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
2011.04.10 17:11

(성령 12강) 성령과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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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요 2:27-29http://onlycross.net/videos/spirit/jo1-022729.mp4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27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28 자녀들아 이제 그의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 바 되면 그가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

29 너희가 그가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

 

 

<설교>

현대 교인들은 신앙을 개인적인 경험을 토대로 확인하려는 경향이 많습니다. 때문에 개인적인 경험이 있는 사람이 없는 사람보다 더 신앙의 측면에서 우월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고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체험이 있는 신앙을 추구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성령에 대한 문제가 있습니다. 물론 체험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성령은 왜곡될 수 밖에 없습니다. 마치 성령이 오신 것이 개인적 경험을 주기 위해서인 것으로 오해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물론 성령이 오심으로 신자는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성령의 다스림을 받고 살아가는 새로운 세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성령 받은 신자에게 있는 새로운 경험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다스림을 받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함께 하는 것이 교회이기 때문에 교회는 세상의 집단에서 나타날 수 없는 특이한 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교회 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7절에 보면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언급한 기름 부음이라는 말은 구약적인 용어입니다. 구약에서는 왕이나 제사장을 기름을 부어서 세우는데 기름 부음을 받는다는 것은 그 사람이 거룩한 존재가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거룩한 일에 거룩하게 쓰시는 사람으로 부르셨다는 뜻으로 기름을 붓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한다’는 것은 거룩하신 주께서 우리를 쓰시기 위해 거룩한 사람이 되게 하시고 부르셨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이 성령 받은 신자입니다.

 

 

기름 부음은 성령 받음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목사에게 국한 된 용어가 아닙니다. 즉 신학교를 졸업한 목사가 안수 받는 것을 성경이 말하는 기름 부음으로 이해하는 것은 완전히 잘못된 생각인 것입니다.

 

 

기름 부음을 받은 자는 하나님이 쓰시기 위해 부르신 도구이기 때문에 그의 모든 삶은 하나님에 의해 주도됩니다. 이것이 성령 받은 신자입니다. 따라서 성령을 받은 신자가 알게 되는 것은 자신의 삶이 하나님의 뜻에 의해 주도되어 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새로운 삶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령이 그 안에 거하는 사람은 아무도 가르칠 필요가 없다고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또 성령은 참되고 거짓이 없으신 그리스도의 영이기 때문에 성령이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는 그것이 곧 생명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같은 말씀을 잘못 이해하면 목사나 그 누구의 가르침도 받을 필요 없이 자신이 알고 있는 바를 성령이 가르치신 것으로 믿고 그대로 살면 된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의 관계가 아닌 조각조각 흩어져 있는 개인으로만 존재하게 됩니다. 누구의 말도 거부한 채 서로가 자신의 앎만 고집한다면 다툼과 충돌만 있을 뿐 용서와 섬김은 기대할 수 없게 됩니다.

 

 

‘아무도 가르칠 필요가 없다’는 사도의 말은 성령이 함께 한 신자는 성령의 주도를 받으며 생명으로 이끌림 받기 때문에 이 생명의 사건에 그 어떤 사람의 말도 개입될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 어떤 사람의 말도 누군가를 생명으로 인도하는 능력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목사가 설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만약 목사의 설교의 내용이 복음이라면 그것은 목사의 말이 아니고 사람의 가르침도 아닙니다. 성령이 목사를 복음을 전하는 도구로 삼았고, 목사는 성령의 다스림에 순종됨으로써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목사의 말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이 되는 것이고, 그 말씀이 능력이 되어서 생명으로 인도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의 사건은 오직 성령의 간섭과 주도로써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로 ‘아무도 가르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누가 누구를 가르치고 다스리는 관계에 있지 않습니다. 목사를 교인을 가르치는 사람으로 여기는 것도 잘못된 생각입니다. 목사와 신자가 가르치는 자와 가르침을 받는 자로 만난다면 동일한 관계에서의 만남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가르치는 자는 스승이고 가르침을 받는 자는 제자라는 관계가 발생 되버리기 때문입니다. 결국 목사는 교인을 가르치는 자로써 복과 구원을 받게 하는 사람으로 인식되고, 교인은 목사에게 종속 되버리는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성령 받은 신자는 아무도 가르칠 필요가 없다는 것은 성경에 대해 모든 것을 통달했기에 들을 필요도 배울 필요도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러한 생각이 추호라도 있다면 그것은 기름 부음이 거하는, 즉 성령을 받은 신자가 함께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목사가 설교를 하고 여러분이 함께한 자리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얘기를 나누는 것들은 우리가 함께 복음적으로 살아가는가를 확인하는 기회로 삼을 수 있어야 합니다. 누가 하는 말이든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말이라면 그 말은 사람의 말이 나닌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신자에게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말씀에 의해서 자신을 보게 되면서 과연 내가 말씀대로 복음적으로 살아가고 있는가를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름 부음이 거하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사람의 말의 능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 받은 신자는 아무에게도 가르침을 받지 않습니다. 참되고 거짓이 없으신 성령이 우리를 가르치시고 주 안에 거하게 하시며 그것으로 신자는 생명에 거하게 됨을 의심없이 믿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체제는 많이 아는 사람이 알지 못한 사람보다 더 우월한 위치에 있게 되고 그것이 높고 낮음의 구별로 드러납니다. 하지만 성령의 간섭으로 살아가는 새로운 세계는 앎이 높고 낮음의 구별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신자의 앎은 지식이 아니라 성령으로 인한 깨달음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수고와 재능의 결과가 아니라 성령으로 인한 은총이기 때문에 깨달음의 차이가 높고 낮음의 구별로 드러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네가 뭔데 나를 가르치려고 하느냐?’라는 말도 통용될 수가 없습니다. 누군가의 말을 자신을 가르치는 말로 듣는 것이 잘못된 것이고 누군가를 가르쳐서 알게 하려는 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우리의 실력이 아니고, 믿음의 길을 가는 것 역시 우리의 실력이 아니라 성령의 간섭과 주도로 인한 열매임을 믿는다면 신자는 믿음에 대해서든 앎에 대해서든 자신을 드러낼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가 모인 교회라면 신앙의 문제에 대해서는 모두가 무능한 존재임을 알기 때문에 차별은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교회로 모이는 것은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세워서 내게 듣게 하신 그 말씀으로 내가 과연 그리스도 안에서 복음으로 살아가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임을 잊지 마십시오. 이러한 생각이 여러분께 살아있음으로 인해서 누구의 말을 듣는다고 해도 그 말이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것이라면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기 위해 엔게디 광야로 갔을 때 뒤를 보기 위해 굴에 들어간 적이 있습니다. 그 굴 깊은 곳에는 다윗과 그 일행이 숨어 있었는데, 다윗의 일행은 다윗에게 하나님이 주신 좋은 기회이니 사울을 죽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다윗은 사울의 옷자락만 잘라 놓고도 그것으로 마음이 찔립니다. 사울이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것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기름 부으셨으니 하나님이 책임지신다는 것이 다윗의 생각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교회는 인간대 인간의 관계로 만나지 않습니다. 성령이 함께하고 성령이 주도하는, 즉 하나님이 책임지고 계시는 사람들의 만남입니다. 이러한 만남에는 누군가가 나에게 해를 입혔다고 해도 그를 심판할 자격이 내게는 없게 됩니다. 서로를 성령의 주도로 살아가는 지체로 바라볼 수 있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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