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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 6:12-14http://onlycross.net/videos/holy/rom-061214.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2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14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설교>


로마서 6장은 ‘성화장’이라고 부를 만큼 성화에 대한 가르침으로 이해하기 좋을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흔히들 알고 있는 성화는 죄를 극복하며 선을 행함으로써 거룩한 삶을 이루어 가는 것인데, 6장을 이러한 성화 개념을 든든히 받쳐줄 만한 근거로 여기는 것입니다. 사실 6장을 읽어 보면 우리 역시 성화의 삶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내용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2절을 보면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라고 말하는데, 대개 이 구절이 신자는 죄에 대해서 죽은 자이기 때문에 죄 가운데 살면 안된다는 뜻으로 이해될 것입니다. 또 4절에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는 말씀 역시 신자는 새 생명을 얻은 존재이니 만큼 새 생명을 얻은 사람답게 선을 행하며 살아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합니다.

 

 

 

6절의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라는 말씀이나 12절의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라는 말씀 역시 죄의 지배를 받으며 죄에 끌려가는 삶을 살지 말라는 뜻으로 이해합니다. 이런 점에서 6장은 아무리 봐도 죄와 더불어 싸우고 이김으로써 죄를 범하지 않는 성화의 삶을 요구하고 있는 듯 한 내용으로 여겨질 것입니다.

 

 

 

그럼에도 6장은 다른 한편으로는 심적인 부담과 무거움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죄 가운데 살지 말고 죄의 종노릇도 하지 말고 죄가 우리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라고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의 실제는 아예 죄에 파 묻혀 있고 죄에 끌려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옳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은 과연 6장의 내용을 성화의 개념으로 얘기했을까요? 6장을 앞에서 말씀드린 것과 같은 성화의 의미로 말한 것이라면 사도 바울의 삶은 죄와 싸우며 죄를 이기는 것으로 드러났어야 합니다. 그리고 바울 또한 죄와 싸워 이겼고 죄의 종노릇을 하지 않았다는 신앙고백을 했어야 합니다. 하지만 바울의 고백은 전혀 다릅니다.

 

 

 

바울은 7:15절에서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고 고백하고 19절에서도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라고 말합니다. 이 내용을 보면 바울은 죄의 종으로 죄에게 끌려가는 자기 현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6장의 내용과는 연결되지 않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자신의 문제로만 여기는 것이 아니라 항상 자기 자신에게 모든 관심을 기울이고 살아가는 보편적 인간의 문제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신자로서 신자이기 때문에 당연히 원할 수밖에 없고 또 원하게 되는 선을 따라가지 못하고 대신 원하지 않는 악을 따라가는 것을 보니 결국 자기 안에 자신을 주장하는 다른 권세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권세가 자신을 속이고 사망으로 이끌어 가는 죄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인간이 당면하고 있는 죄의 문제이고, 이 문제를 스스로의 힘으로 극복할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그렇게 하지 말아야지’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드러나는 것은 하지 말아야 할 그것, 즉 죄의 모습인 것입니다. 이것이 죄의 권세입니다.

 

 

 

이처럼 죄의 권세에 종속되어 있는 인간의 현실에 대해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7:24)는 말로 깊이 탄식 합니다. 바울의 탄식은 인간의 절망적인 상황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죄를 이길 수 없고 죄의 종이 되어 죄에게 끌려가 결국 죄의 삯인 사망에 이르는 것이 인간의 실체라면 인간은 참으로 절망적인 존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말을 자칫 죄에 대한 숙명론으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하면서 죄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이러한 의도로 죄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죄와 관계된 인간의 현실을 정확히 사실적으로 말함으로써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한 풍요로운 생명의 세계로 우리를 이끌고자 하는 것이 사도 바울의 의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씀 드린 것처럼 죄는 우리가 극복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우리가 그 어떤 수준의 윤리와 도덕을 동원하고 양심과 의를 동원한다고 해도 죄는 우리가 극복하거나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해결의 길은 단 하나입니다. 그것은 죄의 권세와 상관이 없는 세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즉 우리를 사망으로 이끌어 가는 죄의 권세와 연결된 고리가 끊어지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죄에 대해 죽은 것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11절의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라는 내용은 이러한 의미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죄에 대해 죽었다’는 것을 죄를 범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죄와의 관계가 끊어졌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죽음은 모든 관계의 단절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은 죄와의 관계가 단절되었다는 뜻이고, 죄와의 관계가 단절되었기에 죄의 권세인 사망과도 단절된 것이 새 생명을 얻은 신자라는 것입니다.

 

 

 

대신 신자는 하나님에 대해 살아 있는 자입니다. 살았다는 이 말 역시 관계적인 의미로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단절되었던 관계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회복되어 하나님에 대해 산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생명에 속한 자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죄 문제의 해결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죄와 싸워서 이겨야 하는 사람이 아니라 죄와 상관이 없는 세계에 들어와 있는 사람인 것이고, 죄와 상관이 없다는 것은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죄의 삯인 사망과 상관이 없는 세계,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은총의 세계에 들어와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이며 바울은 우리를 이러한 은총의 세계를 풍성히 누리는 길로 이끌고자 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죄의 권세에 속하지 않고 생명에 속해 있습니다. 그래서 신자는 은혜 아래 있기 때문에 그 삶은 몸의 욕망을 따름으로 그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내어 주는 것이 아니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는 말을 합니다(12,13절). 신자가 죄를 멀리하고 죄와 싸우면서 살아야 하는 것은 더 이상 언급하거나 강조할 필요가 없는 당연하고도 중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로서는 항상 실패를 맛볼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바울이 몸의 욕망을 따르지 말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몸으로 죄를 짓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의 단번에 죽으신 은총으로 말미암아 죄에서 해방되어 생명에 속한 자가 되었고 은혜 아래 있게 된 신자답게 현재에 집착하지 않고 장차 이루어질 생명의 세계에 소망을 두라는 뜻입니다.

 

 

 

몸은 항상 현재의 것을 추구합니다. 이것이 욕망입니다. 하지만 은총의 세계를 알게 되면 현재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될 생명의 나라가 소망으로 자리하게 됩니다. 이것이 현재를 초월하는 삶이고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않는 것이며, 지체를 불의 병기로 죄에게 내어주지 않는 것입니다.

 

 

 

은혜 아래 있고 은혜의 풍성함을 알고 누리는 신자라면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않는 믿음의 길을 가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현재에 집착하지 않고 새 생명의 나라에 소망을 두는 것입니다. 이것이 나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6장의 내용은 죄를 이기고 극복함으로써 거룩한 삶을 이루어야 하는 성화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는 죄에 대해 죽었고 하나님에 대해 살았다는 것으로 이미 거룩함에 속한 자가 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이루어야 할 거룩의 수준은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거룩의 세계에 속한 자로써 또한 은혜 아래 있는 신자로써 여전히 죄에 끌려가는 자신을 바라보고 애통해 하고 회개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가를 깊이 실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에 대한 집착은 희미해지고 오직 영원한 생명의 나라에 대한 소망이 선명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생각할 수 있는 참된 성화의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자가 자신을 죄에게 내어 주는 것은 예수님의 단번에 죽으심으로 하나님에 대해 산 자가 된 은혜를 잊은 채 세상의 것을 이루기 위한 몸의 욕망을 따라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극복할 수 없는 죄의 현실에서 그리스도의 은총이 어떠함을 알아가야 합니다. 은총을 알수록 여러분께는 새 생명의 세계가 풍성히 열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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