라 말한다.

그러므로 하나님 중심의 성경해석으로부터는 인간을 위한 말이 나올 수 없다. 오히려 끊임없이 자기 존재를 추구하는 것이 곧 죄라는 사실을 폭로하며 인간은 십자가에 피 흘려죽으신 그리스도의 은혜를 높임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되기 위해 존재하고 있음을 선포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 중심의 성경해석에서는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하나님이 언급될 수 없다.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은 인간을 위해 일하시고 존재하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중심의 성경해석을 강조하는 현대 교회가 하나님을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신으로 가르치고 있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 중심의 성경 해석이 아니라 사람 중심의 성경해석을 하고 있다는 증거다.

하나님 중심의 성경 해석은 인간을 죄인으로 규정하고 시작한다. 인간을 죄인으로 규정하는 성경해석에 의해서 자기 유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로 성취된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고 그 사랑 안에서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자랑하고 높이는 것을 자신에게 부여된 삶의 의미로 보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도인은 오직 십자가의 은혜만을 증거 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십자가의 은혜를 남기기 위해 일하시고 이것이 하나님의 언약이며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것을 증거 한다.

언약적 시각에서의 성경해석

하나님 중심의 성경 해석은 성경을 언약적 시각으로 이해했을 때 가능하다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언약이라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계시하셨고 하나님의 행하심 또한 언약을 중심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언약을 배제한 성경해석은 하나님의 행하심이 아니라 인간의 행함이 중점이 될 수밖에 없고 자연히 하나님 중심이 아닌 인간 중심의 해석으로 나타나게 된다.

언약을 배제한 상태에서도 하나님의 행하심에 초점을 둔 성경 해석이 얼마든지 가능하지 않는가?라는 의문이 있을 수 있다. 물론 신자가 믿음의 의미를 안다면 인간의 행함보다 하나님의 행하심에 관심을 집중할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이 왜 이렇게 행하시는가?’의 문제에서는 답을 찾지 못하게 된다. 이것이 언약을 알아야 하는 이유고 언약의 시각에서 성경을 해석해야 하는 당위성이라 할 수 있다.

가령 에덴동산에 사탄이 존재하는 이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있게 하신 이유, 인간이 선악과 먹는 것을 두고 보신 이유,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유 등등의 문제를 언약의 시각으로 보지 않고는 하나님의 행하심에 의문이 갖지 않을 수 없다.

가장 먼저 에덴동산에 사탄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인간이 죄를 범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구원 받아야 할 필요 없이 에덴동산에서 계속 생명을 누리면 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인간의 구원을 위해 예수님을 보내시고 십자가에 죽게 하신 것이라면 굳이 십자가라는 방식이 아니라 처음부터 사탄을 제거한 상태에서 에덴동산을 만들면 되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 자체가 성경을 인간중심의 시각에서 이해하고자 함으로 인해 나타나는 현상이다.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그러한 생각을 갖게 된다는 것이 곧 인간이 얼마나 자기중심적 존재인가를 보여주는 것인데, 그것이 죄라는 사실이 언약 사상에 의해서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언약의 시각에서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은 신자가 하나님의 뜻을 알고 바른 믿음의 길을 가기 위해 필수적인 요구라고 할 수 있다.

언약으로 일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인간에게 언약을 세우시고 언약으로 일하신다. ‘하나님의 백성이 누구인가?’에 대해서도 언약에 의해 증거 된다. 때문에 언약 밖에서의 인간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백성다움’은 인간에게 있는 종교적 습성에 의한 주관적 생각이라고 하는 것이 옳다. 세상이 선과 의로움으로 인정하는 윤리와 도덕을 바탕으로 ‘하나님의 백성다움’, 즉 신자다움을 나름대로 구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언약을 원칙으로 세워 자기 백성을 찾으신다.  

렘 11:3-4절에 “그들에게 이르기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이 언약의 말을 따르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니라 이 언약은 내가 너희 조상들을 쇠풀무 애굽 땅에서 이끌어내던 날에 그들에게 명령한 것이라 곧 내가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순종하고 나의 모든 명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는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라”고 말한다.

저주의 기준은 언약이다. 누구든 언약을 지키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 이스라엘이라 해도 예외가 아니다. 이스라엘이란 민족성이 그들을 저주로부터 지켜주는 의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언약 밖에 있는 것이 저주이고 언약 안에 있는 것이 생명이 된다. 이스라엘은 생명이 되는 언약이 무엇인가를 증거 하기 위한 도구로 존재하게 된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이스라엘을 언약의 나라라 한다.

이 언약의 의미는 현대 교회에 그대로 적용된다. 교회가 세상의 종교 단체와 다른 이유가 언약과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즉 언약 안에 있는 것이 교회이며 교회는 하나님의 언약을 세상에 증거 해야 할 도구로 존재하는 것이다. 십자가 역시 언약 안에서 해석될 때 복음이 되는 것이지 언약 밖에서 해석하는 십자가는 그저 인간의 구원을 위한 도구로 존재할 뿐이다. 이것이 교회가 종교의 수준으로 전락되는 이유라 할 수 있다.

출 19:5-6절에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고 말씀한다.

세계는 모두 하나님께 속해있다. 하나님께 속했다는 것은 생명에 속했다는 뜻이 아니라 세상 만물과 모든 피조물, 심지어 천사와 사탄까지도 하나님의 권세 아래 있다는 뜻이다. 이처럼 하나님께 속한 세계 중에서 하나님의 소유가 된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들에게만 영생이 주어진다.

따라서 하나님이 언약의 방식으로 일하시는 것은 인간의 행함과 무관하게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서 하나님의 백성 된 자들에게만 영생이 돌아가게 하기 위함이다. 이것이 언약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의 뜻이고 목적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어쨌든 언약의 목적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에게 영생을 주기 위함이라면 그것은 곧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겠다는 의미가 된다. 그렇다면 굳이 언약의 방식이 아니라 해도 택한 자기 백성에게만 영생을 주면 되지 않는가? 이러한 의문은 결국 성경의 처음으로 되돌아가게 한다. 자기 백성에게 영생을 주고 구원하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인간이 사탄의 유혹에 빠져 선악과를 먹는 것을 왜 방치하셨느냐는 것이다.

