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
2011.05.01 14:03

(성령 15강) 성령과 행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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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3:1-3http://onlycross.net/videos/spirit/gal-030103.mp4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2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3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설교>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세상에서는 하루에도 셀 수 없을 만큼의 수많은 사건들이 일어납니다. 하지만 십자가 사건보다 존귀하고 신비한 사건은 없습니다. 이처럼 존귀한 십자가 사건에 대해 사도 바울은 ‘십자가 외에 아무것도 알지 않기를 원한다’는 말을 했고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는 말로써 그의 인생의 중심에는 오직 십자가만이 존재함을 증거합니다.

 

 

그래서 사탄은 신자로 하여금 인생의 의미를 십자가가 아닌 다른 것에 두도록 항상 유혹합니다. 십자가를 알되 십자가는 구원의 용도로만 여길 뿐, 세상을 사는 인생의 의미는 다른데 있음을 바라보게 합니다. 즉 십자가를 말하되 십자가가 전부가 아닌 인생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탄의 유혹에 의해서 입으로는 십자가를 말하되 인생은 십자가와는 상관없는 다른 길로 가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입니다.

 

 

1절에 보면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라고 말합니다.

 

 

사도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이 말을 할 때는 십자가 사건이 있은 지 벌써 수십 년이 지난 후입니다. 어떤 사건이든 발생한지 수십 년이 지났다면 사람들의 기억에서 희미해지기 마련인데 십자가 사건은 수십 년이 아니라 수천 년이 지난다고 해도 오늘 내게 일어난 생생한 사건으로 다가온다는 것이 신비합니다.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인다고 말씀합니다. 앞서 말한 대로 십자가 사건이 있은 지 수십 년이 지난 사람들에게 십자가를 눈앞에 밝히 보이는 현재의 사건으로 말하는 것은 십자가 사건이 개인에게 일어난 어떤 사건처럼 어느 시간에 고정되어 과거로 흘러가 버리는 것이 아님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십자가 사건은 과거를 회상하듯 회상하면서 묵상하는 차원의 사건이 될 수 없습니다.

 

 

사도가 갈라디아서를 기록할 당시 기독교는 유대교에서 독립된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이 말은 복음을 받아들인 많은 사람들이 유대인들이었고, 유대인들은 율법을 중요하게 여기고 전통시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비록 복음을 받아들였다고 해도 유대교 전통인 율법에서 완전히 벗어난 상태가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때문에 초기 기독교에는 예수를 믿은 후에도 여전히 율법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갈라디아를 떠난 후에 율법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들어오게 됩니다. 그들은 믿는 것만으로는 안되고 행함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친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잘못된 주장으로 인해 교회에 바울이 전한 복음만으로는 안되고 행하고 실천하는 것이 있어야 참된 신앙인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게 된 것입니다.

 

 

이들도 더 잘 믿고 싶은 마음에 율법주의자의 말을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더 잘 믿는다는 것은 뭔가 달라지는 것이 있다는 뜻이고, 사람이 달라졌다는 것은 가만히 있으면 안되고 행함과 실천을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연히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된 것입니다.

 

 

이들이 율법에 귀를 기울인 이유는 의로운 인간으로 격상되는 것에 관심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효능은 인간을 경건한 자로 보이게 하는 것입니다. 열심히 기도하고 선을 실천하려고 애를 쓰는 그 모든 수고와 노력은 ‘신앙이 좋다’라는 평가를 불러내게 됩니다. 하지만 가만히 있는 사람을 향해서는 그런 말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신앙이 나태하다’는 질책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가치를 격상시키는 데는 율법을 실천하고 행하는 것이 최선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누구든 자신의 존재 가치를 격상시키는데 마음을 둔다면 율법을 외면할 수 없게 됩니다. 믿음만으로는 안 될 것 같은 착각과 불안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이것이 눈앞에 밝히 보이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지 않고 자기를 바라보게 하는 꾀임에 넘어가는 것입니다.

