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2.17 17:39

(5강) 모세의 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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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2:11-15http://onlycross.net/videos/exo/exo-021115.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1.모세가 장성한 후에 한번은 자기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들이 고되게 노동하는 것을 보더니 어떤 애굽 사람이 한 히브리 사람 곧 자기 형제를 치는 것을 본지라

12.좌우를 살펴 사람이 없음을 보고 그 애굽 사람을 쳐죽여 모래 속에 감추니라

13.이튿날 다시 나가니 두 히브리 사람이 서로 싸우는지라 그 잘못한 사람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동포를 치느냐 하매

14.그가 이르되 누가 너를 우리를 다스리는 자와 재판관으로 삼았느냐 네가 애굽 사람을 죽인 것처럼 나도 죽이려느냐 모세가 두려워하여 이르되 일이 탄로되었도다

15.바로가 이 일을 듣고 모세를 죽이고자 하여 찾는지라 모세가 바로의 낯을 피하여 미디안 땅에 머물며 하루는 우물 곁에 앉았더라

 

 

<설교>

갈대상자에 담겨 있다가 바로의 딸에 의해 건짐 받은 모세는 공주의 아들이 되어 바로의 궁에서 생활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유모로 들어온 친어머니의 손에 의해 자랐기 때문에 애굽 사람이 아니라 히브리 사람으로 양육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본문에서 히브리 사람을 때리는 애굽 사람을 죽여서 모래 속에 감춘 사건으로 드러납니다.

 

 

11절에 보면 “모세가 장성한 후에 한번은 자기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들이 고되게 노동하는 것을 보더니 어떤 애굽 사람이 한 히브리 사람 곧 자기 형제를 치는 것을 본지라”고 말합니다.

 

 

모세는 히브리 사람을 자신의 형제로 여겼는데 자기 형제들이 고되게 노동하는 것을 보면서 마음이 괴로웠을 상황에서 애굽 사람이 자기 형제를 때리는 것을 보고 분노하게 된 것입니다. 같은 민족이라는 민족심에 의한 분노이며 그로 인해 결국 애굽 사람을 죽여서 감추는 사태까지 나아간 것입니다.

 

 

만약 모세가 히브리 사람을 형제로 여기지 않았다면 고되게 노동하는 것을 목격했다 해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 것입니다. 그리고 형제가 애굽 사람에게 맞는 것을 보면서도 그냥 지나쳤을 것입니다. 이것은 히브리 사람이라는 자기 정체성을 잃어버린 것과 같다고 할 수 있고, 나중에 이스라엘로 보냄 받아 그들을 이끌어 내는 일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고자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나오게 하는 일은 민족심으로 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모세가 비록 민족심으로 자기 동족을 위해 일한다 해도 이스라엘은 언제든 자신들에게 불리하고 힘든 상황에 처하게 되면 모든 원인을 모세에게로 돌릴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인간성인 것입니다.

 

 

애굽 사람을 죽여서 모래에 감춘 모세가 이튿날 다시 나갔을 때 두 히브리 사람이 서로 싸우는 것을 보게 됩니다. 모세는 잘못한 사람에게 “네가 어찌하여 동포를 치느냐”며 책망합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누가 너를 우리를 다스리는 자와 재판관으로 삼았느냐 네가 애굽 사람을 죽인 것처럼 나도 죽이려느냐”라고 반발하게 되고 모세는 자신이 애굽 사람을 죽인 일이 탄로되었음을 알게 됩니다. 결국 그 일을 바로가 듣고 모세를 죽이려고 찾게 되고 모세는 바로를 피하여 미디안 땅으로 도망을 치게 된 것입니다.

 

 

모세는 순전히 애굽 사람에게 맞고 있는 동족을 위해 폭력을 사용했을 뿐입니다. 당시 모세의 신분은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히브리 사람이 매를 맞고 있다 해도 모른 척하면 지나가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애굽 사람을 죽이기까지 한 것을 보면 친어머니 손에서 자라면서 히브리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이 강하게 확립된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히브리 사람을 돕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모세의 민족심은 모세가 형제로 여기는 히브리 사람에 의해 짓밟히게 됩니다. 모세가 애굽 사람을 죽인 일은 같은 히브리 사람에 의해서 퍼진 것 같습니다. 애굽 사람에게 맞고 있던 사람이 처음 그 이야기를 다른 이에게 전했을 것이고 결국 애굽 사람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히브리 사람은 모세 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모세가 자신에게 득이 될 때는 모세를 따르지만 득이 되지 않거나 힘든 상황에 처하면 모든 원인을 모세에게 돌리면서 불평과 원망을 쏟습니다. 이 모든 일이 장차 광야에서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고난을 폭력으로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애굽 사람이 힘으로 자신의 형제를 때리니 모세도 힘으로 애굽 사람을 대한 것입니다. 힘에는 힘으로 대항하는 이것이 세상의 방식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구원은 모세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만 가능했습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모세가 알기를 원한 것입니다.