엡 1:4-6절을 보면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선택은 창세전에 세워진 계획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여 사랑 안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예정이다. 하나님의 예정은 하나님의 거저 주신 은혜를 아는 백성 되게 하는 것이고 그로 인해서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는 은혜를 아는 백성의 창조를 위해 죄 아래 두신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런데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는 하나님의 백성은 인간의 뜻과 의지와 열심에 의해 스스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새롭게 창조된다. 이것이 언약이다. 그러므로 언약 백성의 특징은 자신의 행함과 공로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것이다.

그리고 죄인 된 자신을 거룩하고 흠 없는 백성 되게 한 십자가만을 높이고 자랑하게 된다. 이것이 언약을 세우고 언약의 방식으로 일하시는 이유다. 때문에 언약이 아니고서는 인간을 죄 아래 두신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는 것이다.

에덴과 마귀

성경에는 언약 사건이 다양하게 등장한다. 언약 사건은 다양하지만 언약이 다양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언약이 다양한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을 계시하며 하나님이 행하신 구속사역을 증거 하는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주지해야 할 사실은 언약은 하나님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인간을 위한 언약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언약의 시각으로 접근하는 것은 성경해석에 있어서도 중요한 문제가 된다. 하나님을 위한 언약의 시각으로 접근했을 때 하나님 중심의 성경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위한 언약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구속 사역 또한 인간이 아닌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는 의미가 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아들을 보내시고 십자가에 죽게 하신 모든 일들이 인간이 아닌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는 뜻이다. 이 말에 의구심이 들 수 있겠지만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인간을 위한 구원에 초점을 맞추게 되면 성경 해석은 창세기의 시작부터 막힐 수밖에 없다.

골 1:16절에서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라고 말한다.  

인간을 위한 구원이라면 하나님의 창조 역시 인간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만물이 그리스도를 위해 창조되었다고 말한다. 그리스도를 위한 창조이기 때문에 인간이 거주했던 에덴동산 역시 인간을 위한 최상의 조건으로 창조되어야 할 이유가 없다. 에덴에서의 뱀, 곧 마귀의 등장이 에덴동산이 인간을 위한 최상의 조건이 아니었음을 말해준다.

계 12:7-9절을 보면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과 더불어 싸울새 용
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그들이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 그가 땅으로 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그와 함께 내쫓기니라”고 말한다.

에덴에서 인간을 유혹했던 뱀은 하늘의 전쟁에서 패하여 땅으로 내어 쫓긴 마귀다. 하늘에서의 전쟁은 하나님의 창조 전에 있었던 사건으로 보는 것이 옳다. 창조 후에 있었던 사건이라면 에덴동산의 처음 상태는 마귀가 존재하지 않았지만 나중에 존재하게 되었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창조가 인간을 위해서라는 논리가 가능해진다. ‘처음에는 인간을 위한 완벽한 상태에의 에덴동산이었지만 나중에 마귀가 존재하게 됨으로 완벽한 상태가 깨어졌다’고 하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논리는 창세전의 하나님의 선택, 예정과 충돌 된다. 하나님은 이미 창세전에 그리스도로 인한 택한 백성의 구원을 예정하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창조 후에 마귀가 존재하게 된 것으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창세전의 선택, 예정과는 부딪힐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구원 방식은 선택과 예정이다. 하나님의 구원 방식이 선택과 예정이라는 것은, 구원에는 인간의 공로와 의가 개입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인간의 행함 자체가 구원과 무관하다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의 공로와 의가 개입될 수 없는, 오직 하나님의 뜻과 실행에 의해서만 완성되는 구원을 말하는 것이 선택과 예정이며 그 목적은 선택과 예정에 의해 구원된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기 위해서다.

영광의 찬송의 내용은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엡 1:7)이다. 죄 사함으로 증거된 은혜의 풍성함이 찬송의 내용이기에 세상은 죄로 시작될 수밖에 없다. 죄가 존재해야 죄 사함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위해 땅으로 내어 쫓긴 마귀가 존재하는 상태에서 창조 하신 것이고, 인간이 마귀의 유혹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일에 실패하는 것을 허용하신다.

성경의 시작인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창 1:1-2)는 말씀에서 이 같은 하나님의 뜻을 엿볼 수 있다. 세상이 혼돈, 공허, 흑암으로 시작하고 창조된 세계라 해도 혼돈, 공허, 흑암의 상태는 변함이 없다. 이유는 마귀의 존재 때문이다.



그렇게 보면 선악과는 혼돈, 공허, 흑암의 내막을 드러내기 위한 장치라 할 수 있다. 혼돈, 공허, 흑암의 내막은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 3:4-5)는 마귀의 유혹에서 드러난다.

마귀의 유혹은 현재의 존재보다 나은 신적 존재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과 같이 되어’라는 말은 인간으로 하여금 현재의 존재에 대한 결핍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신적 존재라는 우월성에 눈을 뜨게 한다. 결국 마귀의 유혹에 따라 선악과를 먹은 것은 우월적 존재가 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의 시작이고, 그것이 곧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내막인 것이다.

이제 선악과를 먹은 죄의 실체는 우월적 존재가 되는 것에 목적을 두는 것으로 드러난다. 하나님이 주신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는 결핍을 느끼며 스스로의 힘으로 결핍을 보충하고자 하는 길로 가는 것이다. 이것이 죄의 실체이고 죽음의 상태이며 마귀에게 장악된 세상의 현실이다.

우월적 존재가 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은 교회에서도 예외 없이 드러난다. 종교적이고 윤리적인 행함을 내세워 우월한 믿음을 보이고자 하는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세상에 아들을 보내어 십자가 사건이 있게 하신 것은 죽음에서 자기 백성을 구출하기 위해 아들을 희생하신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찬송하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계획이다. 이처럼 인간의 구원은 하나님의 영광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위한 구원인 것이고, 이것을 언약으로 나타내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위한 언약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찬송하는 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되어졌음을 믿는 믿음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이 믿음이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모든 것을 부인하게 한다. 그러므로 믿음은 인간을 우월의 자리로 끌어가는 것이 아니라 낮아지신 예수님의 자리로 끌어간다.

