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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형상에 대하여

1. 서론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인간으로부터 출발하느냐 아니면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하느냐는 문제는 참으로 중요하다. 왜냐하면 인간으로부터 출발한 성경해석은 인간의 가치를 향상시키는 방향으로 해석되어질 수밖에 없고,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하는 성경해석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존중되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인간으로부터 출발한 성경해석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대해서도 인간의 가치를 포기하지 않으려고 한다. 즉 인간을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이루기 위해 필수적인 존재로 여기며, 이를 위해서 하나님은 인간의 가치를 향상시키기 위해서 일하신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과 계획을 세우시고 이를 이루시기 위해 인간을 창조하셨는데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서 이 일에 위기가 닥치게 되었고, 따라서 하나님은 자신의 일을 이루시기 위해서 인간의 가치를 회복시키는 일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그리스도의 오심은 인간의 가치를 회복시키시기 위한 것일 수밖에 없으며 결국 인간을 위한 그리스로 전락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인간 회복을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전락될 수밖에 없는 위험에 처하게 된다.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논의에서 더욱 크게 부각된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이 타락함으로 형상을 상실하게 되고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상실된 형상에 대한 회복 작업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형상이 회복되어짐으로 하나님을 하는 인간으로 존재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의들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은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인간을 결코 포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처럼 인간을 중심으로 신학을 전개한다면 결국 신학의 주도권은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증거하는 것에 있을 수밖에 없다. 이로 인해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은 인간 구원을 위한 것으로 전락될 수밖에 없고 결국 하나님이든 그리스도든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신으로, 그리고 신의 행동 역시 인간의 뜻을 돕기 위한 것으로 시작될 것이다.


이처럼 인간 가치를 포기하지 않는 성경 전개는 모든 것을 인간 구원 확보에 역점을 두게 된다. 하나님에 대한 열심이든, 기도든, 찬양이든 모든 것은 구원 확보를 위한 자기 행동일 뿐이다. 따라서 인간에 대한 긍정적인 모든 요소를 배제하는 해석으로 나아갈 때 비로소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바른 접근을 시도해 볼 수 있는 것이다.



2. 본론

인간을 신학적인 개념에서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형상’이란 개념에서 그 열쇠를 찾으려고 한다. 물론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개념이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창세기 1:26-27절의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의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시고”라는 말씀대로 인간 창조에 하나님의 형상이 개입되어 있는 것으로 인해 인간의 본질을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개념으로 시작해서 이해하려는 시도는 전형적인 신학 전통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의 개념에서 연구된 인간론은 참으로 다양하다.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각기 다른 관점에서 보기 때문에 서로 상이한 출발점으로 인한 다양한 답변들을 내리기 때문이다.


창세기 1:26절을 보면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라는 구절로 번역되어 있다. 이 번역으로 인해서 많은 학자들이 형상과 모양을 분리해서 생각하기도 한다. 즉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모양이 각기 다른 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즉 형상은 하나님의 외적인 면을, 모양은 하나님의 내적인 면을 말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형상’과 ‘모양’은 히브리 원문에는 ‘따라’라는 용어가 없이 ‘우리의 형상, 우리의 모양대로’로 등장한다. 그런데 70인역에서 접속사 ‘와’가 삽입되기에 이르렀고, 결국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모양’을 서로 분리하여 해석하는 오류를 낳게 된 것이다.


이처럼 형상과 모양의 구분은 자연히 인간을 두 가지의 구조 또는 본질을 가진 존재로 해석하게 하였고, 이것은 결국 희랍적인 이해와 결합되어 인간을 이원론적인 구조를 지닌 존재로 해석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히브리어 원문을 그대로 이해하자면 ‘형상’과 ‘모양’에 대한 차이가 없다고 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즉 형상과 모양은 서로 같은 의미로 쓰여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대로 형상과 모양에 차이점을 두는 신학자들은 형상을 ‘밖을 향하여 대리하는 면’으로, 모양을 ‘안을 향한 반사의 면’으로 이해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전통적인 견해들은 어떤 것이 있는가?

