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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을 싫어하는 인간은 없다. 모든 사람은 복을 추구하면서 끊임없이 복을 향해서 행진한다. 복을 받는데 걸림돌이 되는 행동이라고 생각되면 스스로 삼가면서 복이 되는 쪽으로 움직이고자 한다. ‘다리를 떨면 복나간다’, ‘여자가 집안에서 큰 소리치면 복나간다’, ‘착한 마음을 가지면 복받는다’, ‘선을 쌓으면 복받는다’ 등등 수없이 많은 복에 대한 규례를 세워가지고 복이 되지 않는 행동은 삼가도록 하고 복이 되는 쪽으로 움직이도록 가르쳐왔던 것이다. 실로 복을 향한 인간의 집념은 눈물겹다고까지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그만큼 인간의 죄가 깊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모습이다.


복을 포기하지 못하는 인간, 이것은 자기를 포기하지 못하는 인간의 죄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이렇듯 복에 대한 열심은 종교인이건 비종교인이건 다를 바가 없다. 각기 자기 나름대로 방법을 취하면서 복을 구한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복을 구하는 방법이 종교인이건 비종교인이건, 또는 서로 다른 종교라 할지라도 차이가 없다는 점이다. ‘착한 마음을 가지고 양심대로 살고 선을 쌓으면 복이 온다’ 이 말에 누가 반대를 하겠는가? 비종교인도 이 말에 반박을 하지 않는다. 또 서로 다른 종교를 가진 자들도 이 말에 반대를 하지 않는다. 예배당 꼭대기에 십자가를 걸어놓고 ‘우리는 기독교다’라고 외치는 자들도 이 말에 반대를 않는다.


이것만이 아니다. 종교인은 자신들의 종교행위를 모두 복과 연관지어서 행동한다. 즉 복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서 종교행위를 가지는 것이다. 이것은 불교든 유교든 천주교든 기독교든, 또는 이단이든 사이비든 가릴 것 없이 동일하다. 비록 서로 가지는 종교로서의 의식의 모습은 다르지만 그 목적은 같다. 자기들의 신을 잘 공경하고 섬김으로서 그 대가로 복을 받아 내 소원을 이루어 보자는 것이다.


그래서 종교에는 신을 공경하고 섬기는 의식이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의식에 참여할때는 몸만 나와서는 안된다. 섬기는 자로서의 정성을 보이기 위해서 뭔가 가지고 나와야 한다. 돈이다. 인간쪽에서 정성을 보여야 신이 움직인다는 것이다. 즉 ‘지성이면 감천이다’는 것이다. 사단의 소리다. 인간은 옛날부터 이 사단의 소리에 속아서 살아왔고 지금도 속아서 살아간다.


소위 교회라고 일컫는 집단들을 보자. 무엇을 위해서 모이는가? 무엇 때문에 하나님을 부르고 있는가? 복이다. 복을 위해서 교회라는 곳을 찾아들고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부르고 있다. 복을 위해서 돈을 바치고, 복을 위해서 자신의 노동력도 바친다. 복만 주어진다면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하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마음을 목사들이 너무나 잘알고 있다. 그래서 복을 상품화한다. 인간이 원하는 것을 제공함으로써 사람들을 끌어 모아보겠다는 것이다.


도대체 하나님은 안중에도 없다. 하나님은 단지 인간의 욕망을 달성하기 위해서 끌어다 이용하는 것에 불과하다. 하나님이 목적이 아니라 자기가 목적이다. 자기를 위해서 하나님을 부른다. 그러면서도 교회라고 고집한다. 하나님을 부르고, 예배드리고, 기도하고, 예수님을 믿고 있다는 것 때문이다.


참으로 웃기는 일이다. 인간이 만든 건물 위에 십자가 하나 세워놓고, 종교 의식 행하고, 믿는다는 말 몇마디 한다고 해서 교회되어지는 것인가? 예수님은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라’(마 7:21)고 하셨다. 천국에 들어가는 자는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이다(마 7:21).


교회란 인간 스스로가 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다. 때문에 진짜 그리스도를 아는 교회는 하나님 편에 서서 인간이 무엇인가를 아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자기에게 관심을 두지 않고 하나님께만 관심을 두고 모이는 사람들이 교회이다. 자기들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찾아서 그 뜻대로 행하기를 즐거워 하는 자들이다. 그런데 온통 자기사랑으로 똘똘 뭉쳐진 인간들이 사그라지지 않는 욕망을 채우려고 발버둥치면서 하나님을 부르고 있는 집단을 어떻게 교회라고 할 수 있는가?