낮아지신 예수님의 자리에서 자신이 장악되어 있던 죄의 실상을 보게 되면서 예수님이 피 흘리신 십자가의 내막을 알게 되고 모든 것을 예수님의 공로로 돌리게 된다. 이것을 위해 성령을 보내신 것이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자신의 본래의 자리임을 알게 된 인간이 자신을 구출하신 하나님의 은혜만을 높이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이라 할 수 있는 하나님의 나라다.

하나님의 저주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 3:14-19)

선악과 사건 이후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와 뱀, 그리고 세상을 저주하신다. 그로 인해 세상은 저주 아래 있게 된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세상은 사라지고 죄의 속성만 있는 저주의 세상이 된 것이다. 저주에 속한 세상의 결국은 심판이다. 이것을 보여준 사건이 노아 시대의 홍수 심판이다.

홍수 심판으로 세상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저주에서 벗어날 수 없음이 드러난다.
하나님의 저주로 인해서 여자는 수고하고 자식을 낳는 고통 아래 있게 된다. 물론 자식을 낳는 고통 자체가 하나님의 저주는 아니다. 아담이 평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고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게 하신 것도 노동을 선악과를 먹은 죄에 대한 징벌의 차원에서 내려진 저주라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의 저주는 저주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말한 것처럼 죄에 대한 징벌의 의미가 아니란 것이다. 여자에게 임신하는 고통을 더하게 하시고 수고하고 자식을 낳게 하셨다고 하지만 여자가 아이를 낳으면서 그것을 하나님의 저주로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기독교인은 오히려 아이를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 여기며 감사하고 기뻐한다. 해산의 고통은 있지만 그 고통 뒤에는 오히려 기쁨으로 다가오는 것이 현실이다.

아담 또한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는다는 것이 저주의 내용이지만, 이 역시 일을 해서 돈을 벌고 먹을 것을 먹으면서 그것을 죄로 인한 저주의 고통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오히려 땀을 흘리며 열심히 일할수록 소득이 많아질 것이고 그로 인해 세상의 것을 더욱 많이 누리면서 즐거워 할 것을 생각해 보면 노동 자체가 죄에 대한 징벌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

뱀에 대한 저주도 다르지 않다. 배로 다니고 흙을 먹는다는 것이 뱀에 대한 저주이지만 무엇보다 뱀은 흙을 먹지 않는다. 그럼에도 흙을 먹는다는 것이 저주의 내용으로 주어진 것은, 하나님의 저주를 문자의 의미가 아닌 다른 시각에서 다른 의미로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알게 한다.  

여자가 고통 가운데 아이를 낳는 것은 여자의 해산 자체가 죄의 권세 아래 있다는 증거가 된다. 남자와 여자의 후손은 죄의 권세 아래 태어난 존재일 뿐이다. 죽은 자에게서 죽은 자가 태어나는 것이다. 또한 사람이 땀을 흘려 먹을 것을 먹으면서도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모습을 통해 세상이 죄 아래 있음을 보여주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저주는 세상이 죄 아래 있음을 선포한다. 그리고 스스로의 힘으로는 저주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무능을 알게 하시며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출하기 위해 보내신 여자의 후손을 고대하게 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저주에는 세상에 구원자로 오실 후손을 고대하게 함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지시기 위한 은총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저주 속의 약속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 3:15)
저주 아래 있게 된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은 여자의 후손에 대한 것이다. 여자의 후손이 등장하여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신다는 약속이다. 아담은 하나님의 약속이 곧 생명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되어 여자의 이름을 하와(산 자의 어머니 창 3:20)라 부른다.

여기서 ‘모든 산 자’는 아담처럼 하나님의 약속으로 인해 여자의 후손이 생명이 됨을 알고 그 후손을 소망하고 기다리는 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결국 저주 아래 있는 세상에서 복은 여자의 후손일 수밖에 없다. 여자의 후손이 등장하는 것만이 저주에서 벗어날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여자의 후손이 등장하여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는 약속의 성취가 복이 이루어지는 사건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복에 참여하는 것은, 자신이 죄의 세력에 장악되어 저주 아래 있음을 알고 자신을 죄의 세력으로부터 자유하게 할 여자의 후손을 믿고 기다리는 것이다. 이들이 바로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에 의해 부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다.

  하나님의 복에 참여하는 일이 선택과 예정의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인간의 행함과 공로를 배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의 행함과 공로를 자랑하는 것은 자기 우월을 드러내는 것이고, 그것이 죄의 속성이기에 하나님의 복의 나라는 그 속성을 거부한다는 것을 선택과 예정이라는 방식으로 자기 백성을 있게 하시고 구원하심으로 보여주신 것이다.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한다면 여자의 후손은 큰 능력을 가진 영웅의 모습으로 등장할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려면 힘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선악과를 먹은 인간의 가치기준이다. 하지만 여자의 후손은 강한 힘의 영웅이 아니라 힘없는 약자로 등장한다. 힘없이 붙들려 죽음으로 메시아를 기다린 모든 사람들에게 실망감을 안겨주는 모습으로 오신 것이다.

그러므로 여자의 후손에 대한 약속 이후의 약속들은 여자의 후손이 어떤 존재인지를 조금씩 드러내는 기능으로 주어진다. 언약을 따라감으로 해서 여자의 후손이 어떤 존재인가를 알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입장에서 이해하자면, 하나님이 약속하신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가를 언약을 통해서 알아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언약을 통해서 드러나는 여자의 후손, 메시아와 다르다면 그것은 예수라는 이름만 차용한 다른 예수라는 사실이 밝혀지는 것이 된다.

