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화
2012.02.05 14:06

(성화 4강) 믿음의 선한 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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딤전 6:11-16http://onlycross.net/videos/holy/ti1-061116.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1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12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

13 만물을 살게 하신 하나님 앞과 본디오 빌라도를 향하여 선한 증언을 하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내가 너를 명하노니

1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흠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이 이 명령을 지키라

15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하나님은 복되시고 유일하신 주권자이시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요

16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권능을 돌릴지어다 아멘


 

 

 

<설교>

 

구원 받은 신자에게는 구원의 증표가 있어야 하고 그 증표가 곧 거룩한 삶으로의 변화라는 말을 많이 들을 수 있습니다. 이것을 성화의 삶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성화의 삶을 구원의 증표로 여기는 것이 현대 교회의 보편적인 생각일 것입니다.

 

 

구원을 받았다면 삶은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을 지극히 타당한 신앙 논리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의 증표를 보여주고 자신 또한 구원의 확신에 거하기 위해 성화라는 삶의 변화를 위해 힘씁니다. 자신의 노력으로 거룩을 만들어 내고, 그 거룩을 자기 구원의 증표로 증거하면서 자신의 구원을 확고하게 다지고자 하는 것입니다.

 

 

즉 ‘나는 구원 받은 사람이다’는 것을 보여주며 인정받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 받은 자신을 증거하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에 성경적이라고 할 수 없으며, 참된 도의 길에서 벗어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참된 도의 길에는 오직 생명이 되는 복음을 증거하는 것만 있을 뿐이지 구원 받은 나를 증거하는 것은 추호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어떻게 구원 받았는지,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하신 분의 역사하심에 대해 증거함으로써 모든 신자가 동일한 은혜에 머물게 되는 것인데, 자신의 구원 받음을 증거하게 되면 결국 보이는 것을 구원의 증표로 내세우기 때문에 구원의 차별성이 등장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행함이 모든 사람에게서 동일하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상급의 차등론이 등장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구원 받은 신자와 구원 받지 못한 신자가 동일할 수는 없습니다. 분명 다른 사람이고 달라진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 달라짐을 현대 교회가 주장하는 것처럼 외적인 삶의 변화에서 찾고자 한다면 성화는 구원의 여부와 상관없이 행동이 바른 모든 사람에게 해당이 되는 이상한 논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12절에 보면 사도는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는 말을 하는데, 성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 싸움을 신자가 좀 더 변화되고 거룩한 길을 가기 위한 것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서 죄에 대해 싸우고 이김으로써 죄를 범하지 않는 거룩한 신앙의 길을 가고자 힘쓰는 것을 믿음의 선한 싸움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성화의 삶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들에게 믿음의 선한 싸움은 자신이 변화되기 위한 싸움입니다. 하지만 사도는 믿음의 선한 싸움을 전혀 그런 의미로 말하지 않습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의 배경은 돈입니다. 9,10절을 보면 사도는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라는 말을 하고, 이어서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는 말을 하는 것을 보면 믿음의 선한 싸움은 부자되고 싶어 하는 것, 즉 돈을 사랑하는 것을 배경으로 한 말임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은 모든 소망을 재물에 두지 않고 하나님께 두고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복되시고 유일하신 주권자이시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요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만 모든 존귀와 영원한 권능을 돌리는 것이 믿음의 길이고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삶을 보면 부자 되고 싶은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진 채 살아갑니다. 마치 돈이 존귀하고 돈이 영원한 권능이라도 되는 것처럼 돈에 갈급해 합니다. 돈이 자신을 근심하게 하고 돈을 사랑함이 곧 괴로움이 되고 파멸과 멸망에 이르게 함을 보지 못한 채 돈만 있으면 만사가 해결될 것처럼 생각합니다.

 

 

돈이 없으면 살 수 없는 것이 세상이기 때문에 돈의 유혹을 넘어선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이것은 인격이나 성품과도 상관이 없습니다. 성품과 인격이 거룩하게 보일 정도로 변화되었다고 해도 우리의 성품과 인격은 돈의 유혹을 넘어서게 할 힘이 되지 못합니다.

 

 

성품과 인격이 좋지 않아서 돈의 유혹에 빠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바울은 11절에서 젊은 디모데에게 이런 것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라”고 하면서 12절에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고 말한 것입니다.

 

 

세상은 오직 돈이 되고 힘이 되고 자신에게 성공이 되는 길로만 달려갑니다.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것은 성공을 향한 자신의 길을 가는데 있어서 쓸모가 없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믿음은 성공을 목표로 하고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바라보고 달려가는 것입니다. 가는 길이 다릅니다. 이것이 구원 받은 사람과 구원 받지 못한 사람의 다른 점입니다. 인격과 성품이 다른 것이 아니라 가는 길이 다른 것입니다. 구원 받은 사람은 생명에 모든 소망을 두지만 구원 받지 못한 사람은 자기 성공에 소망을 두기 때문에 추구하는 것도 소원하는 것도 본질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은 죄에 대해 싸우라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의 실력으로 죄와 더불어 싸운다면 백전백패일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에게 죄와 싸워서 이길 실력이 있다면 애당초 에덴동산에서 사탄의 유혹을 이겼을 것입니다. 따라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었다는 것은 인간은 죄와 싸워 이길 수 없음을 말해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재물의 유혹과 싸워 이길 수가 없습니다. 재물을 향한 우리의 욕망을 극복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가 말한 믿음의 선한 싸움은 근본적으로 다른 싸움을 뜻합니다. 우리의 힘으로 싸워 이기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다른 세계를 살아가는 것을 싸움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그 다른 세계로 빠져 나온 사람이고, 다른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다른 세계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곧 돈이 우리의 존귀함과 능력과 생명이 아니라 우리를 살리시고 구원하신 하나님이 존귀함이 되고 능력이 되고 생명이 되는 세계입니다.

 

 

다른 세계를 살아가는 일은 만만치가 않습니다. 우리가 보기에 좋은 것은 온통 세상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보다 돈을 가진 부자로 사는 것이 더 매력적으로 다가옵니다. 이러한 유혹 속에서 변함없이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다른 세계를 살아가야 하는 것이 신자이기 때문에 믿음의 선한 싸움이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15,16절을 보면 사도는 디모데에게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대해 말합니다. 그냥 믿으면 되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혹 이런 생각을 가지신 분이 있다면 그 분은 지금껏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고 믿은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도 모른 채 믿었다면 그것은 맹목적인 믿음이겠지요.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아야 하나님만이 존귀하시고 하나님께만 권능이 있고 영원히 영광을 받아야 할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을 알아갈수록 돈을 의지하고 돈을 힘으로 삼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헛된 것인가를 알게 됩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돈의 유혹에 매어 사는 자신을 보게 되면서 생명은 오직 하나님의 권능으로만 가능함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하나님을 존귀한 분으로 여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자는 부자 되는 길을 가고자 하지 않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는 길을 갑니다. 가는 길이 전혀 다릅니다. 따라서 성화의 삶은 점차 거룩한 모습으로 변화되고 달라져 가는 것이 아니라, 불의한 우리를 거룩한 자로 불러내신 하나님의 뜻을 알고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진리의 길로 가기를 힘쓰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십시오. 이것이 거룩의 길을 가는 것이며 성령으로 사는 성화의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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