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회 수 4492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엡 4:1-4http://onlycross.net/videos/spirit/eph-040104.mp4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4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설교>


사도는 에베소 교회를 향해서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3절)는 권면을 합니다. 이 말에서 대개 생각하는 것은 사람과 사람의 하나, 즉 연합입니다. 성령께서 신자를 하나라는 관계에 있게 하셨기 때문에 신자는 서로 연합하여 마음을 합함으로써 하나 되게 하신 관계를 지키는 것이 교회로써 해야 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에게 하나라는 것이 가능할까요? 여기서 말하는 하나라는 관계는 어떤 일에 대한 연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서로 공감되는 일에 대해서는 의견의 일치를 이루고 그 일을 위해 함께 협력하며 도울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하나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또한 그런 의미의 하나는 세상 모임에서도 얼마든지 목격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교회는 인간의 연합을 필요로 한 곳이 아니란 것입니다. 그런데도 목사는 교인을 향해서 연합을 강조하며 마음을 합하고 힘을 합하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 이유는 신앙적인 문제 때문이 라기보다는 교회를 향한 소망이 주된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목사에게 가장 민감한 것은 교회입니다. 교인들의 생명의 문제에 민감하기보다는 자신이 담임하는 교회가 아무런 문제없이 부흥하고 그것으로 자기 이름과 능력이 인정되는 일에 민감한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교인들의 연합과 단결을 외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힘은 단결과 연합을 통해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바벨탑의 사건에서 드러났던 것도 힘을 위한 인간의 연합이었습니다. 인간이 연합하여 힘을 모음으로써 흩어지지 말고 하나가 되어 이름을 내자는 것입니다. 이처럼 연합하여 힘을 모으자는 것은 세상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바람직한 관계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 관계를 깨뜨리심으로써 인간의 연합을 싫어하신다는 것을 드러내셨습니다. 그 이유는 연합과 하나 됨을 강조하는 그 안에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은 자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한 세상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시고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셨지만 하나님이 말씀하신 생육과 번성은 인간이 서로 연합하여 힘을 모아 번성함으로써 인간이 원하는 세상을 구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세상으로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연합하여 인간의 이름을 번성케 하는데 마음을 둠으로써 하나님이 말씀하신 생육과 번성에 실패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연합하지 말고 서로 싸우고 다투는 관계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신자에게는 인간의 연합이 아니라 다른 차원의 연합이 있는데 그것이 곧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관계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 관계가 인간의 연합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성령이 하나 되게 하셨다는 말을 언급할 필요가 없습니다. 인간의 연합은 성령이 없이도 서로 동일한 목적과 이유 아래서 자연히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서로 적이라고 해도 자신에게 유리한 일이라면 손을 잡고 연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령이 하나 되게 하셨다는 것은 성령이 아니면 불가능한 하나 됨을 뜻합니다. 성령이 아니면 불가능한 하나 됨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하나 됨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세워진 골고다에는 강도가 달린 두 개의 십자가가 더 있었습니다. 이 두 개의 십자가 중에 하나는 예수님을 향해서 ‘당신의 나라가 임할 때 나를 기억해 달라’고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사람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예수님과 하나가 된 것입니다.

 

 

이 강도는 자신의 죽음을 자기의 죄로 인한 당연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강도는 자신의 죽음을 죄의 당연한 결과로 바라보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고 비방합니다.

 

 

이 강도는 자기 구원에 모든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는 말은 관심이 예수님의 구원이 아니라 나의 구원에 있음을 의미합니다. ‘나의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 이것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바라보며 비방한 한 강도의 시각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구원해 줄 가능성도 힘도 없어 보이는 예수님을 조롱과 비방의 대상으로만 여겼을 뿐입니다.

 

 

예수님과 하나가 된 것은 예수님의 능력을 이용해서 원하는 것을 얻는 개념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삶과 예수님이 가신 길이 곧 나의 삶이 되고 길이 된다는 것을 믿는 것이 예수님과의 하나 됨입니다. 이 관계는 우리의 본성으로 가능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삶이나 그 길은 인간이 추구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하나가 되었다는 것은 나는 없고 예수님만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내가 여전히 존재하고 예수님이 계신다면 둘이지 하나 된 관계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없고 나만 존재하는 것도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관계가 아닙니다. 그것은 나라는 존재 하나만 있을 뿐입니다.