노아언약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창 6:5)라고 말씀하는 것이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선언이다. 사람이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하다는 것은 사람으로부터는 선한 생각과 계획이 나올 수 없다는 뜻이다. 이것을 세상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세상은 세상 나름대로 선을 행하고 선하게 살기 위해 힘쓰기 때문이다. 그것이 인간 사회의 질서를 위해 스스로 구축한 윤리와 도덕이다. 윤리와 도덕을 선한 것으로 간주하고 윤리와 도덕의 시각에서 생각하기 때문에 얼마든지 선을 행할 수 있는 인간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죄로 규정하시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이 기준이 된다. 하나님 중심이 아닌 인간 중심의 생각과 계획이 죄다. 그러므로 아담과 하와의 후손인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본질적으로 마음으로 생각한 계획은 모두 악할 뿐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인간을 물로 심판하신다. 그런데 심판 이후의 인간이라고 해서 심판의 이전에 비해 나아지지 않는다. 심판 이후도 여전히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악하다. 그렇다면 홍수 심판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인간이 홍수 심판을 통과해도 달라지지 않는다면, 심판이 또 다시 반복되어야 하는가? 홍수 심판으로 드러나는 것은 어느 시대에 존재하는 인간이건 아담과 하와의 후손은 저주 아래 있는 자로서 심판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심판이 반복되고 또 반복 되도 ‘하나님 너무합니다’라고 항변할 수 없다. 악한 존재에게 심판은 당연한 하나님이 조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창조는 심판을 위한 창조가 된다. 심판하기 위해 창조하신 것이라면 성경은 홍수 심판으로 막을 내리면 된다. 반복되는 심판 이야기만 있으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심판과 함께 언약이 등장한다. “노아가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번제로 제단에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아니하리니”(창 8:20-21)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않으신다는 것이 하나님의 일방적인 계획이다. 하지만 인간의 악에 대해서는 전혀 묻지 않으시고 무작정 저주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노아가 정결한 짐승과 정결한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해 드린 번제의 향기를 받으시고 저주하지 않으시겠다고 하신 것이다. 이것을 보면 저주를 이기는 힘은 정결한 제물의 희생의 피에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한 아들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내가 내 언약을 너희와 너희 후손과 너희와 함께 한 모든 생물 곧 너희와 함께 한 새와 가축과 땅의 모든 생물에게 세우리니 방주에서 나온 모든 것 곧 땅의 모든 짐승에게니라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멸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창 9:8-11)

노아에게 세운 하나님의 언약은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언약의 증거로 무지개를 보이신다. 노아 언약으로 인해서 세상은 언약에 의해 보호 받게 된다. 심판이 당연하지만 언약에 의해 보존되는 것이다. 이처럼 언약 아래 있음으로 생명이 보전되는 것을 잊지 말라는 취지로 무지개를 보이신 것이다.

하나님이 언약을 세우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언약의 말씀대로 행하실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하나님은 인간의 악함과 상관없이 세상을 심판하지 않으신다. 언약을 세우시고 언약대로 행하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심판을 받지 않고 존재하고 있는 것은 언약 덕분이고, 그런 의미에서 언약은 하나님의 은혜로 드러난다. 언약이 곧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에게서 저주가 당연한 악의 실상을 보게 된 신자라면, 자신이 존재할 가치와 이유가 없음을 알게 될 것이고 그럼에도 존재한다는 것은 존재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것임을 알게 된다. 이처럼 언약을 은혜로 보게 된 신자가 언약 안에서 하게 되는 것은 은혜의 자랑 밖에 없다.

사 54:8-10절을 보면 “내가 넘치는 진노로 내 얼굴을 네게서 잠시 가렸으나 영원한 자비로 너를 긍휼히 여기리라 네 구속자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 이는 내게 노아의 홍수와 같도다 내가 다시는 노아의 홍수로 땅 위에 범람하지 못하게 하리라 맹세한 것 같이 내가 네게 노하지 아니하며 너를 책망하지 아니하기로 맹세하였노니 산들이 떠나며 언덕들은 옮겨질지라도 나의 자비는 네게서 떠나지 아니하며 나의 화평의 언약은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너를 긍휼히 여기시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고 말한다.

홍수로 멸하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맹세는 인간을 의식하신 것이 아니다. 때문에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인간의 죄의 여부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자비는 이스라엘에게서 떠나지 아니하며 화평의 언약은 흔들리지 않는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의 확고함을 언약을 통해서 가르치고자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임을 말해준다. 저주 아래 있는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확고한 하나님의 사랑에 붙들려 있다는 그것이 구원의 길이다. 그리고 그 사랑은 아들의 십자가로 성취된다.

아브라함 언약

창세기 12장, 15장, 17장에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신 이야기가 있다. 먼저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하나님이 보여줄 땅으로 가라고 하신다. 그리고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창 12:2-3)는 언약을 세우신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롯과 함께 하란을 떠난다. 그리고 15장에서는 자식이 없다며 종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삼겠다는 아브라함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시고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 15:4-5)고 언약하신다.

그리고 17:2절을 보면 또 다시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 하시니”라고 언약하신다. 이 같은 아브라함 언약에서 의문이 드는 것은 왜 동일한 내용의 언약이 반복되어 등장하느냐는 것이다.

언약은 하나님이 세우시고 하나님이 이루신다. 만약 아브라함이 이루어야 할 언약이라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언약을 잊지 말고 이룰 것을 촉구하는 의미에서 반복해서 언약을 강조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이 이루시는 언약이라면 반복해서 말씀하는 것은 불필요하다는 생각이 들 수 있다. 하지만 언약이 반복되어 등장하는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아브라함을 아는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말한다. 마태복음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족보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마 1:1)라고 시작되는 것만 봐도 아브라함이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 즉 믿음의 세계를 말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고,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믿음에 대해 말할 때도 아브라함을 얘기한 것을 보면 아브라함은 ‘믿음이 무엇인가?’를 말해주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아브라함을 알면 믿음을 알 수 있다’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아브라함의 생애 자체가 믿음에 대한 증거가 되는 것이다.

주의해야 할 것은 아브라함을 처음부터 믿음의 사람으로 규정하고 시작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아버지는 데라며 데라는 우상을 섬겼다. 이것을 수 24:2절에서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옛적에 너희의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버지, 나홀의 아버지 데라가 강 저쪽에 거주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라고 말한다.

