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1.24 16:14

(92강) 처녀와 동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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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출 22:16-17

출 22:16-17http://onlycross.net/videos/exo/exo-221617.mp4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6.사람이 약혼하지 아니한 처녀를 꾀어 동침하였으면 납폐금을 주고 아내로 삼을 것이요

17.만일 처녀의 아버지가 딸을 그에게 주기를 거절하면 그는 처녀에게 납폐금으로 돈을 낼지니라

 

 

<설교>

신자가 십자가를 믿는다고 할 때 그 믿음에는 자신의 모든 행위는 믿음의 세계에서 거절되어야 마땅하다는 것까지 포함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참된 믿음은 자기의 행위로는 결코 눈을 돌리지 않게 됩니다. 행위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어떤 행위에 대해서도 의미를 두지 않는 것이고, 의미를 두지 않기에 관심 또한 없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인간이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아무것도 없이 나아간다는 것에 불안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소위 자기 공로라고 할 수 있는 것을 만들고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이 자기편이 되는 관계를 이루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무너뜨리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본래 가까이 될 수 없는 원수 관계였음을 드러내기 위해 주신 것이 율법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신 의도임을 생각한다면 율법에 대한 인간의 착각이 얼마나 큰가를 알 수 있습니다. 율법을 받은 이스라엘로 시작하며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같이 율법을 복과 구원을 받기 위한 방편으로 이용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율법의 완성이 구원일까요? 십자가일까요? 당연히 십자가입니다. 구원을 위한 통로나 수단, 방법으로 주어진 율법이 아닌 것입니다. 따라서 율법은 처음부터 실천을 염두에 두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 실천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는 실패의 존재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오로지 예수님이 이루신 십자가의 피의 공로만 소망하는 자로 나올 것을 촉구하는 것이 율법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우리가 이룰 수 있는 내용으로 되어 있지 않습니다. 애당초 인간의 순종과 실천을 목적으로 한 율법이 아니란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의 시각에서 접근합니다. 즉 순종해야 할 덕목으로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이 약혼하지 아니한 처녀를 꾀어 동침하였으면 납폐금을 주고 아내로 삼을 것이요 만일 처녀의 아버지가 딸을 그에게 주기를 거절하면 그는 처녀에게 납폐금으로 돈을 낼지니라”(16,17)는 법은 어떻게 순종해야 할까요?

 

 

약혼하지 아니한 처녀를 꾀어 동침했을 때에 관한 법이니까 처녀를 꾀어 동침한 일만 없으면 율법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율법은 처녀를 꾀어 동침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동침했을 때를 말합니다. 그러면 이 율법에 순종하려면 처녀를 꾀어 동침부터 해야 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이유를 명확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3:19-20절의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는 말처럼 인간의 죄를 드러내어 심판 아래 있게 하는 것이 율법의 목적이고 이유입니다.

 

 

이것을 롬 7:13절에서도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뜻이라면 본문의 내용이 단지 처녀를 꾀어 동침하지 말라거나 동침했을 경우에 해결책을 제시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할 율법이 아니라는 것은 아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이 죄를 죄 되게 하고 죄를 깨닫게 한다면 우리는 본문을 보면서 죄를 깨달아야 하고 죄가 죄 되어 나타나야 합니다. 그것이 율법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죄가 보이지 않는다면 이유를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요? 율법을 문자의 시각으로만 이해하고 자신을 율법과 무관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처녀를 꾀어 동침한 적이 없다. 때문에 이 율법은 나와 무관하다라는 생각이 있기에 죄를 보지 못합니다. 이것은 여자의 시각에서도 다르지 않습니다. 자신이 남자의 꼬임에 빠져 그와 동침을 한 일이 없다면 남자와 동일하게 본문의 율법에 해당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의 율법이 이 내용에 해당되는 몇몇 사람에게만 적용될 문제일까요? 그것이 율법에 대한 잘못된 이해인 것입니다.

 

 

사람이 처녀를 꾀어 동침했다는 것은 처녀를 자신의 욕구의 대상으로만 본다는 뜻입니다. 여자를 남자를 돕는 배필로 있게 하신 하나님의 뜻이 아닌 자신의 욕구를 따라 행동하는 인간성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처녀를 꾀어 동침하는 것으로만 드러나지 않습니다. 서로 사랑하여 결혼한 부부 관계에서도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는 하나님의 뜻은 무시되고 행복만 추구하는 인간성만 폭로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본문의 율법이 여자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매우 불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도무지 여자의 입장이나 의견을 묻지 않습니다. 남자가 납폐금만 주면 여자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동침한 여자를 아내로 맞이할 수 있고, 만약 아버지가 거절하면 여자가 동침한 남자의 아내가 되고 싶다 해도 안됩니다.

 

 

피해를 당한 쪽은 여자입니다. 따라서 여자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남자에게 벌을 내려 보복하고 싶은 것도 있을 것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비록 꾀임에 빠져 동침을 했다 하더라도 남자를 사랑해서 아내가 되고 싶은 마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무시되는 것이 여자의 입장입니다.

 

 

신명 22:28-29절에도 비슷한 법이 있습니다. 만일 남자가 약혼하지 아니한 처녀를 만나 그를 붙들고 동침하는 중에 그 두 사람이 발견되면 그 동침한 남자는 그 처녀의 아버지에게 은 오십 세겔을 주고 그 처녀를 아내로 삼을 것이라 그가 그 처녀를 욕보였은즉 평생에 그를 버리지 못하리라는 내용입니다.

 

 

처녀를 붙들고 동침했다는 것은 강제로 동침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 동침한 남자가 처녀의 아버지에게 은 오십 세겔을 주고 아내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역시 피해자라고 할 수 있는 처녀의 의사는 묻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율법을 보면서 한 가지 전제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율법은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율법에는 우리가 말하는 정의, 인격, 윤리 이런 것이 없습니다. 다만 있는 것은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인간의 본성에 감추어져 있는 죄를 드러내어 우리가 저주의 존재임을 보게 하는 것입니다.

 

 

처녀의 입장에서 법은 부당하게 다가올 것입니다. 피해자인 자신의 편을 들어주지 않고 오히려 불리하게 작용하는 것처럼 느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에 행하시는 일에 대한 우리의 생각입니다. 도무지 내 편을 들어주지 않는 것 같은 하나님에 대해 불만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하나님이 아닌 나 중심으로 살려고 발버둥치고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을 붙들어 십자가에서 죽인 인간이 유대인이라고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혈통으로는 유대인이지만 인간성으로는 우리와 동일합니다. 그래서 율법은 유대인의 죄만 아니라 우리 모두의 죄를 폭로하는 것입니다.

 

 

사실 법이 있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 아닙니다. 선악과가 있고 먹으면 죽는다는 법이 있음으로 인간이 죽음의 존재가 되었습니다. 법이 아니었다면 선악과를 먹었다 해도 죽음의 존재가 되게 할 근거가 없기에 에덴에서 쫓겨나지 않고 잘 살았을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기 행복만을 추구하는 우리의 욕구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하나님이 믿음과 구원의 방법을 선택하게 하셨다면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하였을까요? 우리의 행위에 따라 복과 구원을 받는 방법을 선택했을 것입니다. 인간의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 우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뜻을 묻지 않고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구원을 이루시는 것이 은혜입니다.

 

 

여러분이 말씀을 보신다면 그 말씀이 너는 버림받은 저주의 존재다는 주의 음성으로 다가와야 합니다. 말씀을 볼수록 나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 무너지면서 대신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예수님의 의가 하나의 소망과 기대로 세워져야 합니다. 이들을 가리켜 신자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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