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9.01 16:29

(83강) 거짓증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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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출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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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6.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설교>

아홉째 계명인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서 지켜야 할 질서로 구성된 요소 중의 하나입니다. 이것은 살인 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 하지 말라는 계명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모든 계명이 세상에서 동일하게 법으로 규정되어 금하는 것들입니다.

 

 

그러면 만약 하나님의 계명이 세상의 법과 같다고 해석하게 되면 어떤 결과를 초래하게 될까요? 바울의 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7:12)라는 말에 따르면 계명은 거룩하고 의롭고 선합니다. 그러면 세상 법은 어떻습니다. 하나의 계명과 동일한 계명이라면 세상의 법도 의롭고 거룩하고 선하다고 해야 합니까?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계명과 세상 법의 경계가 무너지면서 하나님의 계명이 세상의 법이 선하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결과가 됩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계명이 세상 법과 말이 같다고 해서 같은 법으로 볼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계명의 의미에 무지한 자들이 계명을 세상 법과 같은 의미로 해석함으로서 거룩하고 선하고 의로운 하나님의 계명이 세상의 법의 수준, 즉 도덕의 수준으로 전락시킨 것입니다. 세상은 법을 지키면 되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계명은 지켜야 하는 법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명을 가지고 일하신다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세상의 법 앞에서 인간은 지키는 자와 어긴 자로 구분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계명 앞에서는 인간 모두가 계명을 어긴 죄인으로 규정됩니다. 이것이 계명의 기능입니다. 따라서 살인하지 말라는 것은 너희는 살인하는 자들이다는 것을 증거 하는 것이고, 본문처럼 이웃에 대하여 거짓증거 하지 말라는 것은 너희는 이웃에 대해 거짓증거를 일삼는 자들이다는 것을 증거 하고자 하는 것이 계명을 주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런데 계명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에 대해서는 생각을 닫아 버리고 지키면 복 받는다는 유아적인 생각에만 머물러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세상 법에는 이웃에 대해 거짓증거하면 처벌을 받는 조항들이 있습니다. 무고죄나 명예 훼손죄가 그에 해당됩니다. 그리고 법정에서 이웃에 대해 거짓증거 했을 때는 위증죄로 처벌 받기도 합니다.

 

 

그런데 교회가 이웃에 대한 거짓증거를 그런 의미로 이해합니다. 같은 교회에 출석하는 교인을 위시해서 가까운 지역에 있는 누군가를 욕하고 험담하는 것을 거짓증거 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웃을 비판하거나 모함하지 않으면 거짓증거 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만, 그 모든 것이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의 계명을 세상의 법과 도덕의 수준으로 전락시키는 것이 됩니다.

 

 

우리가 먼저 생각할 것은 이웃에 대한 것입니다. ‘누구를 이웃이라고 할 수 있는가?’입니다. 세상이 말하는 것처럼 가까운 이웃 사람일까요? 아니면 같은 교회에 다니는 교인일까요? 이웃의 범위를 어떻게 정한다 해도 그것은 인간관계라는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인간관계라는 범주에 거짓증거하지 말자라고 하게 되면 그것이 이웃에게 피해를 주지 말자는 도덕이 됩니다. 그래서 나는 이웃에게 거짓증거하지 않았다. 모함하지도 않고 비난하지도 않았다면서 계명을 지킨 자기 정당함을 주장할 가능성이 있게 됩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인간관계의 범주에서 벗어난 이웃 개념을 정립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어떤 의미에서의 이웃일까요?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에게는 모두에게 동일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것은 애굽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겪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재앙인 장자 죽음에서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름으로 죽음에서 벗어난 경험이 모두에게 있습니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은 단순히 아브라함의 혈통적 후손이 아니라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자들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라 해도 어린양의 피를 바르지 않았다면 애굽처럼 장자의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출애굽 한 이스라엘에게 이웃은 모두가 동일한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는 관계로 부각됩니다.

 

 

은혜는 하나님으로부터 무상으로 베풀어진 것입니다. 모든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로 존재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은혜 앞에서 인간이 인간을 바라보고 판단하고 나누는 세상 기준이 통용될 수 있을까요? 재물이나 세상의 권력보다 죽음에서 구출되어 생명에 속한 것이 더 존귀하고 가치 있는 것이라면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 인간의 기준은 물거품처럼 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이웃 관계에 있다면 서로를 세상 기준으로 평가하고 판단하는 것은 있을 수 없게 됩니다.

 

 

이웃에 대해 거짓증거를 한다면 그것은 이웃에 대한 미움이나 시기, 또는 자기에게 돌아올 어떤 이익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의도에서 거짓증거를 한다면 그것은 자신에게 베풀어진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증거입니다. 그렇게 보면 이웃에 대하여 거짓증거하지 말라는 계명에는 너에게 베풀어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이웃을 생각하는가?’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이웃에 대해 거짓증거 하는 존재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시각에서 이웃을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요일 4:20절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뜻인데 바꾸어 말하면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이다라는 뜻이 됩니다. 그런데 인간은 형제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지금은 사랑한다 해도 그 마음은 수시로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가령 사랑하는 형제가 아픔을 주고 피해를 입혔을 때, 그래도 끝까지 사랑할 수 있습니까? 결국 상황에 따라 변하는 것이 인간성이라면 그런 인간성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욥과 같은 상황으로 인도하셔도 끝까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을 아신다면 우리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이기 때문에 이웃에 대해서도 상황에 따라 수시로 마음이 변하는 것입니다.

 

 

10장에 보면 예수님과 율법 교사의 대화중에 강도만난 자의 이웃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강도 만난 자에게 이웃은 율법 교사의 말 대로 자비를 베푼 자입니다. 강도 만난 사람은 유대인으로 추정됩니다. 그를 사마리아 사람이 도운 것입니다. 인간관계, 감정, 이익의 여부를 다 초월하여 자비를 베푼 것입니다.

 

 

인간관계를 따진다면 피하여 간 제사장과 레위인이 도왔어야 합니다. 그들이 잘 알고 지키기 위해 힘쓰는 율법에 이웃 사랑에 대한 내용이 있기 때문에 누구보다 먼저 도와줬어야 합니다. 하지만 가까이 가면 귀찮은 일을 맡아야 하고 손해가 발생한다는 것이 먼저 계산됨으로써 피하여 간 것입니다. 누가 이들을 욕하겠습니까? 우리 또한 그렇게 행동하는 것을요. 결국 율법에 대한 열심과 노력으로도 이웃에게 자비를 베푸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은 인간적인 모든 것을 초월하여 자비를 베풉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유일한 이웃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그리스도의 몸의 관계로 존재합니다. 이것이 예수 안에서의 이웃 관계입니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예수님의 완성의 세계에 존재하는 관계입니다.

 

 

그렇다면 십자가 안에서의 이웃 관계에서는 거짓 증거가 나올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은혜로 교통하는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거짓 증거는 십자가 밖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실상으로 국한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으로 실현된 약속의 땅에서 존재하는 이스라엘이 모두가 하나님이 이루신 동일한 은혜 아래 있음으로 이웃에 대해 거짓증거하지 않는 세계로 인도 받았음을 뜻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에서도 은혜의 실상을 알지 못하고 이웃을 경쟁상대로 여겼습니다. 애굽에서의 속성을 그대로 드러낸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실상입니다. 항상 애굽의 속성으로 살아가는 우리를 십자가의 세계로 부르셔서 그리스도를 전하는 관계에 있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이웃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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