 

 

결국 성령이 하나 되게 하셨다는 것은, 나라는 존재를 무너뜨리신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무너져야 주를 보게 되고 주를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내가 없는 상태에서 주 예수님만을 가장 존귀한 분으로 영접하게 되는 것이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없고’가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까요? 우린 분명 존재합니다. 이 존재성은 ‘나는 없다’라는 말 한마디로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가능합니다. 그것은 성령으로 인한 자기 부인이 있을 때입니다. 자기 부인, 즉 자기를 부인하게 되는 것이야 말로 예수님과 하나 된 관계를 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한편 강도는 자신의 죽음을 자기 죄로 인한 당연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생존이 아니라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나라가 임할 때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말한 것입니다. 지금 죽음을 앞에 두고 있는 강도가 어떻게 자신을 기억해 달라는 말을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나라가 임할 때 예수님이 함께 하심으로 새로운 생명으로 나올 수 있음을 알았기 때문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강도에게 자신은 이미 죄로 인해 죽은 자입니다. 죽는 것이 마땅하다는 강도에게는 더 이상 자신의 생존이 관심이 아니라 예수님만이 관심의 전부였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과 하나 된 관계입니다.

 

 

사도는 이 하나 됨을 힘써 지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과 하나 됨을 힘써 지킨다는 것은, 죄로 인해 사망이 마땅한 나 같은 자를 부르시고 심판의 세상에서 건지셔서 하늘의 생명에 속한 자가 되게 하신 은혜를 바라보면서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과 하나 된 관계에서는 증거되는 것도 예수님으로부터 베풀어진 것이어야 합니다. 즉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2절)라고 말하는 것처럼 예수님의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과 서로 용납하는 것이 예수님과 하나 된 관계에 있기 때문에 자연히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함께 하신 것은 우리의 생존 문제를 돕기 위해서가 아니라 생명의 문제를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이 함께 해 주셔야 만이 죄에서 해방될 수 있고, 생명으로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생존의 문제 때문에 예수님을 찾는다면 예수님을 비방한 강도처럼 자신의 일이 해결이 안 될 때면 언제든 원망과 불평으로 돌변하게 될 것입니다. 이들에게 예수님은 생존을 위한 보조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생존이 아니라 생명의 문제를 바라본다면 예수님은 구원자이십니다. 그래서 어떤 처지와 형편에서도 예수님의 피의 은혜로 인해 감사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과 하나 된 관계 안에서 모이는 교회는 예수님이 베푸신 은혜와 용서와 온유로 감사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 자랑이나 공로도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이것이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것입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24 성령 (성령 24강) 성령의 감동 신윤식 2011.07.17 4725
23 성령 (성령 23강) 성령과 은사 신윤식 2011.07.03 4157
22 성령 (성령 22강) 양자의 영 신윤식 2011.06.26 4253
» 성령 (성령 21강) 하나 되게 하신 성령 신윤식 2011.06.12 4492
20 성령 (성령 20강) 지혜와 계시의 영 신윤식 2011.06.05 4531
19 성령 (성령 19강) 생명을 향하여 신윤식 2011.05.29 5300
18 성령 (성령 18강) 들음에서 봄으로 신윤식 2011.05.22 4317
17 성령 (성령 17강) 성령과 자유 신윤식 2011.05.15 4380
16 성령 (성령 16강) 성령의 사람 신윤식 2011.05.08 4266
15 성령 (성령 15강) 성령과 행함 신윤식 2011.05.01 4362
14 성령 (성령 14강) 성령의 역할 신윤식 2011.04.24 4380
13 성령 (성령 13강) 성령 경험 신윤식 2011.04.17 4363
12 성령 (성령 12강) 성령과 교회 신윤식 2011.04.10 4691
11 성령 (성령 11강) 성령 세례 신윤식 2011.04.03 4317
10 성령 (성령 10) 성령 충만 신윤식 2011.03.27 4694
9 성령 (성령 9강) 성령과 몸의 행실 신윤식 2011.03.13 5311
8 성령 (성령 8강) 성령의 열매 신윤식 2011.03.06 5040
7 성령 (성령 7강) 성령의 탄식 신윤식 2011.02.27 4827
6 성령 (성령 6강) 성령에 대한 불신앙 신윤식 2011.02.20 5179
5 성령 (성령 5강) 성령과 해방 신윤식 2011.02.13 4655
Board Pagination Prev 1 2 Next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