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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16:6-10http://onlycross.net/videos/spirit/act-160610.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6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7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8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9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10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설교>

신자는 성령의 일하심을 믿습니다. 그런데 대개 신자가 생각하는 성령의 일하심은 우리의 신앙을 돕는 것이고,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깨닫게 하고, 성경 말씀을 알게 하는 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물론 그 모든 것이 성령의 일하심에 해당되는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본문을 보면 성령이 일하심에 대한 다른 면을 생각하게 됩니다.

 

 

6절을 보면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라고 말합니다.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게 못하게 하시자 사도는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려고 애를 씁니다. 하지만 그것도 성령이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밤에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고 청하는 환상을 보게 되고 결국 마게도냐로 가서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이러한 내용이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 것은 사람이 어디로 가서 복음을 전하고자 계획을 세우고 가고자 힘쓴다고 해도 결국 가게 하시는 분은 성령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은 우리의 뜻과 계획을 도우시는 분으로 함께 하시고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뜻을 가지고 일하시고, 우리는 그 뜻에 따라 일하는 도구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시아로 가고자 하는 것은 사도의 뜻이었습니다. 하지만 성령은 사도를 마게도냐로 보내고자 하셨습니다. 때문에 바울의 길은 막혔던 것이고, 결국 환상을 통해서 마게도냐로 가서 복음을 전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성령의 일하심이 쉽게 이해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도가 아시아로 가고자 했던 것도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위한 길이라면 분명 하나님의 뜻이고 정당한 일이며, 정당한 일이기에 성령이 도우신다는 것이 우리의 생각입니다. 그런데 성령은 복음을 전하기 위한 사도의 발길을 막으시고 다른 쪽으로 돌려서 성령이 원하는 곳에 복음을 전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 전하는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생각합니다. 맞습니다. 복음이 전해지는 것은 하나님이 뜻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복음 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명분 아래 복음을 전하기 위해 활동하는 인간의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과 일치된 정당한 행동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한 일이라면 어떤 것도 괜찮고 양해되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반대하는 지역에 들어가서 선교 활동을 하는 것도 정당한 것이며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이라고 여기고 감행합니다. 복음 전파라는 명목 아래 절에 들어가서 예수를 믿으라고 외치기도 합니다. 하지만 복음이 전해지는 것은 말 그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집니다. 하나님의 뜻을 인간이 이어받아서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이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 성령이 오신 것이고,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일에 부름 받은 도구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사도 바울의 길을 막으셨다면, 그리고 성령이 뜻하는 곳으로 사도를 가게 하셨다면 사도와 하나님의 관계에는 성령이 개입해 계신 것이 됩니다. 그리고 사도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으로 인도하기 위해 성령이 일하시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점을 잊지 않는다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우리의 의지나 열심 등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즉 하나님의 일은 전적으로 성령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우리의 의지와 열심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진심으로 성령의 일하심을 믿는 것이 됩니다.

 

 

복음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더 많은 곳으로 다니면서 더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고 더 많은 사람을 믿게 하는 것이 곧 하나님이 기뻐하신 뜻이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성령이 아시아로 가고자 하는 사도의 길을 막으시고 마게도냐로 가게 하셨다면 그것은 아시아에서 보다 더 큰일을 하게 하기 위함이라는 생각을 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11절부터 보면 사도가 마게도냐에 가서 있었던 일이 등장합니다. 12절에 보면 사도는 빌립보에 도착합니다. 거기서 수일을 유하면서 안식일에 기도할 곳을 찾다가 강가에 나가서 거기 모인 여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이 루디아라는 여자입니다.

 

 

그런 후에 사도는 귀신들린 여종을 만나서 그를 고쳐줍니다. 그런데 귀신 들린 여종이 점을 치는 것으로 돈을 벌던 주인은 사도로 인해 돈을 벌지 못하게 되자 사도를 붙들어 관원에게 끌고 가 옥에 갇히게 합니다. 바울과 실라가 옥에서 찬송할 때 지진이 나고 옥터가 움직이면서 옥문이 열리고, 옥문이 열린 것을 본 간수는 바울이 도망친 것으로 여기고 자살하려고 합니다. 사도는 간수를 만류하고 사도로 인해서 예수를 믿게 됩니다. 그리고 마게도냐를 떠납니다.

 

 

이것을 보면 마게도냐에 엄청나고 위대한 일이 준비된 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사도의 길을 막으시면서 마게도냐로 가게 하신 후 한 일은 루디아와 간수가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우린 항상 크고 위대한 일에 눈을 돌립니다. 하나님의 뜻은 더 많고 더 크고 위대한 일을 하는데 있고 성령은 신자를 그처럼 큰일을 하도록 도우신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생각으로 우리 자신을 돌아보기 때문에 지금 우리는 별 것 아닌 인생을 살고 있는 것으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당시 여자와 어린아이는 무시의 대상이었습니다. 간수 역시 맨 밑바닥의 관원입니다. 사회적으로 명망 있고 이름있는 그럴듯한 사람을 전도하여 믿게 한 것이 아니라 세상이 별 것 아닌 존재로 여기는 그 두 사람을 부르시기 위해 사도 중의 사도인 바울이 가고자 하는 길을 막으시고 마게도냐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바울이 아시아로 가고자 하는 것이 잘못되어서 막으신 것이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이 따로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성령은 우리를 하나님의 뜻에 일치되는 길로 인도하시고 우리를 복음을 위한 하나님의 도구가 되게 하셔서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지금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그곳에 바로 하나님이 보내신 일터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신자는 현재 어떤 형편과 처지에 있든 그 모든 것이 자신을 복음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것이 진심으로 하나님의 인도와 성령의 일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신자는 성령이 도우시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아니라 성령이 함께 하시고 도우시고 인도하시기 때문에 내 뜻대로 되는 일은 없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내 뜻대로 안되는 것이 당연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자신의 인생이 성령에 붙들려 있음을 믿는 것이고, 내 인생을 내가 아니라 성령이 지배하시고 다스리고 계심을 믿는 것이 됩니다.

 

 

따라서 자신이 세운 뜻을 위해 성령의 도움을 구하면서 이루어 달라고 하는 것은 성령이 우리의 길을 막으시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일하신다는 것을 믿지 않는 불신앙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만약 막히는 것이 없이 원하는 대로 되어진다면 그것은 성령이 여러분을 돕는 것이 아니라 지금 그 길이 하나님이 뜻에 일치되어 성령이 인도하시기 때문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성령의 일하심을 믿는 믿음 안에서 우리 인생을 바라보는 바른 시각입니다.

 

 

성령은 복음을 위해 일하시고 우리는 복음을 위한 도구로 존재합니다. 우리 인생 역시 복음을 위해 소비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 인생이 잘되는 것에만 마음을 두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령에 대한 불신앙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우리를 세상에 보내신 분의 뜻에 의해 주관되고 있습니다. 이런 시각으로 인생을 바라본다면 지금의 인생에 대해 실망할 것도 낙심할 것도 없습니다. 그냥 되는 대로 살자는 것이 아니라 내게 되어진 현재의 것이 복음을 위해 재게 주신 하나님의 뜻임을 알자는 것입니다.

 

 

복음이 전해지는 것은 인간에게 달린 문제가 아니라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자신이 있는 자리에서 복음의 도구가 되어 사는 것에 집중해야 합니다. ‘내가 누구를 전도했다’는 것도 없습니다. 다만 성령이 누군가를 부르시기 위해 나를 인도하신 성령의 일만 있을 뿐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인생이 성령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는 것으로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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