이와 같이 복을 얻기 위한 수단만 같은 것이 아니다. 복의 내용도 전혀 다를 바가 없다. 모든 인간이 같은 복을 얻기 위해서 제각기 다른 신을 찾는 것이다. 인간이 원하는 복은 무엇인가? 재물의 복, 건강의 복, 자식의 복, 출세의 복, 명예의 복, 마음 평안의 복 등이다.


절을 찾는 사람들이 부처 앞에서 두손 모아 비는 것이 무엇인가? 수많은 사람들이 갓바위(필자 주 : 대구 팔공산에 위치한 소위 영험이 있다는 갓을 쓴 형태의 돌부처로서 전국적으로 유명함)를 찾아가서 비는 것이 무엇인가? 조상 앞에 제사를 드리면서 무엇을 비는가? 신을 받았다고 하는 무당들이 작두위에서 춤을 추고 굿을 하면서 비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예배당에서 기도하는 자들이 비는 것은 무엇인가? 다 같다. 똑같은 목적을 가지고 각기 자기의 신을 찾아서 기도하는 것이다. ‘누가누가 복을 많이 주나’라는 경쟁을 하는 것 같다.


도대체 구별이 없다. 구별이라면 고작 신의 이름이 다르고, 종교 의식의 형태가 다를 뿐이다. 그외 신을 찾는 목적이나 추구하는 내용은 전혀 다르지 않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믿는 하나님만 참된 신이다’라고 우긴다. 참으로 웃지 않을 수 없다.


세상 것이 복이라면, 그리고 하나님만이 참된 신이시라면 하나님을 믿는 자외에는 복을 받지 말아야 한다. 교회 다니는 사람 외에는 다 가난해야 하고, 좋은 대학은 기독교인 자녀만 들어가야 하고, 출세도 성공도 교회다닌 사람만의 몫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세상에는 부처에게 절하는 사람도, 아무 종교도 가지지 않은 사람도 얼마든지 잘사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그렇다면 그들은 과연 누가 복을 주어서 잘사는 것인가?


복은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들에게만 주어진다. 아무나 다 누릴 수 있다면 그것은 복이 아니다. 때문에 세상의 누구에게서든지 찾아볼 수 있는 것을 복이라고 할 수 없다.


교회는 무엇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참된 복인가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참된 복을 가르쳐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교회이다. 그런데 교회가 생명으로서의 복을 변질시켜 버렸다. 영생의 복만으로는 사람들을 끌어 모을 수가 없다고 판단하고, 사람들을 자극할 수 있고 즐겁게 할 수 있는 복으로 만들기 위해서 스스로 이것 저것 첨가해서 맛을 내려고 한다. 이것이 십자가와 원수된 교회이다.


이제 우린 성경의 복으로 돌아가야 한다. 하나님이 계시하시고 약속하신 복의 자리에서 예수님으로만 기뻐해야 한다. 복은 우리의 소원을 이루어주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복이 우리에게 다가오신 것이다. 그러면 과연 무엇이 복인가? 세상에서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참된 복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


성경에서 ‘복’이라는 말은 창 1:22절에 처음 등장한다. 하나님께서 물에서 살 수 있는 모든 생물과 물고기를 만드시고, 또 궁창에 날아 다니는 날개 있는 새를 만드시고 나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어 가라사대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다 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고 하신다. 그리고 사람을 만드시고 나서 역시 같은 말을 하신다. 그런데 사람에게는 정복과 다스림이 추가되어 있다.


이 말을 보면 복은 곧 생육, 번성, 충만, 정복, 다스림 등으로 이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린 이 단어 자체만 보면 결국 세상에서 번성되는 것, 즉 양적으로 점점 채워져 가는 것을 복으로 이해하기 쉽다. 그러나 복이 주어졌을때의 세상의 상태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복이 주어졌을때의 세상의 상태는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세상, 즉 하나님의 뜻과 일치되고 하나님이 만족하시는 상태가 곧 복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모습은 말씀으로 창조되었기에 말씀대로 존재하는 것이다. 이것을 복이라고 말한다. 생육, 번성, 충만 이 모든 것도 말씀으로 창조된 자로서 말씀에만 순종하라는 것을 말한다. 즉 양적인 팽창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상태의 유지를 말하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상태로서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려야 했다. 정복과 다스림을 위해서 인간이 특별히 해야 할 일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상태로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할 일이었다. 말씀에만 순종하면 되었던 것이다.


