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2011.09.11 13:09

(교회 7강) 살아 있는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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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 3:1-6http://onlycross.net/videos/church/rev-030106.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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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2 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3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4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5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6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설교>

 

교회를 두고 ‘살아있다’ 혹은 ‘죽어있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물론 사데 교회에 대한 본문의 말씀에서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교회가 살았다 죽었다’라는 표현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문제는 어떤 교회를 살았고 죽은 것으로 보느냐는 우리의 시각입니다. 예수님은 사데 교회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라고 말씀합니다.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다는 것은 사데 교회를 바라보는 외부의 평가를 뜻합니다. 외부에서 바라볼 때는 사데 교회는 살아있는 교회라는 평가와 칭송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보실 때 사데 교회는 죽은 자였을 뿐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교회를 바라보는 시각과 예수님이 바라보는 시각에 전혀 다른 차이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러면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교회가 살아있는 모습은 어떤 것입니까? 외부에서 교회를 보고 살아있다는 평가를 한다면 그것은 외부적으로 드러나고 보이는 왕성한 활동이 있음을 뜻합니다. 기도에 열심을 낸다거나 예배가 뭔가 다르다거나 혹은 설교가 다르거나 사회적으로 많은 봉사 활동을 하는 등의 왕성한 활동이 있을 때 그것을 교회가 움직이는 것으로 여기면서 ‘살아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가 살아야 교회가 산다’ ‘예배가 살아야 교회가 산다’ ‘설교가 살아야 교회가 산다’는 등등의 말을 하고 이러한 종류의 책도 볼 수가 있지만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교회가 무엇인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생명을 뜻합니다. 그런데 교회의 생명이 기도 또는 예배, 목사에게 달린 문제는 아닙니다. 교회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관계에서만 언급될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의 관계 안에 있느냐 밖에 있느냐는 것으로 생명의 문제가 결정되는 것이지 기도나 예배 목사의 여부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교회가 살아있고 죽어있는 문제에 대해 말씀합니다. 사람이 죽은 사람과 살아있는 사람을 구분하지 못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죽은 교회와 살아있는 교회는 과연 구분할 수 있습니까?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무엇이든 그 중심을 볼 수 있는 눈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느 교회를 두고 살았다 죽었다는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평가는 오직 예수님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죽었다는 것은 곧 죄에 속했음을 뜻합니다.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옴으로써 모든 자가 죽은 자가 된 것이 세상의 실상입니다. 무엇을 하고 하지 않고와 상관없이 죽은 자라는 것이 세상에 대한 평가입니다. 그러므로 외적인 활동 여부를 기준으로 ‘죽었다 살았다’라고 말하는 것은 죄의 삯이 무엇이며, 이 세상이 죄에 갇혀있음을 알지 못한 소경의 안목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성경은 우리의 활동 여부를 기준으로 살았다 죽었다는 평가를 하지 않습니다. 만약 왕성한 신앙적 활동이 신자가 살아있다는 증표라면 몸이 약하고 병중에 있는 신자나 가난한 사람은 ‘살았다’는 평가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몸이 약한 사람은 왕성한 활동을 할 수 없고, 가난한 사람 역시 사회적인 활동과는 거리가 멀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인간적 시각에서의 ‘살았다’는 평가는 지극히 잘못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살았다는 이름을 가진 사데 교회가 주님으로부터는 죽었다는 말을 듣는 것입니다.

 

 

1절에 보면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사데 교회에 많은 행위가 있었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많은 행위, 즉 왕성한 활동이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눈에 살아있는 것으로 보인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들의 행위에 대해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아무리 많은 행위가 있다고 해도 그 행위에 온전한 것이 없다면 다 헛되다는 것입니다. 결국 교회가 많은 활동을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온전한 것은 완전한 행동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때문에 사데 교회의 행위가 뭔가 부족하다는 의미로 온전한 것을 찾지 못했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히 10:14절에 보면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였느니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제사장 되셔서 자신을 제물로 삼아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예수님의 그 행위로 온전함을 입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온전이란 예수님의 죄 용서의 은혜를 입은 거룩의 상태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찾으시는 온전은 신자가 죄 용서의 은혜 안에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시 119:1절에 보면 “행위가 온전하여 여호와의 율법을 따라 행하는 자들은 복이 있음이여”라고 말합니다. 행위의 온전함은 율법을 따라 행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율법을 하나하나 실천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이 의미하는 바를 따라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율법이 의미하는 것은 죄를 깨닫는 것입니다. 따라서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를 깨닫고 죄를 대신 지고 죽으신 십자가의 은혜로 감사하는 것이야 먈로 행위의 온전함이고 율법을 따라 행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온전한 행위를 찾으신 것입니다. 행위에서 이 온전함이 없다면 아무리 많은 행위가 있다고 해도 죽었다는 말을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3절에서 회개하라고 하는 것도 사데 교회가 행위는 많았으나 회개가 없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회개가 없다는 것은 죄를 알지 못하고 십자가의 은혜 또한 마음에 두고 있지 않다는 뜻이기에 사데 교회의 모든 행위는 죽은 자의 행위일 수밖에 없고 따라서 죽었다는 말을 듣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현대 교회는 외적인 부흥과 왕성한 활동을 통해서 교회의 살아있음을 보여주고자 하고, 또 살아있다는 이름을 갖고 싶어 합니다. 예수님의 평가보다는 사람들의 평가에 관심을 두고 있고 사람들에게 좋은 교회로 보여주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아야 교회의 전도에 유익이라는 생각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써 주님이 피로써 세우셨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머리 되신 예수님의 평가보다 세상의 평가에 더 마음을 둔다는 것은 교회가 이니 세상을 바라보고 있고 세상에서의 영광과 이름을 취하고자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 뿐입니다.

 

 

여러분은 교회의 온전함에 마음을 두셔야 합니다. 세상이 교회를 어떻게 평가하는가 에는 민감할 필요가 없습니다. 물론 세상을 비난을 받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고자 하는 것은 교회가 머리되신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은 교회를 알지 못합니다. 다만 자신의 눈에 비췬 대로 말할 뿐입니다. 세상의 윤리와 도덕적 시각에 가까운 교회는 칭찬할 것이고, 그렇지 않은 교회는 관심을 두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이 칭찬하는 교회라고 해서 예수님에게 ‘살았다’는 평가를 받는 것은 아님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는 온전함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피로 세우신 교회의 본질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온전함이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죄 용서입니다. 죄 용서의 은혜를 간직하고 그 은혜가 증거되는 것이야 말로 교회로서의 참된 본질에 해당되는 것이고, 교회의 온전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용서의 은혜가 살아있는 것으로 교회가 살았다는 이름을 얻는 것입니다.

 

 

용서의 은혜는 어떤 교회든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진심으로 용서의 은혜 아래 산다면 그 은혜가 부요함으로 다가와야 합니다. 교회의 형편과 시설 그 어떤 것으로도 교회는 부요해질 수 없습니다. 세상이 볼 때는 큰 건물 많은 사람과 재정 등으로 부요한 것처럼 보이지만 진정한 교회의 부요는 용서의 은혜를 누림으로써 감사함과 기쁨으로 풍성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교회는 작고 크다는 세상적 평가를 초월하여 예수님의 은혜를 나누며 그것으로 만족할 뿐입니다. 이것이 교회에 있어야 하는 온전함의 모습일 것이고 진정으로 살아있는 교회로써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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