우상을 섬기는 가정에서 아브라함만 하나님을 믿었는지 아니면 아브라함도 우상을 섬겼는지는 명확히 설명될 수 없지만 어쨌든 아브라함이 아버지의 집을 떠나 하나님이 보여줄 땅으로 가라는 말씀을 따라 갔다는 것을 생각하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알고 있었다는 추측도 가능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아버지의 집을 떠났다고 하여 그때부터 아브라함의 믿음이 대단했을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언약이 반복되는 이유다.

12장에서 아브라함은 큰 민족을 이루고 복을 주어 이름을 창대하게 하겠다는 언약을 받는다. 그리고 15:1절에서 아브라함에게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고 말씀한다. 이것은 언약을 이루실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라는 뜻이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창 15:2)라고 하면서 자신에게는 자식이 없다고 말한다. 자식이 없는데 큰 민족을 이루고 이름을 창대하게 하겠다는 말씀이 무슨 소용이냐는 의미다. 이것을 보면 아브라함은 언약을 세우신 하나님이 언약을 이루신다는 것을 믿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다시 아브라함에게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을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결국 언약이 반복되는 것은 아브라함이 언약을 믿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언약을 세우신 하나님은 제물을 가져와 쪼개라 하시고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가게 하신다. 횃불이 고기 사이로 지나간다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될 수 없는 일이다. 이 점을 생각하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언약의 주체자가 하나님이시며 아브라함이 할 일은 언약을 믿는 것임을 보이고자 하시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창 16장에서 아브라함은 사라의 권유대로 하갈과 동침하여 이스마엘을 낳는다. 자녀가 없다면 하나님의 언약 또한 의미 없다는 것을 생각하고 자녀라도 자신의 힘으로 얻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다시 17장에서 더 구체적으로 언약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렇게 언약이 반복되는 사이에는 언약을 믿지 못하는 아브라함의 불신이 있다. 따라서 언약이 반복되는 것에서 아브라함의 믿음 없음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창 17:1절을 보면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말한다.

인간의 행함에 완전은 없다. 완전한 행함은 전혀 흠 없는 완벽한 행함이라는 뜻인데 하나님 앞에서 완전한 행함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은 단연코 없다. 그런데 왜 아브라함에게는 행하여 완전하라는 요구를 하시는가?

완전한 행함은 하나님의 언약을 믿는 것이다. 언약하신 하나님이 언약을 이루실 것을 믿는 그 믿음이 우리를 하나님의 언약 안에 붙들어 놓는다.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는 그가 곧 구원 받은 자임을 생각하면 언약을 믿는 것이야 말로 완전한 행함이 아닐 수 없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언약을 믿는 믿음 외에 다른 행함을 요구하신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언약을 믿는 믿음조차 인간의 힘으로 가능하지 않다. 애초부터 인간은 하나님의 언약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힘과 실천을 믿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인간을 하나님이 간섭하시고 가르치심으로 참된 믿음을 알게 하시고 믿음 가운데 있게 하신다는 것을 아브라함 언약이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이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고 말씀한 후에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하시는 이유다.

즉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언약을 믿는 자 되게 하는 것으로 증거 된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가운데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으로 말미암은 결과다. 결론적으로 믿음에 있어서 우리의 힘은 개입될 수 없다.

창 17:5절에서 하나님은 아브람이란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바꾸신다. 그리고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고 하신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열국의 아버지가 되게 하시겠다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아브라함이란 이름은 아브라함 본인에게는 명예스러운 이름은 아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이란 이름에는 언약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지 못한 불신의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다시 아브라함에게 할례 언약을 세우시고 할례를 언약의 표징으로 말씀하신다(창 17:9-11). 할례는 남자의 생식기를 잘라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인간의 육체로는 자손이 생산될 수 없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언약하신 민족의 번성은 인간의 육체로 인한 종족 번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으로 발생한 새로운 민족의 번성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할례는 불신앙의 흔적이다. 이스마엘을 낳아 자기의 힘으로 언약을 이루려고 했던 아브라함의 불신앙을 할례로 몸에 새기게 하여 언약은 하나님의 뜻과 의지로 이루어짐을 잊지 않게 하고자 한 것이다. 결국 할례는 아브라함을 부끄럽게 만드는 것이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아브라함의 자손이 인간의 육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이것을 유대인들은 하나님 백성이 되는 증표로 오해한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의 아들로 이삭을 주신다. 사라가 아이를 잉태할 수 없는 몸이었을 때 아들을 주심으로 아브라함과 사라의 육체로 낳은 아들이 아닌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 주신 아들인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전능하심이며 육체가 아닌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는 것이 할례의 의미다.

신 10:16절을 보면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고 하고, 신 30:6절에서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라고 말한다.  

마음의 할례는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모두 잘려진 것을 의미한다. 기독교인에게는 일의 원인과 가능성을 자신에게서 찾고자 하는 유혹이 있다. 자신의 행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때문에 자신이 행하지 않으면 믿음이 실패할 것 같은 불안감에 빠지기도 한다. 이것은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것은 여호와가 행하신 모든 일을 받아들이고 기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삭을 제물로 바치게 한 것은 이삭처럼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 존재하게 된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위해 대신 제물이 될 양을 하나님이 준비하실 것을 계시하는 것이다. 이삭이 지고 간 장작에 이삭이 불살라져야 했는데 하나님이 준비한 양이 대신 불살라진 것은 그 양이 이삭과 연합하여 이삭 대신 희생하게 된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보면 이것은 장차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 번성하게 되는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위해 하나님이 제물이 될 양을 준비하시고 대신 희생할 것을 계시하는 사건이라고 하겠다.

아브라함의 언약은 이삭과 야곱으로 이어지면서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나라가 어떤 자손들로 채워지는가를 보여주신다. 이삭과 야곱에게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 자기 백성을 어떻게 만들어 가시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신자는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보면서 믿음은 결코 인간에 의해 가능한 것이 아님을 배우는 것이고 하나님이 행하신 일로 인해 기뻐하고 감사하게 된다. 우리 자신을 생각하면 구원 받을 수 없는 모습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언약대로 이루신다. 그 언약의 성취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나타난 것이다. 이 모든 일을 두고 하나님의 전능하심이라고 말한다.

