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
2012.06.03 13:10

(구원 6강) 구원과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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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5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

6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7 혹은 누가 무저갱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8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설교>

 

구원은 예수님의 의로 이루어진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오직 그리스도의 의만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구원은 그리스도의 의로 받지만 신자가 의를 행함으로 복을 받고 나중에 천국에서 큰 상을 받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리스도의 의와 함께 인간의 의도 포기하지 않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마 인간의 의를 포기하고 그리스도의 의만 믿는다면 인간의 모든 행위를 부인해야 한다는 갈등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의 구원을 이루신 예수님을 중심으로 하는 신앙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하는 것일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구원을 자기의 행함에서 확인하려고 합니다. 행함을 제외하고는 구원을 확인할 수 있는 증거물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의 말을 인용하여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하면서 행함을 요구하고, 행함을 의로 높이며 ‘행함이 있어야 구원 받은 자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을 서슴지 않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의의 문제를 빼놓고 구원을 얘기할 수 없습니다. 구원은 분명 의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의와 인간의 의의 문제에 대해서는 분명한 답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어쩌면 여러분은 의의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분명한 답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구원은 인간의 의가 아닌 그리스도의 의로 이루어짐을 분명히 믿고 있고 인간에게서는 의가 나올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인간은 의의 문제에서는 완전히 자유를 얻은 자로 살아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인간에게서는 의가 나올 수 없음을 분명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자기 의를 추구하며 살기 때문입니다.

 

 

5절을 보면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모세의 말을 인용하며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말합니다. 그리고 그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의 의로 산다고 말합니다.

 

 

레 18:5절에 보면 “너희는 내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 나는 여호와이니라”고 말합니다. 이 규례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의가 아니더라도 구원에 이르는 길이 있습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 즉 율법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그 행함을 의로 인정하시고 살리신다는 것입니다.

 

 

율법으로 말미암은 의를 행할 때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율법을 완전히 행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백가지 율법을 지켜도 한 가지 율법을 지키지 못하면 하나님은 전부 지키지 못한 것으로 여기십니다. 즉 완벽하고 완전한 행함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흠없는 의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율법을 지키기 위해 온 힘을 다하며 산다는 말은 무의미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최선이나 노력이 아니라 흠없는 완전한 의를 요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길이 있다고 해도 모든 인간은 그 길에 실패한 자들입니다. 율법으로 인해서 스스로의 힘과 노력으로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이 자명해진 것입니다.

 

 

율법으로 인한 의는 애당초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 같은 말씀을 하시는 것은 인간이 죄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율법을 통해서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인간의 현실을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이 보내신 하늘의 의에 소망을 두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율법으로 말미암은 의에 대해 인간은 실패자이기 때문에 그 어떤 인간도 자기의 의를 내세우거나 자랑할 수 없습니다.

 

 

6절에 보면 사도는 또 하나의 의, 즉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말합니다. 이 의가 곧 우리의 구원의 근거이며 복음의 핵심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우리의 행함과는 전혀 무관합니다. 믿음은 우리가 생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총으로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믿음을 주시지 않으면 누구도 예수님을 믿을 수 없고 예수님의 의에 참여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참된 믿음의 여부는 자신의 의 없음을 고백하며 그리스도의 의를 높이는 것으로 증거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우리의 행함을 근거로 하지 않는 의라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행함의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는 것은 믿음의 열매가 곧 행함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사람을 달라지게 하고 사람의 달라짐은 행함의 변화로 나타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유대인들과 같은 율법적 사고방식일 뿐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을 말하면서도 여전히 율법의 함정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들이 ‘행함은 없어도 된다’는 말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오직 믿음만을 말하는 것에 반발하는 것입니다. 믿음만 얘기하면 안되고 믿음의 열매인 행함까지 가르쳐서 바른 행함이 있는 신자로 만들어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바른 삶을 사는 신자로 인해서 세상이 아름답게 변화하지 않겠느냐는 것이 행함에 중점을 두는 사람들의 주장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들이 모르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은 절대적으로 변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행함의 변화를 성령의 역사나 거듭남으로 말하기도 하지만 행함에 변화가 있다고 해서 죄인이라는 인간의 본질까지 변화하는 것은 아닙니다. 행함에 변화가 있다고 해도 몇 가지의 행동이 달라진 것일 뿐이지 자기 사랑으로 살아가는 존재자체는 불변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변화로 인한 세상의 변화 또한 헛된 꿈이며 망상일 뿐입니다. 인간이 변할 수 있고, 인간의 변화로 인해서 세상이 변화하여 하나님의 심판이 거두어질 수 있다면 인간과 세상은 진작 그런 변화를 보였어야 합니다. 하지만 수천 년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며 확인을 한다고 해도 그 어디에서도 인간의 변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죄성 자체가 불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한국교회는 변할 수 없는 인간을 향해서 ‘변화하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변하는 것이 믿음의 증거물인 것처럼 변화해야 한다고 외칩니다. 이것은 교회의 본분이 아닙니다. 교회는 사람을 변화시키기 위해 세워지지 않았습니다.

 

 

교회는 오직 복음의 도구로만 존재합니다. 그런데 복음이 외치는 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를 주로 시인하고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을 외치기 위해 교회가 존재합니다.

 

 

교회가 선을 행하라고 하고, 바른 삶을 살라고 외친다면 그것은 교회 스스로 예수님께 마음을 두고 있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 됩니다. 예수님께 마음을 두고 있지 않고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에 대해서도 역시 마음이 끌리지 않기 때문에 행함에 초점을 두는 말이 나오게 되는 것이고, 윤리와 도덕이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국 교인들은 일찍이 이런 설교에 아주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당연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신자가 믿음으로 살게 되면 그 삶은 반드시 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도덕과 윤리를 뛰어 넘은 달라짐입니다. 도덕과 윤리를 앞세우는 사람은 도덕과 윤리를 자신을 치장한 채 죄를 보지 않습니다. 이것이 도덕과 윤리의 함정입니다. 자신을 선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반면에 믿음은 자신에게 치장되어 있는 모든 것을 벗겨 내고 속에 감추어져 있던 죄를 보게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의를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가 삶의 중심에 자리하게 되고 그리스도가 없는 인생의 헛됨을 알게 된다면 자연히 세상이 아닌 천국을 소망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인한 달라짐입니다. 삶의 방향이 달라지고 추구하는 것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음의 열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천국에 소망을 두기 때문에 세상 것을 기준으로 하는 차별이 없게 됩니다.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차별이 없게 되고 높고 낮음의 구별 또한 없게 됩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인한 변화입니다. 믿음이 우리를 이러한 새로운 눈이 열린 자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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