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0.27 16:48

(89강) 눈은 눈으로

조회 수 566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Extra Form
성경본문 출 21:22-27

출 21:22-27http://onlycross.net/videos/exo/exo-212227.mp4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21.그가 하루나 이틀을 연명하면 형벌을 면하리니 그는 상전의 재산임이라

22.사람이 서로 싸우다가 임신한 여인을 쳐서 낙태하게 하였으나 다른 해가 없으면 그 남편의 청구대로 반드시 벌금을 내되 재판장의 판결을 따라 낼 것이니라

23.그러나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

24.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25.덴 것은 덴 것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

26.사람이 그 남종의 한 눈이나 여종의 한 눈을 쳐서 상하게 하면 그 눈에 대한 보상으로 그를 놓아 줄 것이며

27.그 남종의 이나 여종의 이를 쳐서 빠뜨리면 그 이에 대한 보상으로 그를 놓아 줄지니라

 

 

<설교>

인간이 모여 있게 되면 여러 가지 사건 사고 등의 문제가 발생합니다. 원하지 않은 상황에 의해 다툼이 있을 수 있고 다툼이 싸움이 되고 싸움으로 인해서 누군가가 다치는 일이 있기도 합니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생활 할 때도 이런 문제가 없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생활 때도 당연히 사건 사고가 있게 됩니다. 이러한 경우에 필요한 것이 법입니다. 법이 있으면 법에 의해 처벌을 하거나 법에 따라 합의하거나 해결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법은 원만한 인간관계와 질서를 위해 필요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주신 법은 단순히 정의와 질서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법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단지 법을 잘 지켜서 정의와 질서가 있는 좋은 나라, 이스라엘 되게 하는 것이 법을 주시는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입니다. 법의 의미가 그런 것이면 우리는 하나님의 법과는 무관한 존재가 됩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에게 주신 법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법을 따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22절에 보면 사람이 서로 싸우다가 임신한 여인을 쳐서 낙태하게 하였으나 다른 해가 없으면 그 남편의 청구대로 반드시 벌금을 내되 재판장의 판결을 따라 낼 것이니라고 말합니다.

 

 

사람이 서로 싸우다가 임신한 여인을 쳐서 낙태하게 되는 상황이 발생했을 때의 배상에 대한 내용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가해자가 남편의 청구대로 반드시 벌금을 내라고 합니다. 그런데 재판장의 판결을 따라 내라는 조건이 따라옵니다. 벌금을 재판장의 판결을 따라 내는 것이라면 남편의 입장에서는 어떨까요?

 

 

사람이 서로 싸우다가 임신한 여인을 낙태하게 하였다면 비록 그것이 고의가 아니라 해도 남편에게는 분노를 유발하는 사건이 됩니다. 이런 경우 사람에게 있게 되는 것은 보복입니다.‘내 아내를 쳐서 낙태하게 했으니 너도 그만큼 고통을 겪어야 한다는 보복심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남편에게 벌금을 청구하게 한다면 어떤 결과를 예상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이 그 당사자라면 얼마를 청구하겠습니까? 가해자의 형편을 생각하면서 그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액수를 청구할까요? 사람에게는 누구나 보복심이 있고 손해 보지 않으려는 본성으로 존재합니다. 따라서 아내가 낙태한 것에 대한 분노로 그 사람이 감당하기 힘든 액수의 벌금을 청구하는 것으로 보복하고 싶어 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이 자기의 보복심을 마음껏 드러내지 못하게 하십니다. 그것이 재판장의 판결을 따라 내라는 것입니다. 남편이 분노와 보복심으로 많은 벌금을 청구한다 해도 실제 벌금은 재판장의 판결대로 되는 것입니다. 결국 말씀드린 것처럼 인간의 보복심이 재판장이라는 존재에 걸리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법에 담긴 의미입니다.

 

 

23-25절을 보십시오.그러나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덴 것은 덴 것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는 법은 우리가 많이 들은 내용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동해 보복법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누군가로 인해 육체에 상해를 입었을 때 동일한 상해를 입혀서 보복할 것을 허용하는 법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동해 보복법을 세우신 것은 형벌을 통해 범죄의 재발을 방지하고 죄를 범한 자로 하여금 보다 더 큰 죄에 빠지지 않게 하려는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눈은 눈으로 손은 손으로라는 법이 타인에게 상해를 입힌 대로 벌을 받게 함으로써 더 큰 범죄자가 되는 것을 예방하겠다는 취지일까요? 유대인들도 그렇게 이해했습니다. 눈을 다치게 했으면 눈으로, 손을 다치게 했으면 손으로 자기 죄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것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5:38-39)라고 말씀하십니다. 유대인들의 이해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타인에게 피해를 입었으면 피해를 입은 만큼만 보응하라는 취지로 이 법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어쨌든 하나님이 보응, 즉 복수를 허락하셨다는 의미가 될 뿐이고 복수를 좋아하는 인간은 이 법을 내세워 자신의 복수를 정당화 할 것입니다.

