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
2011.02.06 17:58

(성령 4강) 성령을 받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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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19:1-7http://onlycross.net/videos/spirit/act-190107.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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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2 이르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르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

3 바울이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니라

4 바울이 이르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5 그들이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6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7 모두 열두 사람쯤 되니라

 

 

<설교>

바울이 에베소에서 12명 쯤 되는 어떤 제자들을 만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라고 묻습니다. 아마 우리 같으면 성령을 받았다든지 아니면 받지 못했다든지 그도 아니면 모르겠다고 답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제자들은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고 합니다.

 

 

즉 성령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들의 대답은 참으로 예상 밖입니다.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는 제자가 성령에 대해 듣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한다는 것은 우리의 상식으로는 납득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들이 성령에 대해 듣지 못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바울의 질문은 성령을 받았는지 확인해서 받지 못했으면 성령을 주겠다는 의도가 아니라 성령을 알지 못하는 그들의 실상을 드러내고 신자는 성령의 도우심과 다스림 아래 있음을 전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성령이 계심을 듣지도 못한 그들에게 바울은 다시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라고 묻자 ‘요한의 세례’라고 답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을 뿐이라는 것과 자기 뒤에 오시는 분을 믿으라고 했다는 것, 또 믿으라고 한 그 분이 예수라는 것을 전하고 그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자 성령이 임하고 방언을 하며 예언을 하게 됩니다.

 

 

이 같은 내용을 보면서 대개 사람들은 안수를 받음으로 성령을 받고 그 증거로 방언과 예언을 하게 되는 것에 초점을 두기 십상입니다. 그리고 이런 내용을 토대로 해서 마치 자신이 성령을 줄 수 있는 것처럼 망언을 일삼고 설치는 사기꾼도 있습니다. 하지만 본문은 전혀 그런 내용이 아닙니다.

 

 

1절을 보면 아볼로란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본문 내용을 보면 이야기 전개상 아볼로란 사람이 등장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라고 언급한 후에 성령에 대한 바울의 질문이 등장하는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18:24,25절에 보면 아볼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볼로는 언변이 좋고 성경에 능통한 자라고 되어 있습니다. 당시 성경은 구약 밖에 없었으니까 구약성경에 능통했다는 뜻이 됩니다. 아볼로가 일찍이 주의 도를 배워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고 가르쳤다는 것을 보면 아볼로는 단지 성경을 외우고 잘 아는 수준의 능통이 아니라 성경이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음을 알고 예수님에게 초점을 두고 성경을 이해했다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언변이 좋고 성경에 능통한 아볼로가 예수에 관한 것을 가르칠 때 그 영향을 받은 자가 있게 된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24절에 보면 아볼로가 에베소에 간 적이 있고 에베소에서 아볼로의 가르침을 따라 예수를 믿게 된 사람들 가운데 바울이 만난 12사람쯤 되는 제자도 포함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문제는 아볼로도 요한의 세례만 알았다는 것입니다. 요한의 세례만 알고 있는 아볼로의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에 그들이 성령에 대해 듣지 못한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예수님의 세례와 연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1절에서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라는 말을 언급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시 아볼로는 성령을 받았을까요? 받지 못했을까요? 얼핏 ‘성령을 알지 못한 사람을 성령 받았다고 할 수 있느냐?’라는 생각이 떠오르기도 하겠지만 그러면 성령이 있음을 아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성령을 받았다고 할 수 있는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아볼로가 성령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주의 도를 배우고 예수에 관한 것을 알고 가르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아볼로가 비록 성령에 대해 알지 못하고 있었다고 해도 성령이 그에게 함께 했고 성령이 그로 하여금 주의 도를 깨닫게 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성령을 알지 못한 아볼로였기 때문에 자신이 어떤 다스림과 가르침 아래 있는지를 생각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을 받아야 한다는 것에만 치중하지만 중요한 것은 성령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부터 이미 생명사건에 개입하신 영이라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성령을 알고 알지 못한 것과 상관없이 또한 성령을 받았는지 받지 못했는지 알지 못하는 상태라고 해도 성령은 존재하시고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왜 굳이 ‘성령을 받았느냐’라고 묻는 것일까요? 이유는 당시 사람들이 요한의 세례에 대해 오해를 했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베풀면서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고 했습니다. 즉 요한이 세례를 베푼 것은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게 하기 위함이고 회개는 곧 요한의 뒤에 오시는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요한의 세례는 그 의미가 오해되어 있었습니다. 요한의 세례는 그 중심을 회개에 두고 있는데 회개의 의미가 정직하고 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것으로 오해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를 믿는 믿음은 바르고 정직한 삶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항상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마땅한 삶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예수님이 토대가 되는 참된 복음이 아니었습니다. 세례든 회개든 모든 것은 신자를 예수께로 인도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복음이 신자를 변화시키는 것은 맞지만 그 변화는 마음의 중심이 그리스도께로 향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에 의한 참된 회개며 신자에게 있어야 할 참된 변화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의 세례만 아는 사람들은 자신이 변화해서 변화된 자신을 도구 삼아 예수를 전하려고 합니다. 그것이 예수가 아닌 요한의 세례에 매어 있는 것입니다. 요한의 회개도 세례도 그리스도를 믿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그 같은 사실을 전하기 위해 ‘성령을 받았느냐’라는 물음을 던진 것입니다.

 

 

때문에 사도의 물음을 우리가 다른 사람이 성령을 받았는지를 확인하려는 의도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당신은 성령 받았습니까’라는 전혀 불필요한 말을 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구원의 길은 인간의 개혁과 변화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것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가신 길을 내가 가야 할 길이며 운명이라고 받아들이고 주를 믿는 것이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도 당시처럼 방언과 예언을 해야 성령 받은 증거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또한 가슴이 뜨거워지거나 불을 받아야 성령 받았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성령은 그러한 현상에 매이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성령이 그리스도의 영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으로 오신 분이기 때문에 성령이 임한 신자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은 우리의 모슨 소망과 마음이 그리스도께로 집중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한 생명에 마음을 두고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리고 죄의 용서는 곧 하늘의 생명에 참여하게 되었음을 뜻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로 인해서 사망에 처한 우리가 건짐을 받은 것입니다. 이것이 생명 사건이고 이 생명 사건 안으로 우리를 인도하여 그리스도로 인해 기뻐하는 자로 살게 하기 위해 성령이 오신 것입니다.

 

 

신자는 정직과 윤리적인 면에서 세상으로부터 비난을 받을 일이 없어야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도덕성을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닙니다. 만약 도덕성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면 복음의 본질과 상관없는 착함에 지나지 않습니다.

 

 

믿음만 가지고는 안되고 사람이 변화되고 개혁되면서 도덕성과 정직성이 회복되어야 예수를 믿는 것이라고 여긴다면 그것은 요한의 세례에 머물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이 지향하는 바가 아닌 것입니다.

 

 

성령은 오직 그리스도만을 지향합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은 신자는 자신의 도덕성과 정직성에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의에만 초점을 두게 됩니다. 때문에 우리가 무엇에 머물고 있고 무엇을 바라고 사는가를 ‘성령을 받았는가?’라는 질문으로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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