 

 

본문은 모세의 폭력에 초점을 두면 안됩니다. 기독교 정신을 비폭력에 두면서 모세가 폭력을 쓴 것을 잘못된 것으로 강조한다면 결국 본문은 ‘폭력을 쓰지 말자’는 의미로 흘러가게 됩니다. 그런데 과연 비폭력이 기독교 정신일까요?

 

 

기독교가 폭력을 말하지도 않지만 비폭력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폭력을 악한 것 비폭력을 선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선을 추구하는 기독교 정신이 비폭력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힌두교도이면서 비폭력을 주장한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는 어떻게 생각해야 합니까?

 

 

기독교 정신이 비폭력이라면 비폭력은 기독교에서만 나와야 합니다. 하지만 비폭력은 거의 모든 종교인들이 주장하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비폭력을 기독교의 정신으로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폭력을 사용해도 된다는 것이 아니라 비폭력이 기독교의 정신도 본질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행 7:23-25절에 보면 “나이가 사십이 되매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볼 생각이 나더니 한 사람이 원통한 일 당함을 보고 보호하여 압제 받는 자를 위하여 원수를 갚아 애굽 사람을 쳐 죽이니라 그는 그의 형제들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손을 통하여 구원해 주시는 것을 깨달으리라고 생각하였으나 그들이 깨닫지 못하였더라”고 말합니다.

 

 

모세가 나이 사십이 되매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볼 생각이 났다고 말하는 스데반의 시각에서 생각하면 모세는 40세가 되었을 때 애굽으로 인해 괴로움을 당하는 이스라엘을 구원하고자 하는 생각을 갖게 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모세는 하나님이 구원하신다는 생각보다는 하나님이 자신의 의지와 힘으로 이스라엘의 구원을 이루고자 하는 것으로 오해했습니다.

 

 

그러면 모세의 폭력 사건이 발각되게 하시고 미디안 땅으로 도망치게 하신 것에서 생각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일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일하신다는 생각을 버리게 하시는 것이고 그것을 빙자해서 자기의 힘과 능력을 의지하고 앞세우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통해 일하신다’는 말을 많이 들을 수 있습니다. 과연 하나님이 인간을 통해 일하실까요? 만약 하나님이 인간을 통해 일하시고 모세의 손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것이라면 모세는 이미 실패했습니다. 폭력이 발각되어 미디안 땅으로 도망치는 신세로 전락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 사람을 생각하는 모세의 민족심은 자신이 위험해지는 것도 감수할 정도로 뛰어났습니다. 모세의 민족심이 지도자에게 필요한 덕목이고 리더십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히브리 사람은 모세의 민족심을 외면했고 도망치는 신세가 된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모세가 배워야 했던 것은 하나님의 일에 있어서 자신의 어떤 것도 쓸모가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인간의 성품, 기질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을 위해 도움 되는 성품이나 기질이 따로 요구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배워야 하는 것은 ‘우리가 어떤 사람인가?’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무엇으로도 정당화 될 수 없습니다. 모세가 자기 동족을 형제로 여기며 애굽 사람을 죽이기까지 의리를 보였다 해도 그것이 하나님의 일에 사용될만한 조건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설사 모세가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 애굽 사람을 말로 타일러서 보냈다 해도 그 성품이 이스라엘의 구원에 쓸모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기질과 본성 그대로 하나님을 찾을 뿐입니다. 선한 성품, 선한 기질이 없는 악한 존재 그대로 하나님을 찾고 나와 전적으로 무관한 하나님의 구원으로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는 고백이 있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모세와 같은 과정으로 인도하십니다. 항상 내가 어떤 존재인가를 보게 하시고 내가 붙들고 있던 나를 놓게 하십니다. ‘나는 괜찮은 존재다’가 아니라 ‘나는 심판이 당연한 악한 존재다’라는 자기 고백이 있게 하십니다. 그래서 인생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인이신 인생을 사는 것이 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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