먼저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의 내면적인 자질에서 찾는 견해가 있다. 유대교의 고대 전통도 여기에 해당된다고 말할 수 있는데, 그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의 영혼에서 찾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의 내면에서 찾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영혼이야말로 하나님처럼 비육체적이고 파괴될 수 없고 죽을 수 없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신의 복제로 보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형상은 신처럼 비육체적이어야 하며 죽음과도 상관이 없는 것이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것을 기준으로 해서 살펴볼 때 이에 합당한 것은 인간의 영혼이라는 결론을 내리는 것이다. 결국 이들은 영혼의 불멸성을 주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의 내면에서 찾는 자들에게 있어서 전통적인 것은 하나님의 현상을 자연적인 것과 초자연적인 것으로 구분하는 것이다. 인간의 내면에 있는 자연적인 하나님의 형상이란 인간의 합리적이고 자연스러운 성품, 즉 인간의 합리성과 이성을 말하고,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으로 말한다. 그리고 인간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이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서 상실되고 구속의 과정에서 이것이 다시 회복된다고 말한다. 이렇게 볼 때 이들은 인간의 영혼에 하나님의 형상이 자리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반면에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의 외형에서 찾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견해는 창세기 5:3절의 “아담이 일백삼십세에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라는 구절을 근거로 하여 시작된다. 이 구절을 근거로 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하나님과 같은 외모 외형으로 이해한 것이다. 이들은 정신적인 면을 완전히 배제한 것은 아니었지만 첫 인간의 모양과 외모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보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의 내면이나 외면에서 찾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의 특정 부분에서 접목시키는 문제가 발생한다. 이것은 인간 구조에 대한 차별을 가져올 뿐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이성에 둔다면 이성적인 사람일수록 하나님의 형상을 더 많이 지닌 사람이 될 수밖에 없고, 영혼에 형상을 둔다면 인간의 육신은 비하되고 멸시될 수밖에 없다.


이처럼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의 내면과 외면으로 구분하여 이해하는 견해가 옳지 못하다고 주장하는 학자들 가운데는 인격적인 만남 가운데서 그때마다 실현되는 하나님의 관계를 내세워 형상에 대한 견해를 피력하기도 한다.


이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 존재와 구조, 그리고 자질과 능력 등 인간론적으로 시도하기를 거절한다. 그리고 이들은 창세기 2:27절의 구절을 근거로 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존재의 만남의 기능속에서 찾으려고 한다. 즉 이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남자와 여자가 창조되어 서로 너와 나의 관계로 존재하게 된 것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남자와 여자의 관계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들은 남자와 여자가 서로 만나고 돕는 관계로 존재하게 된 것을, 하나님이 인간에게 오셔서 관계를 맺으시고 도우시는 것과 대비해서 보는 것이다. 즉 인간이 서로 교제하고 돕는 관계를 맺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을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서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태어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즉 상대방에 대해 책임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이 곧 하나님의 형상을 지녔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론적인 현상은 인간의 내면이나 외면에 있는 그 어떤 것도 아니기 때문에 인간이 타락했다고 해서 함께 상실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몰론 이들은 형상을 단순히 남자와 여자의 관계에서 서로 책임적인 존재, 또는 인간관계로만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신 것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찾고자한 것이다.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신 것에 하나님과 인간의 사귐이 비밀이 계시되어 있다는 것이다. 신부, 즉 여자로 비유되는 교회에 대한 신랑, 즉 남자로 비유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헌신 안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열심과 나아가서 남자와 여자의 혼인적 관계가 완성된다는 것이다.


반면에 비록 형상을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성 안에서 이해하려고는 하지만 남자와 여자의 관계에서 이해하기보다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경외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반응으로 이해하는 견해도 있다.


그러므로 이들은 인간의 타락과 함께 형상도 상실된 것으로 말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타락과 함께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사랑과 순종 역시 상실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말씀하고 인간이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는 것 역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라 여긴다. 모든 피조물 중에서 오직 인간만이 하나님을 알고 의식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 존재할 수 있다는 이유로 형상의 문제를 전적으로 관계적 견해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처럼 형상을 관계적 견해로 이해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기능적인 면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형상 자체보다는 형상의 역할, 형상의 기능, 형상의 결과, 형상의 적용 등에 초점을 맞춘 견해로서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경험하는 것이 하나님의 형상 문제와 연관이 있을 수 있다 하더라도, 관계 자체가 하나님의 형상이라고는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형상에 대한 전통적 견해 가운데 자연에 대한 인간의 통치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찾는 견해가 있다. 이들은 형상의 문제 뒤에 언급보다는 자연에 대한 지배 명령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즉 하나님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신 것은 인간을 내세워서 자연을 통치하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견해를 내세운다.


