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
2011.02.13 16:50

(성령 5강) 성령과 해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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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 8:1-2http://onlycross.net/videos/spirit/rom-080102.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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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 그러므로 이제 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설교> 

도 바울은 기독교 역사에서 그를 추월할 사람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복음과 신앙에 있어서 뛰어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그가 자신의 내면적 문제로 인해서 고민하고 깊은 탄식을 하는 내용을 롬 7장에서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이 같은 모습은 우리에게는 의외가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적어도 사도 바울 같은 인물이라면 삶과 신앙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갈등과 혼란이 없는 완벽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는 탄식을 합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바울이었다면 이 같은 탄식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을 철저히 순종하고 하고 있는 자신이야 말로 죄를 이기며 살아가는 의인이었고, 자신을 구원하는 것도 율법을 실천하는 자기 신앙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만난 바울이 죄를 알게 되었을 때, 죄는 율법으로도 해결할 수 없으며 오직 사망에 이르는 것 밖에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따라서 바울의 탄식은 인간의 한계를 절감하는 한 사람으로서의 절규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약점은 바로 이러한 탄식과 마음 깊은 절망감에서 나오는 절규가 없다는 것입니다. 죄 속에 살면서도 죄를 깨닫지도 실감하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한계를 바라보면서 나오는 아픔도, 절망도, 탄식도, 외침도 없습니다. 다만 뭔가를 잘하기 위해 노력하고 힘쓰는 것 밖에 없고, 그것으로 자신을 치장하면서 신앙 좋은 사람으로 행세 하려고 할 뿐입니다.

 

 

이 모든 것이 스스로 선을 이루기 위한 열심일 뿐인데, 문제는 그 어떤 열심으로도 죄를 극복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에게 비록 선을 향한 의지가 있다 할지라도 우리 내부에 또 하나의 세력으로 존재하는 악을 극복하며 선을 실천하고 이룰 힘이 없는 것입니다.

 

 

사도는 이러한 인간의 한계성을 자각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1,2절)

 

 

사도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 갇혀 있는 우리를 해방하였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는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된 자인데 문제는 해방된 자에게 마땅히 있어야 할 해방감, 즉 해방의 기쁨이 없다는 것입니다.

 

 

해방감은 갇혀 있는 자들이 누리는 기쁨입니다. 갇혀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 해방감은 없습니다. 따라서 만약 우리가 우리 자신을 갇혀 있는 자로 여기지를 않는다면 우리는 해방의 기쁨에 대해 이해할 수 없게 됩니다. 그리고 사도의 말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로서 함께 누리고 기뻐하게 되는 실재적인 말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단지 교리적 의미의 가르침으로만 받게 될 것입니다.

 

 

요8장에 보면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말씀합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은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하느냐”라고 반응합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죄의 종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진리로 인한 자유 또한 알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이들이 항상 율법을 실천하면서 그들이 생각하는 기준에서 완벽한 신앙의 모범생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그들이 생각하는 신앙의 기준이라는 틀 안에서 자신들을 바라봤기 때문에 죄의 종으로 살아가는 실재에 대해서는 전혀 눈치 채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것을 ‘육신의 생각’이라고 말합니다.

 

 

죄를 극복하고 죄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의 내면에서 쉬지 않고 솟아나는 죄를 보면 우리는 분명 죄의 종으로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죄는 선을 향한 우리의 의지와 열심으로는 결코 극복할 수 없는 권세를 가지고 우리를 장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율법은 죄 값인 사망을 선포합니다. 이처럼 죄와 사망에 법에 붙들려 있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그런데 현대 교회는 이러한 인간의 실상에 대해 말하기보다는 유대인들처럼 신앙의 모범생이 될 것을 요구합니다. 자신을 죄인으로만 여기는 것은 부정적 사고방식이라고 하면서 예수의 피로 죄는 모두 용서되었으니 더 이상 죄인이라는 것에 매이지 말라고 합니다. 그리고 의인으로써, 살아있는 신자답게 선을 행하며 신앙생활에 열심을 내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했다는 것도 이미 지나간 과거의 사건으로 보는 시각이 됩니다. 그리스도안에서 매일 같이 우리에게서 벗어지는 성령이 역사로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해방의 은혜는 일회적이 아닙니다. 한 번의 은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죄의 종이라는 사실이 자각될 때마다 그리스도 안에서 확인되어지는 은혜이고 감사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신자는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력을 절감하면서 자신이 곧 사망에 갇힌 자임을 실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생명의 성령의 법이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해방하였다는 선포가 기쁨의 소식이 복음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처럼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은 우리를 사망과 연결시킵니다. 하지만 성령은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시킵니다. 율법의 완성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더 이상 율법에 매이지 않고 예수님의 의의 효력 아래서 생명을 누리는 자유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성령의 법이며 이 법으로 인해 우리를 죄에서 해방된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더 이상 죄의 정죄와 상관없이 의의 사람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자신의 죄에 대해 자각하는 것이 필히 있어야 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말씀과 함께 사망에 갇힌 자기 현실을 봐야 성령의 법이 우리를 해방했다는 것을 마음으로 실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법을 모르게 되면 신자로서 뭔가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강박관념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신자 아닌 것 같고, 성경 보지 않으면 신앙이 없는 것 같은 생각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이런 사람은 뭐라도 해야 스스로에게 만족하며 안심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것이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 8:5,6)는 말씀처럼 육신을 따르는 육신의 생각입니다. 육신의 생각으로 사는 사람은 앞서 말한 대로 뭐라도 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생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결국 율법에 매인 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신자는 율법과 상관이 없는 자가 되었습니다. 성령으로 인해서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율법의 요구에 순종하여 죄를 이겨야 하고 의를 이루어야 하는 자리에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율법의 요구를 따르려고 하는 것은 율법은 사람에게 성취감을 주기 때문입니다. 완벽하든 완벽하지 않든 실천하는 것이 있으면 그만큼 더 나아진 것 같고 타인에게서도 인정받을 수 있게 됩니다.

 

 

율법은 예수님께서 성취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에게는 율법적 요구가 없습니다. 따라서 뭐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고 신자가 아닌 것 같은 생각이 든다면 성령의 법이 우리를 해방했다는 자유함을 누리는 영의 생각이 아니라 여전히 육신의 생각을 따르고 있는 것이 됩니다.

 

 

우리가 뭔가를 이루지 못해서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가 이루지 못했다는 것이 죄가 되어서 사망으로 이끌어 가는 것은 없습니다. 설사 사람이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다고 해도 그에게 죄는 여전하고 따라서 사망에 갇힌 자일 수밖에 없음을 생각한다면 스스로 뭔가 이루어야 한다는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모든 성취는 예수님이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이룬 자로 여김 받게 됩니다. 더 이상 죄의 형벌인 사망과 상관이 없이 생명 안에 거하는 해방된 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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