모세언약

모세언약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우신 언약과 연결된 내용이다.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고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더라”(출 2:24-25)고 말씀하는 것처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우신 언약을 기억하심으로 시작되는 것이 모세 언약이다.

즉 모세 언약은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출 11:1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이제 한 가지 재앙을 바로와 애굽에 내린 후에야 그가 너희를 여기서 내보내리라 그가 너희를 내보낼 때에는 여기서 반드시 다 쫓아내리니”라고 말한다.

애굽의 바로는 아홉 가지의 재앙을 겪었으면서도 이스라엘 내보내기를 거절한다. 재앙으로 인해 고통을 겪을 때는 죄를 지었으니 용서해 달라고 하면서 모세의 말대로 이스라엘을 보내줄 것처럼 하다가 재앙이 멈추면 또 다시 본래의 완악함을 드러내며 보내지 않기를 반복한다.

바로가 이스라엘을 보내는 것을 거부하는 것은 자기의 이익과 자존심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이스라엘의 노동력은 애굽에 많은 도움이 된다. 그리고 나름대로 자기의 신을 섬기고 있는 바로가 이스라엘 민족의 신인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는 모세의 말만 듣고 이스라엘을 보낼 리가 만무한 것이다. 바로는 이러한 속성을 재앙을 겪으면서 드러낸 것이다.

따라서 재앙은 단지 애굽을 고통스럽게 해서  이스라엘을 보내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바로의 속성이 드러나게 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주지할 것은 완악한 바로의 속성이 드러남으로 해서 이스라엘 또한 바로와 다르지 않음을 나타내고자 한 것이 재앙에 담긴 의미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한 가지 재앙을 내린 후에야 너희를 여기서 내 보낼 것이라고 말씀한다. 한 가지 재앙은 열 재앙 중에서 마지막 재앙을 말한다. 그런데 ‘마지막 재앙’또는 ‘열 번째 재앙’이라고 하지 않고 ‘한 가지 재앙’이라고 말씀하신 것에 초점을 둘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아홉 가지의 재앙과 열 번째 재앙을 서로 구분하고 계시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아홉 가지 재앙으로 바로의 속성이 드러난다. 그리고 바로의 속성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열 번째 재앙으로 보이시는 것이다. 만약 애굽에 내려진 재앙의 목적이 단지 이스라엘의 출애굽이라면 번거롭게 열 재앙을 내릴 이유가 없다. 처음부터 견딜 수 없는 강력한 재앙을 내려서 애굽을 굴복시키면 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애굽에 내린 재앙은 단지 출애굽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순종하는 척 하다가도 또 다시 자기 유익을 따라 흘러가는 바로와 같은 완악한 인간의 속성을 보게 하시고 그런 속성에 대한 인간에 대한 심판을 선언하시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바로의 속성으로부터 이스라엘도 자유로울 수 없다.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바로의 속성이 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이 죽음에 해당된다는 것을 보이는 것이 한 가지 재앙, 즉 장자 죽음인 것이다.

하나님은 애굽 땅에 모든 처음 난 것을 치신다. 처음 난 것은 모든 것을 대표하는 대표성을 지닌다. 따라서 처음 난 것을 치신다는 것은 애굽의 모든 것을 치신다는 뜻이 된다. 이것을 통해서 바로의 완악한 속성으로 존재하는 애굽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이 증거 된 것이다.

이스라엘도 바로와 다르지 않기 때문에 그들 역시 장자의 죽음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리고 장자의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주시는데 그것이 어린 양의 피를 집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는 것이다(출 12:7). 하나님이 애굽 땅을 칠 때 어린양의 피가 표적이 되어 그 피를 봄으로써 재앙이 내려 멸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출 12:13).

장자 재앙은 애굽 사람과 이스라엘 사람을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피가 표적이 되어 심판의 여부가 결정된다. 이스라엘 사람이라 할지라도 어린양의 피의 표적이 없다면 심판에서 벗어날 수 없다. 결국 이스라엘이 애굽의 심판에서 벗어나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을 향해 갈 수 있게 된 것은 어린양의 피로 말미암아 실현된 것이다.

어린양의 피는 하나님의 낮아지심, 즉 희생을 의미한다. 이것을 하나님의 구속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희생으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신다는 하나님의 뜻과 의지가 어린양의 피로 증거 된 것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어린양의 피, 하나님의 희생으로 살아난 존재를 뜻하는 것이고, 누구든 어린양의 피의 은혜를 망각한다면 그는 이스라엘이라 할 수 없게 된다. 이것을 이스라엘에게 남겨두기 위해 세워진 것이 유월절이다. 즉 유월절은 ‘너희는 무엇으로 존재하는가?’를 묻는 것이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시내광야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이 모세를 산으로 부르시고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출 19:5-6)고 말씀한다.

하나님이 말씀을 모세에게 전해들은 이스라엘 백성은 일제히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우리가 다 행하리이다”라고 응답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다시 모세를 산으로 부르시고 십계명과 함께 그들이 지켜야 할 율례를 선포한다. 하나님의 율례를 이스라엘에게 전하자 이스라엘은 또 다시 한 소리로 응답하여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출 24:3)고 말한다.

모세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준행하겠다는 백성들의 응답을 들은 후에 산 아래에 제단을 쌓고 이스라엘 열 두 지파대로 열두 기둥을 세운 후에 이스라엘 자손의 청년들을 보내어 여호와께 소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게 한다.

그리고 모세는 피를 가지고 반은 여러 양푼에 담고 반은 제단에 뿌리고 언약서를 가져다가 백성에게 낭독하여 듣게 하니 그들은 또 다시 반복해서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고 응답한다(출 24:4-7). 백성들의 응답의 말을 들은 모세는 그 피를 가지고 백성에게 뿌리며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출 24:8)고 선포한다.

