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
2011.05.22 17:27

(성령 18강) 들음에서 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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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10:46-52http://onlycross.net/videos/spirit/mar-104652.mp4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46 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47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48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49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 하시니 그들이 그 맹인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하매

50 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51 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52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설교>

 

신자에게 신앙경험은 아주 중요합니다. 신앙경험이 있음으로 해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도우시며 지키신다는 사실에 대해 확실성을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앙경험은 모든 신자에게 동일하고도 보편적으로 경험되어야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사람들이 대개 생각하는 신앙경험, 즉 병 고침이나 방언과 등과 같은 것은 참된 신앙경험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일단 보편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현대 사회에서 이러한 경험들은 한계성을 띄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병 고침이 있다고 해도 모든 병이 낫는 것이 아니고, 또한 모든 믿는 자가 동일하게 경험하는 것도 아니란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신자에게 있어야 할 참된 경험에 대해 생각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는 소경이 등장합니다. 이 소경이 예수님을 만나서 보지 못하던 세상을 보게 되는 기적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내용이 옛날 예수님을 만났던 소경 한 사람의 경험으로 끝난다면 소경 이야기는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게 됩니다. 그저 한 개인에게 있었던 일을 듣는, 말 그대로 이야기에 불과할 뿐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하고,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됨으로써 예수님이 우리에게 함께 하시며 우리에게 하시는 일이 무엇인가를 알게 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서 일어나는 일들, 즉 우리가 경험하는 일들을 통해서 예수님이 함께 하시고 살아서 역사하신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쉬지 않고 자기 백성을 도우시며 살피십니다. 그런데 이 같은 사실을 여러분은 실감하시고 경험하십니까? 아마 많은 분들은 예수님의 함께 하심을 경험하기보다는 예수님이 없이 자신의 힘으로 홀로 살아가는 삶으로 더 선명히 다가옴을 경험할 것입니다. 아무리 둘러보고 생각해도 예수님이 함께 하시고 역사하신다고 말할만한 경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역사하시는 예수님의 일 또한 보지 못한 결과입니다.

 

 

예수님 당시 소경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경제 활동을 할 수 없는 처지에 있었습니다. 경제 활동을 할 수 없는 사람이 생계를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은 구걸 밖에 없을 것입니다. 소경에 구걸을 하면서 살았기 때문에 그만큼 소경의 인생은 밑바닥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이러한 그에게 어느 날 ‘나사렛 예수시다’라는 외침이 들립니다. 그 외침을 들은 바디매오는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소리 지릅니다.

 

 

이것을 보면 바디매오는 예수님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다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해 전혀 모른 상태에서 그 같은 반응을 보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소리친 것은 예수님이 문둥병자 등 병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고 여러 기적을 행하신 분이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이라면 자신을 소경이라는 처지에서 구출해 줄 수 있는 분이라는 기대가 있었고, 한편으로는 그 분을 만났으면 하는 소망이 있었기 때문에 ‘나사렛 예수시다’라는 외침이 들리는 순간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소리를 지른 것이 아니겠습니까?

 

 

당시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많았습니다.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알아보고 ‘나사렛 예수시다’라고 외치는 사람이 있을 만큼 예수님은 유명 인사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지나가시는 길에 있던 모든 사람이 예수님에 대해 바디매오와 같은 반응을 보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마치 세계에서 제일가는 암전문가가 있다고 해도 모든 사람이 그를 찾아가지 않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건강한 사람에게 암전문가는 관심의 대상이 아닙니다. 뉴스에 나올 정도로 유명한 의사라고 해도 건강한 사람에게는 그저 실력 좋은 의사일 뿐입니다.

 

 

하지만 암으로 인해 시한부 인생이라는 선고를 받은 사람에게는 한 가닥 희망으로 비춰질 것입니다. 죽기 전에 저 의사에게 가서 자신의 병에 대해 진단이라고 받고 싶은 마음이 간절할 것입니다. ‘어쩌면 저 의사가 나를 살려줄 수도 있다’는 기대를 가지기도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의사가 지금 자기 동네에 왔다는 소식을 듣는다면 가만히 있겠습니까?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향해서 불쌍히 여겨달라고 소리 지릅니다. 이 말은 바디매오가 자신을 불쌍한 존재로 여겼다는 것이고, 예수님을 불쌍한 처지에 있는 자신을 구출해주실 분으로 바라봤다는 것이 됩니다. 자신이 어떤 처지에 있는 존재인가를 알고,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안 그것이 예수님을 향한 간절함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오늘날 신자가 깊이 통찰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자신의 불쌍함, 내가 얼마나 불쌍한 자로 살아가는지에 대한 깊은 통찰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바디매오와 같은 간절함과 외침으로 예수님께 나올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통찰이 부족합니다. 남보다 잘 살지 못한 것 때문에 불만으로 가득할 뿐 자신을 불쌍한 존재로 바라보지 않습니다. 불만만 가득 안고 기쁨과 감사가 상실된 채 근근이 살아가는 것 자체가 불쌍하고 비참한 인생이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주어진 것으로 감사하고 만족하며 사는 기쁨을 알지 못하고 항상 타인보다 더 많이 가지고 높은 자리에 위치하고 싶은 욕망에 붙들려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불쌍함입니다. 이 모든 것이 죄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현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인간이 처한 참된 현실을 보지 못합니다. 이것이 소경인 바디매오가 암시하는 우리의 처지입니다. 소경으로 살아가면서도 정작 자신이 소경임을 알지 못하고 본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바디매오가 소리를 지르자 많은 사람들이 ‘조용히 하라’고 꾸짖습니다. 바디매오의 마음은 오직 예수님에게로만 향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함께 있던 사람들은 바디매오의 그 같은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단지 천한 소경이 예수님을 귀찮게 한다고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불쌍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함께 하고는 있지만 예수님에 대한 간절함은 없었습니다. 그냥 예수님을 따르고 있을 뿐입니다. 몸은 예수님을 따르지만 마음은 다른데 있습니다. 그것이 당시 제자들의 형편이었습니다.

 

 

본문 앞에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는 문제로 다툰 내용이 있습니다. 이처럼 제자들의 마음은 예수님이 아니라 자신이 앉은 자리에 향해있었습니다. 이러한 제자들이 바디매오의 간절함을 이해할 리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바디매오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시자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합니다. 소경으로서 보기를 원하는 것은 당연한 소원입니다. 즉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소경 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어떤 소원이 있습니까? 예수님이 여러분께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십니까? 바디매오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라고 물으시는 것은 바디매오가 원하는 것을 이뤄 주겠다는 의미라기보다는 이미 바디매오에게 행하실 일을 결정하시고 물으시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바디매오에게 하고자 하시는 뜻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보게 하는 것입니다. 결국 보기를 원한다는 바디매오의 소원은 예수님의 하고자 하시는 일과 일치된 관계에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사정을 아십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우리의 사정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항상 예수님의 뜻에서 벗어난 채 나의 길을 가게 될 뿐입니다. 우리의 사정을 아시는 예수님께서 하늘로 가시고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우리를 도우실 보혜사 성령을 보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아시는 우리의 사정은 세상만 바라볼 뿐 하나님이 이루신 생명의 세계를 보지 못하는 소경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정을 아시는 예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이 있게 하기 위해 성령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과 함께 하는 신자는 ‘보기를 원합니다’라는 소원을 가지고 주께 나오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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