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
2011.05.15 16:19

(성령 17강) 성령과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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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후 3:12-18http://onlycross.net/videos/spirit/2co-031218.mp4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2 우리가 이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

13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하노라

14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15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

16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

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설교>

신자는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라는 본문의 말씀에 근거한다면 신자는 자유가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 되는데 과연 여러분은 자유가 있는 신자입니까?

 

 

자유를 말할 때 대개 생각하는 것은 행동의 자유입니다. 내 뜻대로 행동하는 것을 자유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여러분은 모두 자유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무엇을 하든 사회의 질서와 법에 어긋나지 않는다면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는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것이 자유라면 굳이 자유를 위해 성령이 함께 할 이유가 없습니다. 사회의 체제에 따라 얼마든지 가능한 자유이기 때문입니다. 즉 성령이 함께 하지 않는다고 해도 사람은 자신이 속한 사회의 체제에 따라 자유롭게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함께 함으로 가능한 자유는 행동의 자유를 말하지 않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행동의 자유자는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사회라는 울타리 안에서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이 자유를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모든 사람이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고 아무런 제약도 없이 자유롭게 살아간다면 세상은 순식간에 혼란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한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법이 존재하고 그 법에 순응함으로써 질서가 유지되고 함께 공존하는 사회가 가능한 것입니다.

 

 

이처럼 법은 정한 규정 안에서 인간의 자유를 박탈하고 있기 때문에 말 그대로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살아가는 자유자는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가 말하는 자유는 행동의 자유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사도가 말하는 자유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먼저 16절에 보면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17절에서 자유라는 말을 하고 다시 18절에서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라는 말을 합니다.

 

 

이것을 보면 자유는 얼굴에 수건이 벗겨지는 것과 연관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얼굴에 수건이 벗겨지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아는 것이 자유의 의미를 이해하는 열쇠가 될 것입니다.

 

 

얼굴의 수건 이야기는 모세와 연관이 있습니다. 모세가 두 번째 하나님께 율법을 받아 산에서 내려올 때 얼굴에 광채가 났습니다. 그것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두려워했습니다. 모세는 자신을 두려워하는 그들을 가까이 오라고 한 후 하나님의 율법을 전하고, 율법을 전한 후에 광채가 나는 얼굴을 수건으로 덮은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는 왜 모세의 수건 이야기를 하면서 자유에 대해 말하는 것일까요?

 

 

당시 고린도 교회에는 사도 바울을 반대하는 세력이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들에게 사도 바울은 최고의 사도로 추앙받고 있지만 당시에 사도 바울의 입지는 아주 좋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 직접 부름을 받았고,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가르침을 받았으며,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과 부활을 직접 목격하고 체험한 사람들인 반면에 사도 바울은 신자를 잡아 가두고 죽임으로써 예수님을 핍박했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외적인 조건으로 평가하자면 바울보다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더 정통적인 사도로 그 권위를 인정받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에 권위를 인정받은 사도로부터 추천서를 받은 사람들이 들어옵니다. 그리고 바울의 가르침과는 다른 말을 합니다. 결국 고린도 교회는 바울보다는 추천서를 가지고 온 사도의 말을 더 신뢰하게 된 것이고, 이런 입장에 있는 사도가 자신의 사도성에 대한 말을 하는 것입니다.

 

 

1절에 보면 바울은 종이에 기록한 추천서가 꼭 필요하냐는 말을 합니다. 그리고 3절에서 사람이 종이에 쓴 추천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영으로 고린도 교회 신자들의 마음에 쓴 추천서가 있다고 합니다. 종이에 쓴 추천서는 돌 판에 쓴 것이고 영으로 쓴 추천서는 마음에 쓴 것이라고 합니다.