 

 

18,19절에 보면 사람이 서로 싸우다가 하나가 돌이나 주먹으로 그의 상대방을 쳤으나 그가 죽지 않고 자리에 누웠다가 지팡이를 짚고 일어나 걸으면 그를 친 자가 형벌은 면하되 그간의 손해를 배상하고 그가 완치되게 할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우리 사회에서는 통용되지 않는 법입니다. 비록 서로 싸웠다 할지라도 상대를 돌이나 주먹으로 쳐서 자리에 눕게 했다면 그에 대한 처벌을 받아야 합니다. 형벌을 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형벌은 면하고 다만 자리에 누워서 일을 하지 못하고 치료에 들어가는 손해는 배상하라고 합니다. 맞아서 자리에 누운 피해자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법이 합리적이지 않다고 생각될 것입니다. 손해만 배상 받는 것으로는 복수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법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취지가 무엇일까요? 사람이 서로 싸웠다면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고 피해자가 가해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즉 맞았다는 이유만으로 가해자에게 복수할 권리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에게 요구되는 정신입니다.

 

 

피해자가 나도 같이 싸우기는 했지만 나는 너를 치지 않았다. 때문에 나는 잘못이 없다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이 자기를 정당화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정당화함으로써 나를 때리고 힘들게 한 대상에게 복수할 자격이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서 드러나는 속성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이런 법을 세우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1:2절에 보면 여호와는 질투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진노하시되 자기를 거스르는 자에게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자기를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를 품으시며라고 말씀합니다.

 

 

여호와는 자기를 거스르는 자에게 보복하시고 진노하십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보복과 진노를 받아야 할 대상일 뿐이라는 것이 드러납니다. 그들이 광야에서 보여준 것은 하나님을 거스르는 것이 전부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간 것은 이스라엘에게 보복하지 않으시고 긍휼로 대하신 결과입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눈은 눈으로라는 법을 주신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와 보복을 받아 심판을 받아야 할 자가 긍휼하심에 의해 존재한다는 것을 잊어버린다면 결국 하나님의 법을 자기 보복을 위한 것으로 이용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법이 있음으로 해서 하나님의 긍휼을 멸시하는 인간의 악함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보복심이 드러나게 하는 것이 법의 취지라면 하나님은 우리가 보복심을 이기거나 보복심을 가지지 않는 신자 될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보복심이 없는 인간은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원수를 보복의 대상으로 보지 않으셨을 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하나님 앞에 우리는 보복의 대상일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보복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게 보복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받아야 할 보복을 예수님이 대신 받으신 희생 위에 우리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신자를 복의 사람이라고 일컫는 이유입니다.

 

 

예수님의 희생 위에 존재하는 신자에게 요구되는 것이 무엇일까요? 우리의 착함과 열심일까요? 그것이 하나님께 만족이 되는 것이라면 우리는 애당초 하나님께 복수의 대상이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법은 우리는 하나님의 희생과 아픔으로 끌어갑니다. 이것이 법의 거룩성입니다. 그래서 신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하나님의 희생, 즉 예수님이 흘리신 피로 인해 존재하고 있음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참된 현실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신 일로 인해 억울하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신자는 다만 예수님의 공로로만 살 뿐입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성경본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설교 원고는 없습니다 신윤식 2022.01.01 941
공지 암, 옵, 욘 성경강해 방으로 옮겼습니다. 신윤식 2011.02.28 7265
공지 이전 홈페이지 수요일설교 들어가기 은석교회 2010.01.01 40064
296 아 2:15-17 (9강) 여우를 잡으라 신윤식 2021.05.29 860
295 (9강) 모세를 보낸 증거 신윤식 2017.01.14 1980
294 잠 3:1-10 (9강) 그리하면 신윤식 2021.12.18 658
293 잠 23:1-8 (99강) 허무한 것 신윤식 2023.12.29 218
292 출 23:18-19 (99강) 생명과 생존 신윤식 2019.01.19 585
291 출 23:14-17 (98강) 세 절기 신윤식 2019.01.12 590
290 잠 22:22-29 (98강) 사람과 사람 신윤식 2023.12.22 277
289 잠 22:17-21 (97강) 지식에 마음을 신윤식 2023.12.13 231
288 출 23:10-13 (97강) 안식 신윤식 2019.01.05 503
287 잠 22:13-16 (96강) 여호와의 노 신윤식 2023.12.08 251
286 출 23:6-9 (96강) 나그네의 사정 신윤식 2018.12.29 581
285 출 23:1-5 (95강) 율법과 인간 신윤식 2018.12.15 643
284 잠 22:7-12 (95강) 여호와의 눈 신윤식 2023.11.30 257
283 출 22:25-31 (94강) 자비의 법 신윤식 2018.12.08 577
282 잠 22:1-6 (94강) 경외함의 보상 신윤식 2023.11.23 242
281 잠 21:27-31 (93강) 이김은 여호와께 신윤식 2023.11.16 233
280 출 22:18-20 (93강) 살려두지 말라 신윤식 2018.12.01 790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 15 Next
/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