창 2:3절에 보면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고 하신다. 복은 거룩과 안식으로 이어진다. 안식은 인간의 안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안식을 말한다. 즉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의 모든 만물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상태로 있을 때 그것이 곧 복이고, 거룩이고, 하나님의 안식의 조건이 된다.


결국 복이란, 지금 많은 사람이 생각하듯 양적인 팽창도 아니고 자신의 소원풀이도 아니다. 복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상태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만족하실 수 있는 상태안에 있으면 그것이 복안에 있는 것이다. 이것을 가리켜서 창조 질서라고 한다.


그런데 이 질서가 깨어진다. 인간이 하나님이 같이 될 수 있다는 사단의 소리에 마음을 두고 자기 확대에 소망을 가지게 되었을 때 선악과는 말씀에 순종해야 할 피조물로서의 인간을 깨닫게 해주는 선악과가 아니라 자기 확대에 파묻힌 인간의 꿈을 이루어 줄 수 있는 보기좋은 선악과로 비춰지게 된 것이다.


인간은 이제 자기 확대에 대한 욕망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게 된다. 자기의 욕망에 도움이 될만한 것은 모두 선한 것으로,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악한 것으로 판단하면서 살아가게 된다. 선악체계에서 살게 된 것이다. 때문에 이들에게는 세상이 선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자신의 욕망을 이루어줄 만한 모든 것이 세상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재물이든 명예든 권력이든 모든 것이 세상에 있다. 그것들만 자기 손에 있으면 세상에 자기의 이름을 내면서 자기를 높이며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범죄로 창조 질서가 무너졌다. 다시금 창조 전의 무질서와 혼돈의 상태로 되돌아간 것이다. 말씀에 순종하는 세계가 아니라 자기 마음대로, 자기를 위해서 살아가는 무질서의 세계가 되었다. 여기에 하나님의 약속이 등장한다. 여자의 후손에 대한 약속이다(창 3:15). 무질서를 극복하고 하나님이 안식하실 수 있는 질서의 세계를 남기시겠다는 것이다. 즉 인간이 자기 확대를 앞세우고 자기가 자신의 왕이 되어서 살아가는 사단의 사고방식으로 충만한 세상에 그것을 와해해 버리고 다시금 질서를 회복하시겠다는 약속이다.


여자의 후손은 무질서를 극복하는 힘으로 등장하다. 그러나 그 힘은 세상이 생각하는 그런 힘이 아니다. 약자를 누르고 강자로서 세상에 군림하는 힘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세상의 힘에 의해서 눌림당하고 희생당하는 힘이다. 힘을 모으기 위해서 애쓰고, 모아진 힘을 자랑하고, 그 힘으로 약자를 지배하는 쾌감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사단의 사고방식과는 정반대의 모습이다.


때문에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를 통해서 보여주시는 여자의 후손의 모습은 모두 희생으로 일관되게 나타난다. 가인에게 희생당한 아벨, 노아 홍수후에 정결한 짐승을 잡아서 제사를 드림으로서 정결한 것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심판에서의 생존을 보여주는 구원의 의미, 이삭이 제물되는 것을 통해서 보여주시는 여자의 후손의 모습, 야곱을 낮추시기 위해서  직접 찾아오신 하나님의 희생, 야곱의 집을 살리는 요셉의 희생, 그리고 어린양의 희생으로 인해서 장자의 죽음에서 건짐받은 이스라엘, 이렇게 여자의 후손의 모습은 이 땅에 그 실체를 점점 나타내었고 나중에는 십자가의 희생으로 완성된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그 어디에도 자기의 이름을 내고, 힘을 군림하는 모습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만약 그런 모습으로 등장한다면 그것은 모두 사단의 모습일 뿐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이름을 내고자 하는 것을 참지 못하신다. 그것을 말해주는 것이 바벨탐 사건이다. 인간은 모여서 힘을 자랑하고자 했다. 하나님은 그들을 흩어버리신다. 힘을 인정하지 않는 하나님이시다. 때문에 세상이 복으로 생각하는 모든 것은 결코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으시고 마지막때 다 사라져 버릴 헛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교회의 부흥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외치지만 그것도 역시 인간의 헛된 야망이요 바벨탑이다. 자기 이름을 내고 힘을 모으기 위한 발버둥에 지나지 않는다. 교회 부흥은 사단의 소리요 멸망의 소리이다. 하나님은 교회를 부흥시켜라는 명령을 하신 적이 없다. 성경 어디에서도 힘을 모으라고 하신 적이 없다. 힘을 주신다는 약속도 하신 적이 없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힘이라면 희생이다. 희생이 심판의 세상에서 살아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다. 세상은 이제 누가 힘에 의해서 희생당하는가를 주시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여자의 후손이고 복으로 오신 분이기 때문이다.


