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
2012.05.13 10:40

(구원 4강) 구원과 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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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6:28-31http://onlycross.net/videos/save/joh-062831.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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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28 그들이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30 그들이 묻되 그러면 우리가 보고 당신을 믿도록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31 기록된 바 하늘에서 그들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설교>

 

신자는 구원 받은 사람입니다. 구원 받은 사람이라는 것은 우리의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은 자로 살아감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신자가 구원 받았다는 표적은 무엇일까요?

 

 

신비한 체험이나 병이 낫는 기적을 경험한 것이 구원의 표적일까요? 하지만 그처럼 체험적인 것은 신자의 삶에서 계속 발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때문에 체험은 개인의 경험으로 머물 뿐이기에 그것을 구원 받음의 표적으로 제시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유대인들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우리가 보고 당신을 믿도록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라며 표적을 묻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이라는 것을 믿을 수 있는 눈에 보이는 증거가 있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이들은 그 표적을 예수님이 행하시는 일에서 보기를 원했습니다.

 

 

이들이 “기록된 바 하늘에서 그들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조상들이 하늘이 준 떡을 먹은 것처럼 예수님이 하늘로부터 떡을 내리게 하여 과거 조상들이 먹었던 만나를 먹게 하는 수준이 되어야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으로 믿겠다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조상들이 만나를 먹은 것을 모세의 능력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모세가 하늘로부터 만나를 내려서 먹게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해서 보낸 모세가 그런 능력을 보였으니, 예수님도 하나님이 보내셨다면 그와 같은 수준의 능력을 보이는 것이 옳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오병이어의 기적은 놀라운 것입니다. 때문에 그 기적만으로도 얼마든지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임을 믿을 수 있지 않느냐는 것이 우리 생각일 것입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다릅니다. 그들은 조상 대대로 전해 오는 기적의 만나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만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고 조상들은 신비한 만나를 먹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먹은 보리떡은 그 출처가 어린아이이며, 집에서 매일 먹는 음식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다만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이 먹고도 남았다는 것이 놀라운 일이지만, 그 역시도 수십만 명이 매일 같이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를 먹은 기적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오병이어의 기적만으로는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분으로 인정할 수가 없었기에 만나를 언급하면서 표적을 요구한 것입니다.

 

 

그런데 26절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는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표적으로 말씀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그들은 표적을 보고서도 표적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예수님이 생명의 양식으로 오신 분임을 증거하는 표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좇은 자들은 육신의 배부름만 생각하였을 뿐입니다. 생명의 양식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과연 육신의 배부름으로 만족할까요? 사람은 좀 더 좋은 것을 먹고 싶어 합니다. 배부른 것으로 족한 것이 아니라 더 좋은 것으로 배부름을 얻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병이어로 배부름을 얻은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만나로 배부름을 얻게 해줘야 예수님을 인정하겠다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만나를 모세가 하늘로부터 준 떡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하늘로부터 주신 떡이라고 하시며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즉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떡은 조상들의 배를 부르게 했던 만나도 아니고, 지금 유대인들의 배를 부르게 한 오병이어도 아니라 예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이 믿는 모든 자를 영원히 주리지 않게 할 생명의 떡으로 오셨음을 보여주는 표적으로 오병이어 기적을 행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영원히 주리지 않게 하고 목마르지 않게 하시는 분으로 오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으로 인해서 주리지 않고 목마르지 않는 자로 살아가는 것이 곧 구원 받은 증거요 표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 받은 신자의 표적은 세상 일이 특별히 잘되거나 병이 낫는 것으로는 얘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자가 예수님으로 인해서 주리지 않고 목마르지 않는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이것을 영혼이 배부른 상태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사실 우리는 이 같은 배부름을 경험하고 산 적이 별로 없습니다. 예수님의 은혜를 말하고 구원을 말하는 지금도 우리의 심령은 배부르다기보다는 고달프고 불안하고 염려스럽고 불만도 있으며 남 잘되는 것이 부러울 뿐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라면 우리는 영혼의 배부름과는 한참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솔직할 것입니다.

 

 

이런 우리가 구원의 표적을 어떻게 얘기해야 할까요? 마 12:39절에 보면 예수님은 요나의 표적을 예수님이 보일 참된 표적으로 말씀합니다. 요나의 표적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가리킵니다.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만이 참된 표적일 수밖에 없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기적의 사건만이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죄에서 건지시고 구원하시는 분임을 보여주는 유일하고 확실한 표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도록 행하신 표적은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고 바다를 걸으시고 풍랑을 잠잠케 하신 기적이 아니라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이것 외에 우리가 믿고 의지해야 할 다른 표적은 없습니다.

 

 

따라서 인간에게서 표적으로 나올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인간에게서 그 어떤 것이 나온다고 해도 그것이 구원의 표적이 될 수 없는 것은 구원의 능력은 십자가에만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자 된 우리는 예수님이 생명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앞서 말한 대로 예수님이 생명이심을 믿는 신자인 우리의 영혼이 왜 배부름이 아니라 항상 주리고 목마른 상태냐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항상 믿음과 삶이 분리되어 따로 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 같기는 한데 삶은 여전히 세상을 향해서 달려가고 있음을 부인하지 못합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인간의 한계로 인정하면서 십자가를 생각하고 예수님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으로 만족하고 말까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생명의 현상은 십자가를 생각하고 예수님을 인정하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생명의 길로 이끌어 가는 것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힘써야 하는 것은 믿음과 분리되어 살아가는 것 같은 우리의 삶을 들여다보면서 주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아니면 멸망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우리의 악함을 들여다보면서 왜 예수님을 생명이라고 일컬을 수밖에 없는지 깊이 알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생명이시라는 이 사실에 마음이 동하지 않고서는 영혼의 배부름을 경험하는 길로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를 영혼의 배부름을 경험하는 길로 이끌어 갑니다. 영혼의 배부름을 맛보고 경험할수록 육신의 만족을 얻고자 하는 욕구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물론 어느 순간 또 다시 욕구에 붙들려 가는 자신을 보게 되겠지만, 그처럼 욕구에 붙들린 자신을 보게 하는 것이 주의 말씀인 것입니다.

 

 

욕구에 붙들린 자신을 보면서 주의 생명을 향한 더욱 강한 열망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고, 나의 욕구가 채워지는 세계가 아니라 주의 생명으로 내 영혼이 채워지는 영원한 생명의 나라를 소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썩을 양식과 생명의 양식을 구별하여 살아갑니다. 썩을 양식의 헛됨을 알기에 생명의 양식에 마음을 두게 됩니다. 그리고 생명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영혼의 배부름을 배우고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를 소망하며 살아가는 신자에게서 증거되는 구원의 표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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