 

 

돌판은 율법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바울이 율법이 기록된 돌판을 종이에 쓴 추천서에 빗대어 말하는 것은 당시 고린도 교회가 예루살렘의 사도에게 받은 종이에 쓴 추천서를 보고 그들을 신뢰하는 것이 마치 돌판에 기록된 율법을 신뢰하는 것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신뢰했습니다. 때문에 율법을 실천함으로써 복을 얻고 의롭게 된다는 것이 유대인들의 믿음이었습니다. 이러한 믿음의 유대인들에게 신앙은 자연히 행하는 것이었고 지키는 것이었으며 눈에 보이고 확인되는 것으로 이해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유대교의 관습에 여전히 매어 있던 당시 신자들은 기독교 신앙을 눈에 보이고 확인되는 것으로 이해했던 것입니다. 믿음은 지키고 행하는 것으로 드러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예루살렘 사도가 발행한 추천서를 신뢰함으로써 추천서가 없는 바울의 사도성에 대해서는 의심을 갖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뭔가 문제가 있으니까 추천서를 받지 못한 것이 아니냐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바울은 돌판이 아니라 마음판을 말합니다. 돌판에 쓴 것은 보이지만 마음판에 쓴 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따라서 바울이 말하는 추천서는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고 볼 수 없는 이 추천서를 누가 확인할 수 있겠습니까?

 

 

어찌 보면 바울의 이 말은 추천서가 없는 자신의 약점을 가리고 정당화하기 위한 말장난으로 비춰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에게는 종이에 쓴 추천서를 신뢰하고 그것으로 사람을 평가하고 판단하는 것은 보이는 것에 매인 비신앙적인 모습이었을 뿐입니다.

 

 

이처럼 종이에 쓴 추천서를 근거로 해서 바울의 사도성을 의심하고 반대하면서 바울이 증거한 복음까지 의심하게 하는 그들이야 말로 수건이 그 마음을 덮은 자로 율법을 읽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모세의 얼굴에 광채가 난 것은 그가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광채를 통해서 모세를 두려워 할 것이 아니라 모세가 가지고 온 돌판에 쓰인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해야 했습니다. 모세의 광채는 돌판의 율법이 모세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엄중하신 말씀임을 가리키는 증거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백성들은 모세의 얼굴에 나타난 광채를 두려워했습니다. 모세의 얼굴에 광채가 난다고 해서 모세가 하나님이 된 것이 아니고, 광채가 영원할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백성들은 자신들의 눈에 보이는 광채에 매인 것입니다. 이처럼 보이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 곧 보이는 것에 매인 것이 됩니다.

 

 

그래서 모세는 얼굴을 가림으로써 백성들로 하여금 보이는 것에 주목하지 않도록 한 것입니다. 따라서 수건으로 얼굴을 가린 것은 ‘너희는 보이는 것을 두려워하고 보이는 것을 신뢰하며 살아가는 자들이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들이 구약을 읽을 때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하고 모세의 글을 읽을 때 수건이 그 마음을 덮은 상태라는 것은 보이는 것을 신뢰하고 보이는 것으로 확인하려고 하는 그들의 잘못됨을 지적하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종이에 쓴 추천서 하나로 사도성을 평가하고 의심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주의 영이 계신 곳에 자유가 있다는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주의 영이 계시면 더 이상 보이는 것에 매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즉 신자에게 자유는 보이는 것에 매이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에 소망을 두고 사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 때문에 흔들리지 않는 것이 진정한 자유자입니다. 이러한 자유자는 성령이 함께 함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신자는 착한 행동을 함으로써 신자 됨을 보여주고 확인시켜 주어야 할 사람이 아닙니다. 율법에 매인 사람에게는 자유가 없습니다. 항상 뭔가를 행하고 보여줌으로써 자신의 믿음을 확인해야 하기 때문에 행함과 실천이라는 짐을 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짐을 수고하고 무거운 짐으로 말씀하셨고 쉼을 위해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보면 그리스도 안에서의 쉼은 무거운 짐이 없는 자유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자유가 성령이 함께 하는 여러분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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