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화
2012.01.22 13:12

(성화 2강) 신자의 자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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엡 4:13-16http://onlycross.net/videos/holy/eph-041316.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16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설교>

 

사도는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15절)는 말을 합니다. ‘그에게까지 자랄지라’라는 말은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가라는 뜻이기 때문에 성화를 가르치는 사람들은 신자는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자라가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닮기 위해 힘써야 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자란다’는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몸이 자란다거나 지식이 자란다는 말은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신체의 변화로 몸이 자라는 것을 알 수 있고, 공부를 함으로써 지식이 많아지는 것으로 지식이 자라는 것을 얼마든지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신자가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가는 것은 무엇으로 알 수 있을까요?

 

 

우리는 자란다는 것을 점점 더 향상되고 발전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자란다는 의미를 인격과 인품이 향상되고 신앙이 자라는 것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신자가 자기 언행에 주의하고 힘쓰면 인격과 인품이 나아지는 것처럼 느껴질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인격과 인품으로 만든다 해도 분노와 미움과 시기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우리 속에 있는 그 같은 본성들은 기회가 되면 가차 없이 그 본모습을 드러낼 것입니다. 따라서 나아지고 달라진 것처럼 보일 뿐 사람은 그대로인 것입니다.

 

 

신앙도 다르지 않습니다. 신앙이 자란다고 생각해 보십시다. 그것을 무엇으로 알 수 있습니까? 여러분은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해 오신 분입니다.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면서 과연 신앙이 자랐다고 생각됩니까? 그러면 그 기준은 무엇입니까?

 

 

결국 우리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종교적인 행동인데, 종교적 행동은 신앙의 자람으로 평가될 수 없습니다. 종교적 행동이 신앙의 자람의 기준이라면 바리새인들은 신앙의 자람에서 탁월할 사람들이라고 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 사단에게 속한 자로 규정되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자랄지라’라는 사도의 말에서 한 가지 전제되는 조건은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것, 즉 생명이 있는 것만이 자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도가 ‘자랄지라’라고 말하는 것은 ‘너희는 살아있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죽어있는 대상에게 ‘자랄지라’는 말은 무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누구도 죽어있는 대상에게 ‘자라라’는 말은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자랄지라’는 말을 듣는 것만으로 우리는 ‘복 있는 자’라는 뜻이 됩니다. 생명이 있는 자로 여김 받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가 자라야 한다’는 것에만 의미를 두려고 합니다. 그로 인해 ‘자랄지라’는 말이 부담과 짐으로 다가오는 경우도 많습니다. 자라기 위해서는 뭔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있는 자, 생명이 있는 자로 여기시는 것에 감사하고 생명이 있는 신자로 존재하는 것이 얼마나 복된 자인가를 자각하는 것으로 이 말씀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신자가 살아있는 존재임을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생명이신 그리스도가 함께 하시고 활동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스스로의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힘으로 살고 있고, 그리스도께서 영으로 우리에게 역사하시고 일하시기 때문에 우리 마음이 주를 향하게 되고 주님이 가신 고난이라는 그 길을 자신이 가야 할 길로 마음에 두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세상을 바라보기 보다는 주님이 가신 길을 바라보면서 주를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가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죽은 자에게서는 이 같은 소원이 나타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13절에 보면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라고 말합니다. 사도가 말하는 온전한 사람을 이룬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온전은 완전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즉 완전한 사람을 이루라는 뜻이 아니란 것입니다.

 

 

온전함의 의미는 생명과 연관이 있습니다. 생명이 있는 사람이 온전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생명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고 아는 것을 뜻합니다. 요 17:3절에 보면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는 말을 합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신자는 영생, 즉 생명이 있는 온전한 사람인 것입니다. 사람이 온전할 수 없는 것은 저주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주에서 벗어나 생명에 속한 자가 되었다면 그는 부족함이 없는 충만의 상태에 있는 것이고 이것을 온전의 상태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를 수 있는 사람은 온전한 사람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그리스도를 아는 일에 충만함을 이루어 갈 사람은 생명이 있는 살아있는 존재, 즉 온전한 사람 밖에 없다는 것은 당연한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신자가 그리스도를 아는 일에 충만함을 이루어 가게 됨으로써 맺어지는 열매가 있습니다. 그것을 14절에서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말합니다. 어린아이처럼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도가 말하는 어린아이는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서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는 사람을 일컫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의 귀를 즐겁게 하고 기분을 맞춰주는 말을 쉽게 받아들이며 그러한 말에 빠져서 흔들리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는 옳고 그른 것을 생각하고 판단하며 행동하지 않습니다. 어른들이 불량식품이라며 사먹지 말라는 말도 듣지 않고 달고 맛있으면 최고입니다. 내가 먹는 이 과자에 무슨 해로운 성분이 들어 있는 지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지금 당장 맛있는 것을 먹는 것으로 만족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진리에는 관심이 없고 나에게 즐거움이 되는 맛있는 것만 찾고 먹으려고 하는 현대 교인의 모습입니다.

 

 

사탄이 하와를 유혹하는 말을 생각해 보십시오. 사탄은 선악과를 먹어도 죽지 않는다는 말로 인간의 귀를 솔깃하게 합니다. 오히려 하나님 같이 된다는 달콤한 말로 인간으로 하여금 선악과에 관심을 두게 합니다. 결국 하와의 눈에 선악과는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로 보이게 되고 자기도 먹고 아담에게도 주어 먹게 합니다. 이것이 세상의 유혹입니다.

 

 

어린아이 같은 사람은 진리의 말을 듣기를 싫어합니다. 왜냐하면 진리의 말은 죄인된 우리를 아프게 하고 찔리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아프게 하는 말은 거부하고 대신 듣기에 좋은 달콤한 말에 귀를 기울이며 그런 유혹에 빠져서 세상의 풍조를 따라 요동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지 못한 상태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이 달콤하고 맛있고 즐거운 것입니까? 아닙니다. 아프고 쓰고 힘든 고난의 길입니다. 이 길을 우리에게 증거하고, 이 길에 우리의 뜻을 두게 하고, 이 길로 가게 하는 것이 진리입니다.

 

 

진리는 욕망에 이끌려서 자기를 위해 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결코 달콤하고 맛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외면하고 배척할 뿐입니다. 하지만 신자는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감으로 인해서 입에 달콤하고 맛있는 것을 좇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 되는 것을 좇게 됩니다. 때문에 달콤하고 맛있는 것을 좇는 세상의 풍조에 요동하지 않는 것입니다. 진리에 굳건히 서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자라감은 한 개인의 문제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16절에서 언급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을 자라게 하는 것이 주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야 하고 그리스도를 아는 것으로 서로 연결되고 결합되어야 합니다. 달콤하고 맛있는 것을 좇는 교회가 아니라 나를 아프게 한다고 해도 생명을 지향하는 하나 된 마음으로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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