이렇게 언약에 체결된 후에 모세와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칠십 인이 올라가서 하나님을 뵙게 되는데 하나님은 그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셨고 그들은 하나님을 뵙고 먹고 마셨다고 말한다(출 24:10-11). 하나님을 뵙고도 죽지 않고 함께 먹고 마신 이것이 언약의 피의 은혜이며, 피의 은혜로 누리는 혜택인 것이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아직 언약의 피에 담긴 의미를 모른다. 즉 하나님의 희생이 자신들을 살린다는 것을 언약의 피를 보면서도 모르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모두 준행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준행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그들에게 십계명과 율례를 주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게 해서 구원하고자 하시는 것이 아니라 준행할 수 없는 인간의 무능력과 함께 죄를 보게 하고자 함이다. 이것이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언약으로 다가오신다. 이것은 이스라엘을 언약으로 구원하시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언약이 하나님의 구원의 방식이라는 것이다. 이 말은 하나님이 세우신 언약은 인간의 어떤 불의와 행위에도 불구하고 취소되지 않고 반드시 성취된다는 뜻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언약 외의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구원은 없으며 인간의 어떤 행위도 개입될 수 없는 것이다.

출 24:8절의 언약의 피는 제물의 피이며 반은 제단에 뿌려지고 반은 백성에게 뿌려진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구원은 그들이 말씀을 준행함으로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제단에서 피 흘려 죽은 제물의 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즉 언약의 피가 백성의 구원을 책임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언약의 피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알아야 하는 것은 자신들이 말씀을 실천함으로 성취되는 구원은 없다는 사실이다. 그것을 위해 율법이 주어졌다.

언약의 피는 성막과 제사 제도의 내용으로 존재하게 된다. 제사에서 흘려지는 제물의 피는 하나님의 희생을 계시하며, 하나님이 대신 희생하심으로 자기 백성의 모든 죄를 덮으시는 긍휼하심과 자비하심을 증거 하는 것이다. 따라서 율법을 지킨다는 것은 제물의 피로 증거 되는 하나님의 희생을 믿으며, 그 희생 앞에서 자신의 불의함을 깨닫고 그 모든 것을 용서하신 긍휼과 자비하심에 감사하는 것이기에 모세 언약에서 율법과 복음은 결코 충돌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을 지켜 행하라고 하는 것은 실천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자신의 희생으로 모든 죄를 용서하신 그 사랑과 은혜를 믿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믿지 않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처럼 ‘준행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기에 누구든 자신의 행함을 내세우고 자랑하는 것은 불신앙이라고 결론 내릴 수 있다.

출 19:6절의 제사장 나라는 제사장이 통로가 되어 하나님과의 만남이 성사되는 나라라는 뜻이다. 즉 인간의 행함으로는 하나님과의 만남이 성사될 수 없는 것이다. 영원한 제사장으로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다. 따라서 우리에게 하나님과의 만남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 성사된 것이다. 이것이 언약의 피의 성취다.

언약의 피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가 되는 것이고 언약의 피를 믿는 자가 하나님께 거룩히 여김을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제사장 나라는 언약의 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세계인 것이다.

다윗 언약

다윗 언약은 모세 언약에서 나타난 언약의 피, 즉 희생 제물로 인한 구원 방식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다윗의 왕권이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다윗 가문으로 계승되는 왕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윗 자손이라는 언약으로 오시는 참된 왕을 의미한다. 따라서 다윗도 이스라엘의 참된 왕이 아니라는 뜻이 된다. 그럼에도 다윗을 택하여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운 것은 다윗 자손으로 오실 참된 왕이 어떤 왕으로 오시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다.

왕은 이스라엘의 요구사항이었다. 이스라엘의 모든 장로가 모여 라마에 있는 사무엘에게 나아가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모든 나라와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삼상 8:5)라고 요구한 것이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함께 하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영웅 같은 왕을 세워 자신들의 생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 것이다.

삼상 12:6-7절에 “사무엘이 백성에게 이르되 모세와 아론을 세우시며 너희 조상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이는 여호와이시니 그런즉 가만히 서 있으라 여호와께서 너희와 너희 조상들에게 행하신 모든 공의로운 일에 대하여 내가 여호와 앞에서 너희와 담론하리라”고 말한다.

이스라엘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이는 모세와 아론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자신들을 인도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믿으면 되는데 사람을 봄으로써 늙은 사무엘 대신 이방나라와 같이 자신들을 책임질 왕을 요구한 것이다.    

사무엘은 왕을 구한 이스라엘 백성이 밀을 베는 때에 여호와께서 우레와 비를 보내사 왕을 구한 죄악이 크다는 것을 알게 하겠다고 하고, 이스라엘 백성은 사무엘에게 “당신의 종들을 위하여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우리가 죽지 않게 하소서 우리가 우리의 모든 죄에 왕을 구하는 악을 더하였나이다”(삼상 12:19)라며 자신들의 죄를 인정한다. 하나님이 보낸 우레와 비로 인해서 밀을 추수하지 못하게 되자 생존을 위해 왕을 구한 것이 여호와 앞에 죄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이것으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생존 문제가 아니라 죄 문제를 위해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삼상 12:20-25절을 보면 “사무엘이 백성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가 과연 이 모든 악을 행하였으나 여호와를 따르는 데에서 돌아서지 말고 오직 너희의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섬기라 돌아서서 유익하게도 못하며 구원하지도 못하는 헛된 것을 따르지 말라 그들은 헛되니라 여호와께서는 너희를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것을 기뻐하셨으므로 여호와께서는 그의 크신 이름을 위해서라도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실 것이요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고 선하고 의로운 길을 너희에게 가르칠 것인즉 너희는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행하신 그 큰 일을 생각하여 오직 그를 경외하며 너희의 마음을 다하여 진실히 섬기라 만일 너희가 여전히 악을 행하면 너희와 너희 왕이 다 멸망하리라”고 말한다.

이스라엘이 구하는 왕은 그들을 유익하게도 못하며 구원하지도 못하는 헛된 것이다. 이스라엘에게 왕이 없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것을 기뻐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라도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신다. 이스라엘이 믿어야 할 것은 바로 이것이다.

죄 문제는 제사장으로 해결되고 죄 문제가 해결된다면 그것으로 이스라엘은 부족할 것이 없기 때문에 왕을 구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구한 왕의 다스림을 받으면서 왕을 구한 죄가 깊다는 것을 깨달으며 자신들에게 제사장이 존재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아야 한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길로 가지 못한다.