이러한 견해는 형상에 대한 다른 견해들, 즉 인간에게 주어진 영혼, 이성, 의지는 피조물을 지배하도록 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피조물을 통치하는 것 안에서 완성되어진다고 본다. 하지만 이러한 견해 역시 하나님의 형상을 단지 기능과 역할 면에서 해석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까지 살펴본 형상에 대한 기독교의 전통적 견해들은 인간의 본질적 구성에서 이해하느냐 아니면 기능과 역할적인 면에서 이해하느냐에 따라 달라짐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들의 공통적인 문제점은 형상을 인간 중심으로 이해한다는 점이다.


즉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철저하게 배제된 채 단지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인간을 내세워서 세상에 실현하시고자 하는 일이 있음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형상에 관심을 둔 자는 결국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는 것만이 다시 본래의 인간으로 되돌아가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으로 결론을 내린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성경에 계시되어 있는 종말론적 논제를 상실한 주장이라고 말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은 결코 개인적으로는 인간으로서의 본래적 기능이나 역할 또는 은사를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을 간과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은 개인으로서는 인간일 수 없다. 단지 육체로 불리울 뿐이다. 흙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이 인간으로 여겨지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안에서 가능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형상 문제를 하나님과 관계 안에서 규정지으려는 시도를 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타락한 인간이 개인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 머무를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하나님의 형상을 이해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에 대한 긍정적인 면을 철저히 배격하는 것이다. 즉 인간의 역할을 중시하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기 위해 인간의 역할이 필요했고,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했다는 주장을 하게 된다면 결국 인간은 하나님의 일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될 존재로 부각될 수밖에 없고, 결국 인간이 없으면 하나님 일은 성취되지 않는다는 결론까지 가능해지는 것이다.


인간 창조는 창조의 마지막 사역이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결단과 함께 시작한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에 대한 창조를 말씀으로 하셨다. 그리고 말씀대로 성취됨으로써 세상이 존재한다. 그러나 인간을 창조하실 때는 말씀이 먼저가 아니라 하나님의 결단이 먼저다.


창 1:26절의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라는 구절이 그것을 말해준다. 분명 말씀이 선행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형상, 모양대로 인간을 만들자는 결단이 선행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기 요구이다. 그리고 그 요구에 스스로 행동하신다.


이처럼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의 결단과 의지로부터 시작하여 이해해야 한다. 그럴 때 우리가 물어야 하는 것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질 수가 있는가?’가 아니라 ‘무엇이 하나님의 형상이며,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뜻은 무엇인가?’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스스로 가지고자 하는 발상은 인간 스스로 거룩의 차원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욕망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은 이러한 욕망을 철저히 죄악으로 선언하고 있다.


그러므로 무엇이 하나님의 형상인가?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뜻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으로 시작하는 것은, 인간 스스로 형상에 결론을 내리기를 토기하고 오직 성경을 통해서 알아가겠다는 것이며, 내가 하나님의 형상을 소유하여 하나님의 일을 이루겠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그 뜻에 순종하겠다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형상은 무엇인가? 그리고 형상대로 창조하신 뜻은 무엇인가? 기존의 견해는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에게 주어진 것으로 결론짓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리고 인간이 타락함으로서 형상이 전적으로 상실되었다거나, 아니면 그 잔재가 일부 남아있다는 것으로 주장하기도 한다.


형상이 상실되었던 아니면 일부가 남아 있건 관계없이 이들의 목표는 형상에 대한 회복일 수밖에 없다. 형상이 회복되어짐으로 인해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맡기신 사명을 성취할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그리스도의 오심이나 십자가의 죽으심, 그리고 성령이 오셔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새롭게 하시는 일련의 일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자기 백성들을 다시 형상으로 회복시키기 위한 작업으로밖에 보여지지 않는다. 따라서 성령이 오시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형상이 회복되어졌다고 신뢰하는 자들은 이제부터 형상이 회복된 자로서 스스로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 나서게 되는 것이다.


