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2011.08.14 13:54

(교회 3강) 교회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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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일 4:7-12http://onlycross.net/videos/church/jo1-040712.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12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설교>

 

교회가 사랑이 있어야 한다는 말을 많이 들을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사실이지만 이 말이 자칫 교회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음을 주지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성경이 말하는 사랑에 대해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랑의 개념에 교회 사랑을 끌어 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교회사랑은 세상 사랑과 다를 바 없게 됩니다.

 

 

세상이 이해하는 사랑은 보고 싶은 것, 좋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웃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도 먼저는 그와의 관계에 아무런 문제가 없어야 합니다. 좋아하지 않는다면 적어도 불편한 관계는 아니어야 합니다. 그래야 친절이 나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사랑입니다.

 

 

교회 사랑을 과연 이러한 세상의 사랑과 빗대어 말할 수 있을까요? 세상은 불편한 관계에 있는 사람에게는 사랑을 베풀지 않지만 교회는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말씀 아래서 불편한 관계에 있는 사람에게까지 친절을 베푸는 수준 높은 사랑이어야 할까요?

 

 

그렇게 해서 세상의 사랑과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교회 사랑일까요? 하지만 불편한 관계에 있는 사람에게 친절을 베푼다고 해도 그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친절은 아닐 것입니다. 결국 가식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교회 사랑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랑을 이처럼 세상의 규범적 윤리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교회사랑 역시 서로 친절하게 대하고 어려운 사람은 도와주는 것으로 이해하면서 교회가 자신에게 친절을 베풀지 않으면 ‘교회가 사랑이 없다’는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은 8절에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도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랑 개념으로 이해하게 되면 하나님은 어려운 자를 돕고 지켜주시는 분으로 여기게 됩니다. 따라서 형제 사랑 역시 도와주고 친절을 베푸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실천하고자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7절에서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랑이 하나님께 속했다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만 사랑이 있다는 뜻입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에게 있는 사랑은 사랑이 아닌 것이 됩니다. 어려운 사람을 돕고 친절을 베푸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 받은 사랑이 친절이고 어려울 때 도와주신 것이었습니까? 그러한 사랑은 매우 추상적이며 막연한 기대일 뿐입니다. 세상을 돌아보십시오. 믿는 자들이 모두 어려울 때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서 일이 해결되고 있습니까?

 

 

믿는 자이면서도 어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것을 믿음이 부족해서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아주 무책임한 말일 뿐입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살아갑니다. 하지만 우리가 기대하는 도우심이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생명의 문제로 이어집니다. 9,10절을 보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고 말합니다.

 

 

독생자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이 사랑이며 그 사랑은 우리를 살리기 위한 것, 즉 생명의 문제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오신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나타난 것이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도우심은 우리가 생명으로 나아가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것이 분명합니다. 즉 어려움이 계속된다고 해도 그 일에는 우리를 생명으로 나아가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 있으며, 때로 문제가 해결된다고 해도 그 또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시기 위한 사랑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심으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교회는 이 사랑으로 서로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사랑은 세상의 사랑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은 신자가 함께 지어져 가는 관계에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으로 생명을 얻은 신자가 함께 지어져 가는 과계에 있는 교회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고 증거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분명히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서로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서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사랑을 모르기 때문이고. 그것은 곧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한다는 뜻이 됩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생명을 얻게 된 하나님의 구속의 일에 대해 전혀 마음을 두지 않고 있고, 기쁨과 감사도 없다는 것입니다.

 

 

11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신자로써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사랑 받고자 하는 마음으로 함께 하기보다는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함께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받고자 하는 마음에는 나를 사랑해주지 않는 형제에 대한 섭섭함만 있을 뿐이지만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에는 사랑하지 못해서 미안한 마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면 신자가 서로 사랑하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친절을 베풀고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이 사랑의 본질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이 같은 말이 친절을 베풀지 말고 어려운 사람을 돕지 말라는 의미가 아님을 잘 아실 것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생명을 주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저주에 갇힌 우리에게 생명 주심, 이것이 하나님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사랑입니다.

 

 

생명을 주셨다는 것은 살았다는 뜻입니다. 즉 생명이 주어지기 전에는 죽은 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실체입니다. 죽은 자에게는 아무것도 필요 없고 의미가 없습니다. 세상이 소중하게 여기고 사랑하는 그 어떤 것도 죽은 자에게는 소용없는 것들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없이 죽은 자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재물을 안겨주고 친절을 베푼다고 해서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다만 한순간의 기쁨으로 그칠 뿐입니다.

 

 

죽은 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 존귀한 것은 생명이며 생명은 곧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때문에 사랑은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의지대로 누군가에게 그리스도를 알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우리의 행위라고 할 수 없으며 다만 하나님의 일하심이고 하나님의 능력일 뿐입니다. 결론은 우리는 사랑을 행할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서로 사랑하라는 요한의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우리에게 사랑을 행할 능력이 없는 것이 사실이라면 요한도 그것을 알았을 것이고, 그러면 ‘사로 사랑하라’는 말이 아니라 ‘너희는 사랑할 능력이 없다 사랑하려고 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이것은 우리의 큰 착각입니다.

 

 

요한이 서로 사랑하라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있는 사랑을 실천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생명을 얻은 신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면 그 사랑의 능력에 의해서 사랑을 보이게 되는 것이 마땅합니다. 즉 생명의 열매로써 사랑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사랑을 행하는 것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의 능력에 의한 행함이기 때문에 나의 실천도 행함도 아닌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생명을 경험한 신자라면 생명의 기쁨과 감사가 있을 것이고, 그 기쁨과 감사의 세계를 함께 지어져 가는 관계에 있는 형제들과 함께 하고자 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이처럼 사랑의 초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에 있습니다. 때문에 ‘사랑이 많다’라는 말을 듣기 위해서 사랑을 실천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닌 것입니다.

 

 

‘어떻게 사랑해야 합니까?’라는 질문은 하지 마십시오. 사랑은 어떤 방법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말한 대로 예수님의 생명 사건에 대한 감사와 기쁨이 그 마음에 있는 신자라면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어떻게’는 없습니다. 생명에 대한 기쁨과 감사로 형제와 함께 하시는 것이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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