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2011.11.20 13:09

(교회 14강) 교회와 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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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전 4:7-11http://onlycross.net/videos/church/pe1-040711.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8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9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10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11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

 

 


<설교>

 

<설교>

 

교회에서 가장 많이 강조되는 것은 아마 봉사일 것입니다. 봉사를 신앙의 척도요 열매요 증거로 말하면서 봉사가 없는 신자는 신앙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진단하고, 봉사에 열심이 있는 신자는 수준 높은 신앙으로 인정하면서 하늘에서 상이 클 것이라는 말로 칭찬하기도 합니다.

 

이로 인해 신자들 사이에 봉사가 하나의 경쟁으로 자리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처럼 몸과 돈으로 봉사하고 헌신할 수 없는 형편에 있는 신자들은 은근히 뒷전으로 밀리는 것도 볼 수 있습니다.

 

봉사가 무엇일까요? 현대 교회가 주로 가르치고 요구하는 봉사는 교회와 사회를 위한 몸의 헌신입니다. 교회의 여러 가지 일을 위해 수고하고, 고아원이나 양로원을 찾아가 청소하고 밥을 하며 수고하고 헌신하는 것을 봉사라고 이해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방식의 봉사는 누구에게나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아는 자든 모르는 자든 자신의 결단과 의지와 뜻만 있으면 사회의 소외된 계층을 찾아가 헌신할 수 있고 돈을 내놓을 수도 있습니다. 교회는 나오나 예수님께 관심이 없는 사람도 가정일 보다는 교회 일을 우선하며 교회가 원하는 헌신과 충성에 매달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예수님이 원하시는 봉사인가에 대해서는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현대 교회가 말하는 봉사는 심히 왜곡되어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현대교회는 봉사를 신앙의 목적으로 삼고 있습니다. 봉사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나타내고 증거하는 수단으로 자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봉사 자체가 목적이 돼 버린 것이 현실이며 이것이 봉사에 대한 오해며 왜곡인 것입니다.

 

이로 인해 교회는 교인들을 봉사에 열심 있는 사람으로 만들려고 하고 또한 그러한 교인을 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의 부흥과 발전은 결국 교인이 교회를 위해서 얼마만큼 봉사하고 헌신하는가에 달려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10절에 보면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을 액면 그대로 이해한다면 ‘하나님은 신자에게 서로 봉사하라고 은사를 주셨다’는 뜻이 됩니다.

 

따라서 은사를 받은 신자가 봉사에 게으르다면 그것은 곧 주인에게 받은 한 달란트를 땅에 묻은 악한 종과 같다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때문에 신자는 자신이 받은 은사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도 못하면서 악한 종이 되지 않기 위해서 교회 일에 맹목적인 열심을 내기도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주의할 것은 7절의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는 구절입니다. 이 구절에서 만물의 마지막, 즉 종말이 가까이 왔으니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말하는 것은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신자는 종말의 때를 살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에 기도와 말씀에 힘쓰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7절은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이어지고(8절)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9절) 서로 봉사하라는 말씀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10절). 즉 사랑, 대접, 봉사 이 모든 것이 종말과 연결되어 신자의 종말론적인 삶의 내용으로 언급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는 왜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다는 종말을 말하면서 기도와 함께 사랑과 대접과 봉사에 대해 언급하는 것일까요? 만물의 마지막은 세상의 끝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끝도 의미합니다. 즉 신자가 세상의 종말을 말한다면 자신의 종말까지 포함해서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2절을 보면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고 말합니다. 사람은 누구도 육체의 남은 때가 얼마인지 알 수 없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각 사람의 육체의 남은 시간을 알려 주셨다면 사람들의 삶은 어떻게 달라질까요?

 

남은 때가 수십 년인 사람들은 그런대로 여유를 가지고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몇 년 아니 몇 달 남은 사람들은 하루하루의 시간이 지나는 것이 아쉬울 것이고 인생이 끝난다는 두려움이 있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세상에서의 영광과 부요에 집착을 할까요? 인생이 끝나면 세상에서의 영광과 부요도 다 헛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당장 내일 육체의 남은 때가 도달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오늘을 세상의 영광과 부를 위해 살아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육체의 남은 때를 알지 못함으로써 사람이 자신의 인생에서 무엇을 지향하고 무엇을 목적으로 하고 살아가는지가 드러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3절을 보면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 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라고 말합니다. 육체의 남은 때, 즉 종말을 염두에 두지 않는 사람들의 삶은 오로지 자기 육체를 위하는 방향으로만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기 육체를 위해 사는 것이 이방인의 뜻입니다.

 

그렇다면 종말을 염두에 두지 않는 사람의 봉사는 어떤 속성을 가지고 있을까요? 이런 사람의 봉사는 비록 타인을 돕고 타인을 위한다는 명목은 가지고 있을지라도 결국은 자기 영광과 자기만족 자기 보람을 의식한 봉사로 나타날 것입니다. 이것이 현대 교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봉사입니다. 그래서 앞서 말한 대로 봉사를 명목으로 자기 신앙을 증거하려고 하고 이로 인해서 봉사가 경쟁으로 나타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가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온 이때에 기도하라고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종말의 때에 멸망에 이르지 않기 위해 기도하라는 것일까요? 아니면 종말이 가까이 왔으니 더욱 더 신앙적인 자세를 가지라는 의미로 하는 말일까요?

 

종말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심판이 행해지는 날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심판이 행해질 때 그 가치가 드러나는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이 부르셔서 생명의 관계에 있게 한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심판에서 구원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부르심과 생명의 관계에 있게 된 모든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만 있을 뿐이지 인간의 것은 그 무엇도 개입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종말을 사는 신자는 자연히 나를 부르시고 생명의 관계에 있게 하신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에 감사할 뿐이지 자신의 열심과 봉사, 또는 헌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종말을 살아가는 신자는 아무리 대단한 열심을 담은 봉사를 한다고 해도 그것을 내세우지 않으며 신앙 또한 자신의 봉사를 수단으로 증명하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자신의 봉사가 하나님과의 생명에 관계에 있게 할 수 없음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육체의 남은 때를 생각한다면 나 같은 자를 부르시고 백성의 자리에 있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마음이 향하게 됩니다. 그 사랑으로 생명에 속하게 되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신자의 봉사는 이 사랑을 토대로 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봉사를 자신을 보여주기 위한 수단으로 삼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처럼 봉사합니다. 청지기가 하나님께 맡은 것을 나눠주는 일을 하는 사람일 뿐인 것처럼 신자 역시 하나님께 맡은 것을 나눠주는 역할자입니다. 이것이 봉사의 정신이 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봉사는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행한 봉사가 아니라 사랑의 하나님이 내게서 활동하신 결과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육체에 남은 때가 있다는 것은 육체를 주관하시는 분이 있다는 의미고, 따라서 우리가 얼마를 살든 그것은 전적으로 우리 육체를 주관하시는 분의 소관이라는 뜻이 됩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내 힘으로 나를 위한 내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힙입어 살고 있는 인생인 것입니다. 이것이 종말론적인 삶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고, 이러한 삶의 길에서만 참된 봉사의 자세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종말을 살아가는 신자는 자기 이름과 영광을 위해 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봉사를 한다고 해도 자기 이름과 영광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삼지 않습니다. 그래서 봉사로 인한 경쟁도 없게 됩니다. 봉사로 인한 우월감도 없게 됩니다. 봉사를 기준으로 나와 타인을 판단하는 것도 없습니다. 다만 은혜를 맡은 자로 은혜를 함께 나누기를 힘쓸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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