 

 

교회에 문제가 계속 발생하고 여러 가지 일로 시끄러울 때 ‘이것은 십자가만 주장하고 행함을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이다’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말이 사람의 귀에 아주 그럴듯하게 들린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믿음으로 모인다면 문제가 없어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교회의 교회됨의 의미를 아무런 문제없이 서로 사랑하면서 잘 지내는 것에 둔다면 결국 교회의 교회됨을 이루기 위해 율법적 행함과 실천이 중요한 믿음의 모습으로 부각될 수밖에 없습니다. 율법적 행함과 실천에 성실하면 교회의 문제는 사라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됨은 인간의 입맛에 맞는 교회 되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교회의 문제를 통해서 인간의 죄와 악함을 확인하는 기회로 삼으면서 구원은 오직 십자가에 흘리신 예수님의 피 밖에 없음을 깨닫는 것이 믿음이고 그 믿음이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문제없고 사랑이 충만한 교회되는 것에만 관심을 둡니다. 이런 교회를 위해서 신자는 사랑하기를 힘써야 한다고 합니다. 신자가 서로 사랑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사람의 마음에 맞는 좋은 교회를 만들기 위해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면 그것은 자기를 위한 실천일 뿐이며 그것이 곧 율법적 실천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이 믿음을 부인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도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은 합니다. 하지만 참된 믿음은 율법을 실천하는 것으로 드러난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입니다. 믿음이 있다면 선한 행위도 당연히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행함, 실천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는 윤리적으로 살 필요가 없다는 말도 아닙니다. 문제는 윤리와 도덕적인 행함과 실천을 믿음의 증거물로 여기는 것입니다. 행함을 믿음의 증거물로 여기면 결국 행함이 기준이 되어 믿음을 평가하게 됩니다. 이것이 복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자는 행함과 어떤 관계에 있는 것입니까? 갈 6:7-10절을 보면 사도는 선을 행하라고 합니다. 이 말은 겉으로 보면 선을 행할 것을 강조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윤리와 도덕적 실천을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성령을 위해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둔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뒤에 선을 행하는 문제가 나옵니다. 바울의 이 말은 선을 행하는 것을 인간의 도덕과 윤리에 의한 실천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함께 하는 결과로 여기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선을 실천하고 착한 사람 되어서 신자답게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받은 신자로써 자연히 선과 착함이 있게 됨을 말하는 것입니다.

 

 

신자에게 행함은 성령이 함께 함으로써 나타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육체로 행하는 것과 성령으로 행하는 것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육체로 행하는 것은 자신을 위한 행함을 말합니다. 착한 사람이 되기 위해 착한 일을 하는 것이고, 믿음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열심히 기도하는 것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복을 받기 위해서 행하는 모든 것들도 육체로 행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행함에 붙들려 있는 것이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보지 않는 것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인간은 해체 대상일 뿐입니다. 인간의 의와 가치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스스로 가치 있는 인간으로 격상되기 위해 행하는 것이라면 그 행함이 어떤 선의 모습을 입고 있다고 해도 육체로 행하는 자기를 위한 악에 해당될 뿐입니다.

 

 

반면에 성령으로 행하는 것은 행함의 목적이나 의미를 자신에게 두지 않습니다. 특별히 선을 행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주의 사랑을 알고 나니 죄인의 자리에서 이웃을 대하게 됩니다. 그래서 차별이 없게 됩니다. 이러한 사랑은 성령 안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날 뿐입니다. 다른 사람을 의식하지도 않고 자기 행함에 대해 좋은 평가를 받고자 하는 것도 없습니다.

 

 

신자가 십자가의 은총으로 깊이 들어가는 것이 성령의 경험입니다. 이러한 성령의 경험 안에서 신자는 참된 자유를 누립니다. 행함으로부터, 자기 의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이 자유가 있는 신자가 성령의 사람으로서 낙심하는 것이 없이 선을 행하며 믿음의 길로 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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