출 20:24절에 보면 “내게 토단을 쌓고 그 위에 너의 양과 염소로 너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 내가 무릇 내 이름을 기념하는 곳에서 네게 강림하여 복을 주리라”고 하신다. 복은 하나님의 이름을 기념하는 곳에서만 주어진다. 하나님의 이름을 기념하는 것은 무엇인가?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는 것이다. 이것을 희생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희생이 있는 그 곳이 여호와의 이름을 기념하는 곳이고, 하나님은 거기에만 강림하셔서 복을 주신다는 것이다.


앞서 말한대로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경우는 보시기에 좋은 상태일때이다. 힘으로 살아가는 세상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은 희생이다. 그 희생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리스도안에서 안식하시고, 죄인된 인간 또한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생명 역시 그리스도안에서만 유지될 수 있고, 질서의 회복 역시 그리스도안에서 가능하며, 복 역시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오신 것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몸만 남기시고 나머지는 모두 없애버리신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은 그리스도외에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게 되고 그리스도안에 거하게 된 이 은혜가 얼마나 감사한가? 세상에서는 찾을 수 없는 복을 이미 누리고 있는 것이다. 내가 신앙생활 잘해서 복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주님의 공로 때문에 내가 복안에 거하게 된 것이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안에서 사는 자는 자기를 자랑하지 않는다. 인간의 죄인됨과 무능력을 잘 알기 때문이다. 단지 은혜로 주어진 복에 대해서 감사하고 기뻐하며 살 뿐이다. 그리스도로 마음이 부요한 자로 살아간다. 그리스도로 부요하기 때문에 부족함이 없다. 세상 것이 복으로 보여지지 않는다. 이미 부요하기 때문에 또 다른 욕심이 있을리 없다. 이 상태를 가지고 복이라고 말한다.


세상것을 복으로 아는 자는 결코 만족이 있을 수 없다. 주어진 것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항상 부족을 느끼며 산다. 소유한 것이 사라지는 것을 참지 못하기 때문에 염려와 걱정이 끊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복으로 아는 자는 하나님이 살려주는 대로 살아갈 뿐이다. 살려주면 살고 죽이면 죽는다. 이것이 복의 상태이다.


이 복을 누가 이해하겠는가? 십자가를 이해하지 못한 자는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하지 못한다. 고난이 복인데 이것을 누가 인정하겠는가? 복안에 있는 자는 자기의 죄인됨을 안다. 감히 은혜 받기에도 부족한 자임을 알기에 고난속에서도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자신은 그리스도의 공로로 존재하고 있는 자임을 잘 알기에 자신의 손에 있는 것을 자기의 소유로 여기지도 않고 그것을 힘으로 내세우지도 않는다.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약자로 살아간다. 세상의 있는 자들 때문에 시기하지도 않고 그것 때문에 마음 상해하지도 않는다. 자신의 인생은 하나님의 계획과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임을 잘 알기에 주어진 환경과 형편에 감사하며 그것을 최선의 은혜로 여기며 살아간다. 이런 자들이 자기를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겠는가?


복이란 그리스도를 말한다. 그리스도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이미 복을 받아 누리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복으로 여기지 않기 때문에 자꾸 썩어질 것을 구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보이지 않고 세상이 보이기 때문이다. 세상을 목적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곧 멸망의 자리임을 잊지 말자. 땅의 것은 우리의 힘이 아니다. 세상을 힘으로 삼지 말고 그리스도만을 힘으로 삼자. 예수님이 말씀하신 팔복에는 세상의 것은 존재하지 않음을 잊지 말자. 그리스도로 만족하며 그리스도로 부요하고 그리스도로 인한 고난도 마다하지 않는자, 그자가 복안에 거하는 자이다. 이것이 우리가 사모해야 할 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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