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
2011.06.05 17:59

(성령 20강) 지혜와 계시의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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엡 1:15-19http://onlycross.net/videos/spirit/eph-011519.mp4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5 이로 말미암아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16 내가 기도할 때에 기억하며 너희로 말미암아 감사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18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19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설교>

 

사람이 자신의 지혜로 하나님을 아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지혜에 포착되어 그 실체가 파악되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약 신자가 하나님을 안다면 하나님이 하시는 일까지도 모두 파악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면서 항상 ‘왜’라는 의문만 던질 뿐입니다. 우리의 기대와는 상관없이 되어지는 일들에서 혼란만 가중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게 하시는 분은 따로 있습니다. 17절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지혜와 계시의 영으로 오신 성령입니다. 성령만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실 뿐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성령이 알게 하신 하나님과 인간의 지혜로 접근하여 급조된 하나님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알게 하신 하나님과 인간의 지혜로 급조되는 하나님이 동일하다면 굳이 성령이 지혜와 계시의 영으로 오셔서 하나님을 알게 하시는 일을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언제나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성경이 증거하고 성령이 알게 하신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아가고자 하는 자세를 취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문제에서는 누구도 자신감을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18,19절을 보면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고 말합니다.

 

 

신자가 하나님을 알게 된다는 것을 마음의 눈이 밝아짐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마음의 눈이 밝아짐을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고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가를 알게 되는 것으로 연결하여 말합니다.

 

 

그런데 부르심의 소망, 기업의 영광,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 이 문제들이 과연 우리 마음에 얼마나 자리하고 있을까요? 단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사도가 말하는 이 문제들은 우리의 관심거리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바라는 소망과 영광과 능력은 다른데 있습니다.

 

 

나와  연결된 소망이고 영광이며 능력입니다. 세상에서 나라는 존재를 가치 있게 높여 줄 수 있는 것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며, 내가 영광을 얻고 그러한 능력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원하는 그 모든 것을 이뤄주시는 분으로 바라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부르신 신자에게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도하고자 하시는 길이 따로 준비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깨달은 신자는 새로운 소망과 영광과 능력을 구하게 되고 그것이 하나님을 알게 된 신자가 살아가는 새로운 세계인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예수님이 이루시는 새로운 세계에 대해 관심을 두고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세계는 세상의 일들이 내 뜻대로 되어지고, 될수록 편안한 인생을 누리고 살다가 천국 가는 것이지 사실 예수님이 이루시는 새로운 세계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이런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세계를 알게 하시기 위해 지혜와 계시의 영으로 성령을 보내신 것입니다.

 

 

욥 38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세상일에 대해 욥에게 묻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 물음은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를 시작으로 세상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들에 대해 물으십니다. 그런데 주지해야 할 내용은 하나님께서 물으신 것이 사람들이 평소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던 문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욥에게 산 염소가 새끼 치는 때를 아는지 물으시고 암사슴이 새끼 낳는 것을 본 적이 있는지도 물으십니다. 또한 그것이 몇 달 만에 만삭되는지, 그 낳을 때를 아는지도 물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이런 질문을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욥은 고통을 받고 있는 자신의 문제에서 하나님을 생각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자신이 고통을 받아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욥은 하나님을 자신을 위한 분으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죄를 범하지 않고 의롭게 살아가면 고통과도 상관없이 살게 하실 것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욥을 위해 존재하시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의 모든 만물을 위해 존재하시는 분이었습니다. 산 염소나 암염소가 만삭되는 때나 새끼를 낳는 일들이 욥에게는 관심거리가 아니었고, 아예 생각하지도 않는 문제들이었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먹이시고 입히시며 보존하셨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욥과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도 항상 내 문제에 민감합니다. 하나님도 다른 사람의 문제보다는 내 문제에 더 관심을 가져 주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나만 잘되면 된다는 사고방식입니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살든 사실 관심 밖에 두고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내가 관심 두지 않는 사람들도 하나님이 살리십니다. 관심 두지 않고 있는 세상의 모든 문제도 하나님이 다스리고 계십니다.

 

 

우리의 생존에 소중한 것은 햇빛과 물과 공기입니다. 이 모든 것을 공급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지만 우리는 그러한 것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그런데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가 원하는 대로 내 문제에만 관심을 두신다면 우리의 생존은 어떻게 될까요?

 

 

생명의 문제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우리는 생명의 문제에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고 삽니다. 생명의 문제보다는 먹고 사는 문제가 더 중요하고 자식 문제가 더 급할 뿐입니다. 생명의 문제를 들고 하나님을 찾기 보다는 먹고 사는 문제로, 자식 문제로 하나님을 찾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자기 문제에 관심을 가져주실 것을 원합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의 바람대로 하나님께서 우리 문제에만 관심을 가지신다면 생명의 문제는 어떻게 될까요? 그렇게 보면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들은 우리의 관심과는 상관없이 오직 하나님의 관심에 의해 되어지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되어지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감사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관심을 갖고 있는 문제에 하나님이 관심을 가져주지 않으신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내가 관심 두고 있는 문제를 구하면 하나님도 관심을 가지시고 도와주실 것이라고 여긴다면 그것은 성령이 알게 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이 지혜에 의해 만들어진 가짜 하나님일 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소망을 가지고 스스로 하나님을 찾은 것처럼 생각하지만 그것은 우상일 뿐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찾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끝까지 자신이 하나님을 찾은 목적만을 생각하는 그것이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기에 우리가 하나님께 나오게 되었음을 생각한다면,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나를 마음에 두는 것이 아니라 나를 부르신 하나님의 뜻에 마음을 두는 것이 됩니다. 이것이 새로운 세계를 살아가는 것입니다.

 

 

영광 또한 우리가 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고자 하신 것이 따로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기업의 영광입니다. 이러한 새로운 세계를 살아갈 때 ‘나’는 자연히 포기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내 뜻보다는 나를 부르신 하나님의 뜻이 더 존귀함을 알기 때문에 그 뜻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하게 됩니다. 이러한 신자 됨을 위해 성령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으로 오신 것입니다.

 

 

성영이 오심으로 영적인 눈이 열리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알 수 없기에 하나님을 믿을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서 믿는다면 그것은 잘못된 믿음일 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령은 결코 우리 욕구를 채워주기 위해서 오시지 않습니다.

 

 

우리를 전혀 관심 두지 않고 있는 문제를 다루시고 이루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자기 백성을 생명으로 인도하기 위해 성령을 보내시고 간섭하시는 우리 주 예수님을 찬송하고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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