이러한 이스라엘 안에서 다윗언약은 인간의 죄를 더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왕이 된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고 그의 남편 우리아를 비열한 방법으로 죽인 것이다. 다윗은 나단선지자로 인해서 죄를 철저히 깨닫게 되면서 인간이 드리는 제사 제도가 이스라엘을 구원으로 인도하지 못한다는 것이 드러난다.

시 51:16,17 “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상한 심령은 자신의 죄를 깊이 절감하면서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이 제물을 잡아 드리는 제사의 완성이며 그것이 곧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택한 다윗을 통해서 증거 되는 것이다.

다윗언약은 인간의 노력과 정성과 열심에 의한 제사를 거부한다. 하나님이 구하시는 참된 제사는 구원 받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는 백성을 버리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보며 상한 심령이 되어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찾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다윗 언약은 모세 언약의 완성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의 죄를 알게 되고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가 상한 심령이라는 것을 알게 된 다윗은 항상 하나님의 은총만을 바랄 것이다. 은총이 아니면 살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다윗이 백성을 어떤 정신으로 다스릴지는 짐작할 수 있다. 백성에게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하심을 보여주며 자기의 죄를 알고 용서의 은총을 구하는 자로 나오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다윗 왕국이다.

그리고 이 왕국은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이루어진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우리의 왕으로 오셔서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하심을 보여주시는 참된 왕의 모습을 보여주신 것이다. 이것이 다윗언약이다.

하나님의 왕 되심이 모세언약에서는 자기희생으로 증거 되고, 다윗 언약에서는 긍휼과 용서의 은총으로 증거 된다. 긍휼과 용서의 은총을 보여준 그가 진정한 왕이시고 그 사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확증된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 세상에서의 자기 존재 확대를 위해 자신이 의지할 것을 구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왕 되심을 거부하는 것이다.

새 언약

언약은 크게 옛 언약과 새 언약으로 나뉘어진다. 옛 언약은 구약의 언약을 의미하고 새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이루어진 신약을 의미한다. 그러면 새 언약만 있으면 될 것 같은데 굳이 옛 언약이 있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인간으로는 안된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다.

하나님의 언약 아래서 드러난 이스라엘의 실체는 실패밖에 없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망하고 포로 되는 것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포로 된 이스라엘을 다시 돌아오게 하시는 것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질 구원을 알 수 있는 것이고 그것으로 새 언약의 의미를 알 수 있다.

겔 16:59절을 보면 “나 주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네가 맹세를 멸시하여 언약을 배반하였은즉 내가 네 행한 대로 네게 행하리라”고 말한다. 이 말대로 이스라엘은 언약을 배반했다. 그 결과 예루살렘이 무너지고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오게 된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들을 다시 돌아오게 한다 해서 그들이 언약을 배반하지 않고 지키는 백성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본질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들을 돌아오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목표하는 것이 이스라엘을 변화하게 해서 언약을 잘 지키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겔 16:60절에 “그러나 내가 너의 어렸을 때에 너와 세운 언약을 기억하고 너와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라”고 말한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계획하신 것은 영원한 언약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영원한 언약이라는 것은 언약에 대한 이스라엘의 태도와 상관없이 하나님이 언약을 이루시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위해서 영원한 언약의 본질은 용서가 필수적일 수밖에 없다. 이처럼 용서가 본질로 자리하는 것이 새 언약이다. 따라서 새 언약은 새로운 언약이 아니라 옛 언약을 주시면서 이미 계획하신 것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렘 31:31-33절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는 말씀으로 확인할 수 있다.

새 언약은 하나님의 법이 이스라엘 속에 자리하는 것이다. 그것으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 이스라엘 두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법은 용서다. 이 법이 그리스도로 성취된 것이다.

그러므로 새 언약 앞에서 우리가 이루어야 할 것은 없다. 이룰 수 있지만 이룰 필요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무엇 하나 이룰 수 없는 무능한 존재라는 것이다. 이것을 알았기에 예수님이 흘리신 피의 은혜만으로 감사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예수님의 희생인 피로 인한 용서가 하나님이 법으로 자리한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되는 것이다.

새 언약 아래 있는 신자는 하나님이 언약을 이루심으로 구원 받았음을 증거 하게 된다. 이것이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세우신 계획이고 택한 백성에게 새 영과 새 마음을 주심으로 완고한 마음을 부드럽게 하시고 하나님의 이루심과 용서를 증거 하는 방향으로 가게 되는 것이다.

눅 22:19-20절에 “또 떡을 가져 감사 기도 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고 말씀한다.

예수님의 피가 새 언약이다. 예수님의 피가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고 죄 없는 자로 여김 받게 하시며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셔서 우리가 알게 되고 보게 된 것을 증거 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높이고 자랑하는 그가 새 언약으로 살아가는 신자인 것이다.

히 8:6-8절에 “그러나 이제 그는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그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시라 저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라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려니와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여 말씀하시되 주께서 이르시되 볼지어다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과 더불어 새 언약을 맺으리라”고 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좋은 약속, 더 좋은 언약으로 세우셨다. 그것이 새 언약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말하며 자기의 죄를 알고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는 자로 나올 것을 요구하는 새 언약이 더 좋은 언약인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은 새 언약을 더 좋은 언약으로 여기지 않는다. 십자가를 말하면서도 자기에게 좋은 길을 찾아간다. 하나님이 주신 좋은 것이 왜 좋은지를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 좋은 대로 산다. 복음도 자기 마음에 좋아야 좋은 것으로 받아들인다.

새 언약을 더 좋은 언약으로 말씀하는 것은 새 언약 안에서만 생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새 언약 밖에서는 언약에 실패하는 인간상으로 끝난다. 실패가 있고 죄만 있을 뿐 생명이 되는 길이 없다. 그것이 새 언약 밖의 현실이다. 하지만 새 언약 안에는 그리스도의 피가 길이 되어 우리를 생명으로 끌어간다. 그래서 신자는 예수님의 피로 감사하는 것만 있게 된다.

히 8:12절의 “내가 그들의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그들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는 이 말씀이 새 언약의 세계다. 신자는 새 언약의 세계 안에서 용서 받은 자로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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