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2011.12.11 13:11

(교회 17강) 교회와 사회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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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후 9:8-9http://onlycross.net/videos/church/2co-090809.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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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8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9 기록된 바 그가 흩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원토록 있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설교>


교회의 역할을 세상 속에서 소금과 빛이 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부패를 방지하는 소금처럼 교회는 부조리한 일이 만연한 세상을 정화시키며 세상이 악해지는 것을 방지하는 일에 힘써야 하고 빛처럼 어두운 세상을 환하게 비춰야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역할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 사회적인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교회도 많습니다.

 

 

사회적 시각에서 본다면 어렵고 힘든 사람들이나 소외 계층을 위해서 많은 활동을 하는 것이 예수님의 사랑의 정신을 세상에 전파하는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으로 비춰질 것입니다. 또한 많은 기독교인들도 자신이 출석하는 교회가 그러한 사회적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를 원합니다. 그것은 어쩌면 교회의 사회적인 활동을 통해서 자신 또한 사회적인 일에 뭔가 참여하고 있다는 대리만족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교회의 사회참여가 과연 복음을 전파하는 교회 사명의 한 부분으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인지, 또한 교회의 아름다움과 영광을 나타내는 일이 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새롭게 조명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도덕과 윤리적인 기준에 긍정적이기 때문에 성경적으로도 옳다고 단언할 수는 없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세상의 도덕이나 윤리와는 길을 달리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말은 성경이 비도덕, 비윤리적인 길을 간다는 뜻이 아니라 세상이 이해하는 도덕과 윤리를 초월한 하나님의 의의 나라를 증거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사회참여를 교회의 사명이나 본질로 삼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 또한 사회참여라는 것으로 증거되거나 증거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교회는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사회는 곧 세상을 의미하는 말로써 성경적 시각으로는 교회 밖을 뜻합니다. 그리고 교회 밖의 세상은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으로 규정하는 것이 성경입니다. 즉 성경적 시각으로 볼 때 교회와 세상은 함께 어울리고 화합하고 조화를 이루어야 할 관계가 아니란 것입니다. 따라서 세상에서의 교회 사명 또한 부패 방지나 정화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8절에 보면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합니다.

 

 

문맥으로만 보면 하나님께서 신자에게 은혜를 넘치도록 주신 것은 모든 것이 넉넉하여 착한 일을 넘치게 하기 위해서라는 뜻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즉 은혜를 넘치게 주셨다는 것은 모든 것을 넉넉하게 주셨다는 것이고, 신자는 넉넉하게 받은 것으로 착한 일을 넘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그럴 듯한 해석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착한 일은 모든 것을 넉넉히 받은 부요한 자들의 몫으로만 남게 됩니다. 그리고 사회참여 역시 모든 교회의 문제가 아니라 재정이 넉넉한 일부 교회의 문제로만 남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불공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부요한 교회는 사회참여를 할 수 있지만 부요하지 못한 교회는 사회참여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처지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이기에 모든 교회에 은혜를 넘치게 하셨고, 넘치는 은혜 안에 있는 모든 교회는 이미 모든 것에서 넉넉한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은혜를 넘치게 주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큰 교회 작은 교회의 구분이 없습니다.

 

 

이렇게 볼 때 교회의 사회 참여는 다른 시각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가난하고 소외된 계층의 사람들을 찾아가 돕고, 환경 운동 등 사회적인 일에 참여하는 의미의 사회참여가 아니라 은혜 받은 모든 신자가 믿음으로 인해서 참여하게 되는 사회참여를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교회의 사회참여는 있습니다. 세상 속에 존재하는 교회로써 사회참여는 없을 수가 없습니다. 교회는 끊임없이 세상을 향해서 뭔가를 증거하고 보여주어야 하는 위치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세상이 이해하고 있는 사회참여는 교회의 사명도 본질도 아닙니다.

 

 

초대 교회에 사회참여가 있었을까요? 있었다면 그들은 어떤 식으로 사회참여를 보였을까요? 고아와 과부를 돌보았을까요? 아니면 가난한 사람을 구제했을까요? 성경을 보면 초대 교회는 분명 물건을 서로 통용했고 재산을 팔아 필요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구제도 했습니다.

 

 

어느 누구도 이러한 적극적인 사회참여를 실천하기가 힘들 것입니다. 하지만 초대 교회의 그 같은 실천은 소유의 자유에서 나오는 모습들이었습니다. 즉 가난한 사람을 돕는 좋은 일이 목적이 아니라 소유로부터의 자유라는 믿음으로 인해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행동이었습니다.

 

 

따라서 초대 교회가 세상에 증거한 것은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는 착한 일이 아니라 소유가 아닌 믿음으로 살아가는 새로운 세상이 있음을 보여주는 착한 일이었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세상이 있으며, 그 세상이 어떤 것을 증거하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께는 가장 착한 일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사회 참여는 다만 믿음으로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상에 세우신 이유가 오직 세상의 것을 힘으로 삼고 그 힘으로 살고자 하는 세상을 향해서 믿음으로 사는 새로운 세상이 있음을 증거하기 위한 것이라면 믿음으로 모이고 믿음으로 사는 것이야 말로 사회참여가 아닐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런 의미의 사회참여에 시큰둥할 것입니다. 이러한 사회참여로는 사람들을 변화시킬 수 없으며, 세상이 알아주지도 않을 것이고, 무엇보다 보람을 만끽할만한 가시적인 실천이나 세상의 반응을 전혀 기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자는 누군가 알아주기를 기대하고 믿음이 길을 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이고 신자로써 가야할 당연한 길이기에 묵묵히 믿음의 길을 가고자 할 뿐입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즉 교회는 세상이 사는 것처럼 살지 않고 세상이 가는 길을 가지 않는 것으로 그 역할을 하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교회에 있어야 할 사회참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교회가 사회적인 일에 무관심해야 한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힘들고 어려운 계층에 대해서는 관심 둘 필요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교회는 얼마든지 어려운 사람에 대해 많은 도움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형편이 된다면 도움을 주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교회의 사회참여로 규정지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사회 참여는 도덕적 실천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로 이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진보적 성향의 교회를 보면 정치적인 문제에도 개입을 하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정부가 부당한 정책을 펼치면 교회가 앞장서서 막아야 한다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또한 정부가 교회에 불리한 정책을 행할 때도 기독교 탄압이라고 하면서 온 교회가 연합하여 성명서를 내며 반발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위에 있는 권세에 복종하라는 말을 했습니다(롬 13:1). 로마 정부가 기독교에 대해 호의적이었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시 기독교는 로마로부터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위에 있는 권세에 복종하라는 말을 한 것입니다. 기독교를 핍박한다고 해서 교회가 성명서를 내며 반발한 적이 없습니다. 세례 요한이 부당하게 죽임을 당했을 때도 예수님이나 믿는 자들은 그 어떤 반발도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세상의 부당한 일을 막고 대항하기 위해 존재하는 세력이 아니라 어떤 형편에서도 믿음으로 살아가며 다만 하나님의 구원으로 기뻐하고 찬송함으로써 세상이 알지 못한 다른 세상을 증거하기 위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사회참여는 교회로서의 독특성을 잃어버리지 않은 교회에 세상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알아주고 알아주지 않는 것은 교회가 신경 쓸 문제가 아닙니다. 교회는 단지 하나님이 넘치게 주신 은혜로 모든 것에서 넉넉한 부요함으로 어떤 형편과 처지에서도 하박국 선지자가 말한 것처럼 아무것도 없는 형편에서도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한 사회참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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