결국 그리스도는 인간의 잃어버린 형상을 회복시키기 위한 도구일 뿐, 형상이 회복된 후는 쓸모없는 존재로 전락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형상을 회복해야 한다는 주장은 결국 반그리스도적인 결론을 이끌어 낼 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구약에 보면 형상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창세기에만 3번 등장할 뿐이다(창1:26, 3:1-3, 9:6). 그리고 구약의 그 어디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상실되었다든지 아니면 일부 잃어버렸다는 주장을 할만한 근거의 말씀이 없다. 다만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에 대해서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는 하나님의 선언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것 역시 하나님의 형상이 내포되어 있던 인간이 죄를 지음으로써 형상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흙이 되었다고 주장할 근거로 삼기에는 무리가 있을 수 있다. 왜냐하면 애당초 흙으로 지음받은 것이 인간인데 그러한 인간이 형상이 내포됨으로써 흙이란 본질을 뛰어넘은 가치있는 인간으로 존재한 것이냐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결국 형상 문제는 인간의 가치적인 문제로 나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은 인간이 죄를 지음으로서 형상이 상실되고 흙으로 전락되었다면 형상은 분명 인간의 가치문제로 논의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처음에 말한대로 인간 중심의 이해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죄로 인해서 하나님의 창조 작업에 큰 손실을 가져왔다는 논의도 가능해질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분명 창조한 인간이 죄에 대해 연약한 자임을 아셨을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죄를 극복할 수 있는 인간을 창조할 수 없었는가? 하나님의 형상은 과연 죄를 극복할 수 없었는가?


먼저 하나님의 형상이란 누구도 모방할 수 없고 흉내낼 수 없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만 창조되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은 인간 스스로 만들 수도 또 모방할 수 없는 것임을 뜻한다. 그런데 인간 스스로 형상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것부터 이미 죄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형상에 대한 문제는 창세기만을 가지고 논의할 수 없다. 왜냐하면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이 그리스도이심을 명백히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고린도후서 4:4절을 보면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 말하고, 골로새서 1:15절에서도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라고 말한다.


구약에서는 창세기 이후에 언급되지 않던 하나님의 형상 문제가 신약에 와서 갑자기 언급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대신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으로 등장시키시는 것으로 이해하면 곤란하다. 그렇게 되면 그리스도는 결국 인간의 실패로 인해서 등장한 대타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만약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라는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미리 하늘에서 의논된 이 사실에 대해서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과연 하늘에서 의논된 것에 그리스도가 배제되어 있었는가? 그리고 형상대로 창조한 인간이 실패함으로서 대신 그리스도를 개입시키는 것인가? 그렇다면 분명 하나님의 창조사역은 실패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처음부터 하나님의 형상에 그리스도가 개입되어 있었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즉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사역의 실패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형상이 곧 그리스도라는 이 일이 더욱 선명하게 부각되어지는 것으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이 곧 그리스도이심을 계시하시기 위해서 인간의 실패를 허락하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인간의 실패는 곧 하나님의 성공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죄에 대한 인간의 실패는 하나님의 책임이라고 말해야 하는가?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다운 인간은 오직 그리스도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분이 진정한 하나님의 형상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창조된 인간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존재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처음부터 아담과 하와를 인간다운 인간으로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다운 인간이신 그리스도를 증거하시기 위해서 아담과 하와를 지으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아담과 하와를 지으셨다는 것은 그들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는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고 있을 때의 그 모습에 국한되어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즉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은 어떤 모습인가를 증거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곧 하나님에 대한 그리스도의 완벽한 순종으로 인해서 성취된 것이다. 이처럼 인간은 처음부터 그리스도를 위해서 창조되어진 것이라 말할 수 있다.


로마서 8:29-30절에 보면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고 말씀한다.


이 말씀에 보면 하나님이 미리 정하신 자들에게 하시는 일은 그 아들의 형상, 즉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해서임을 알 수 있다. 이 말씀을 보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도 아니고 소유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를 본받음으로서 하나님의 형상에 참여한다고 말하는 것이 옳다. 즉 자기 백성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도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의 수고와 노력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만을 고백하는 그가 바로 하나님의 형상에 참여한 자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형상은 무엇인가? 고린도전서 15:42-43절에 보면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라고 말하고, 47-49절에 보면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재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는 말을 한다.


이 말씀을 근거로 해서 이해한다면 그리스도의 형상은 결국 영광의 부활체라고 말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아들의 형상을 본받아 산다는 것은 도덕과 윤리적인 삶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종교적인 삶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라, 오직 하늘의 것을 찾으며 사는 것을 뜻한다. 그 이유는 우리 역시 그리스도 안에서 영광 중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결론

형상의 문제는 인간이 아닌 그리스도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스스로 형상을 창조하거나 소유하고자 하는 우를 범하지 않게 된다. 형상 문제는 인간이 무엇을 위해서 존재하는가를 말해 준다. 인간은 하나님의 일을 성사시키기 위한 존재로 창조된 것이 아니라 세상의 중심이신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서 지음 받은 것이다. 그리스도를 부각시키기 위해서 인간이 사용된 것 뿐이다. 여기에 충실할 때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만 증거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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