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2.08 16:01

(94강) 자비의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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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출 22:25-31

출 22:25-31http://onlycross.net/videos/exo/exo-222531.mp4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25.네가 만일 너와 함께 한 내 백성 중에서 가난한 자에게 돈을 꾸어 주면 너는 그에게 채권자 같이 하지 말며 이자를 받지 말 것이며

26.네가 만일 이웃의 옷을 전당 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그에게 돌려보내라

27.그것이 유일한 옷이라 그것이 그의 알몸을 가릴 옷인즉 그가 무엇을 입고 자겠느냐 그가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들으리니 나는 자비로운 자임이니라

28.너는 재판장을 모독하지 말며 백성의 지도자를 저주하지 말지니라

29.너는 네가 추수한 것과 네가 짜낸 즙을 바치기를 더디하지 말지며 네 처음 난 아들들을 내게 줄지며

30.네 소와 양도 그와 같이 하되 이레 동안 어미와 함께 있게 하다가 여드레 만에 내게 줄지니라

31.너희는 내게 거룩한 사람이 될지니 들에서 짐승에게 찢긴 동물의 고기를 먹지 말고 그것을 개에게 던질지니라

 

 

<설교>

하나님을 인자하시고 자비하신 분으로 말하지만 대개는 자신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에서 인자와 자비를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인자하시고 자비로우신 분이어서 어려운 문제로 인해 고생하는 자기 백성을 그냥 두고 보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고 고백하는 자리까지 어떻게 오게 되었는가를 간과한 생각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자신이 예수를 주로 고백하게 된 것을 특별한 사건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를 자신의 육신의 문제로만 연결해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자가 분명히 기억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아니면 올 수 없는 자리에 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말은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긍휼을 입은 결과임을 아는 것이 신자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비와 긍휼로 인도하신 자기 백성을 세워서 하시는 일은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나타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가 존재하고 있는 이유가 됩니다. 우리는 이것을 이스라엘에게 주신 하나님의 율법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먼저 25절에 보면 네가 만일 너와 함께 한 내 백성 중에서 가난한 자에게 돈을 꾸어 주면 너는 그에게 채권자 같이 하지 말며 이자를 받지 말 것이며라고 말합니다.

 

 

돈을 꾸어줄 때는 먼저 그 사람이 돈을 갚을 능력이 있는지를 따집니다.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 꾸어주면 돈을 떼일 위험이 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꾸어 줬다면 이자를 받습니다. 그것은 세상의 시각에서 정당한 권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가난한 자에게 꾸어주면 채권자같이 하지 말라고 하고 이자도 받지 말라고 합니다. 이 말의 중점은 돈을 꾸어줬다 해도 자기 돈을 꾸어준 것처럼 돈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26,27절에서는 네가 만일 이웃의 옷을 전당 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그에게 돌려보내라 그것이 유일한 옷이라 그것이 그의 알몸을 가릴 옷인즉 그가 무엇을 입고 자겠느냐 그가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들으리니 나는 자비로운 자임이니라고 말합니다.

 

 

이 법 역시 이웃의 옷을 전당잡고 돈을 꾸어준다 해도 그 옷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없게 합니다. 내 돈을 꾸어주고 전당 잡은 옷이기 때문에 돈을 갚을 때까지는 소유권이 있다고 주장한다 해도 하나님의 법 아래서는 돌려줘야 할 입장이 됩니다.

 

 

하나님이 이런 법을 이스라엘에게 주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자비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따라서 가난한 이웃을 돌보고 배려할 줄 아는 사랑 많은 이스라엘로 만들기 위한 것일까요? 이것이 법을 주신 하나님의 취지라면 무당을 살려두지 말라는 것이나, 짐승과 행음하는 자를 반드시 죽이라는 등의 법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본문의 법은 가난한 이웃을 돌보고 배려하는 마음씨 좋은 이스라엘이 되라는 뜻이 아니라 장차 약속의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이 어떤 정신으로 존재해야 할 것인가를 율법에 담아서 전달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은 지켜야 하는 법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 이스라엘로 인정되는 자가 누구인가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21절에 보면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였음이라고 말씀합니다.

 

 

애굽에서 나오기 전의 이스라엘의 본래적 실상은 나그네입니다. 그리고 가진 것 없는 힘없는 약자인 나그네로 애굽 사람에게 학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이방 나그네를 압제 한다면 그것은 자신을 힘 있는 자로 여기고 약자를 학대하는 애굽 정신을 드러내는 것일 뿐입니다.

 

 

나에게 있는 것은 내 것이라는 자기 소유에 대한 주장이 애굽 정신에 일치됩니다. 그래서 애굽 정신이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소유가 많은 것이 힘이 되고 성공이 되며, 반대로 적은 것은 힘없는 무능한 것으로 간주되며 무시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자비로 인한 것입니다. 자기 소유를 가지고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없는 나그네로 나와 들어갑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 애굽 백성들에게 받아 가지고 나온 것도 그들의 힘으로 탈취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한 것입니다.

 

 

따라서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도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를 기억하고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자비하심이 날마다 자신들을 살리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그 증거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않는 것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과부와 고아를 괴롭히는 것 자체가 자신들은 더 많이 가진 힘 있는 자로 간주한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에게 나그네가 있고 가난한 자, 고아, 과부가 존재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조성하신 상황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상황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무엇으로 사는가를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는 법이 있고, 가난한 자에게 돈을 꾸어주면 채권자 같이 하지 말고 이자를 받지 말라는 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채권자 같이 하고 이자를 받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법보다는 자신에게 힘이 되는 것을 위해 산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담으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지금의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다고 하는 것은 모두 위선이고 자기 편리주의에서 나온 착각일 뿐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담 안에서 아담과 동일한 정신으로 자기 존재의 영광과 높아짐을 위해 살면서도 하나님을 말씀을 지킨다고 하는 것이 위선이고 거짓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위선과 거짓을 알지 못하는 것이 성령 받지 못한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의 위선과 거짓을 드러내고 보게 함으로써 저주 아래 있는 죄인이라는 고백으로 주를 바라보게 하기 때문입니다.

 

 

아담의 정신은 28절의 너는 재판장을 모독하지 말며 백성의 지도자를 저주하지 말지니라는 법에서도 드러납니다.

 

 

재판장과 지도자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있게 하신 직책입니다(16:18). 이들의 역할은 백성들의 문제를 재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재판에서의 판결 기준은 하나님의 율법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이 재판장과 지도자의 판결을 받아들이고 따른다면 그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따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재판장을 모독하고 지도자를 저주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재판장과 지도자의 판결이 자신에게 불리할 때일 것입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율법, 말씀의 판결보다 자신의 이익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과 같습니다. 아담이 하나님이 되고자 하는 의도도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것과 동일한 속성이고 정신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우리는 아담과 동일한 정신으로 존재합니다. 우리가 죽은 자라는 뜻이고 저주의 존재일 뿐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우리가 예수를 주로 고백하게 되는 것은 우리의 인간성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예수가 주라는 말은 할 수 있어도 예수 앞에서 나라는 존재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생각에 의한 고백은 성령으로만 가능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하심 아래 있는 증거는 진심으로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하심을 구원으로만 연결하여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자비로 구원을 얻고, 하나님이 자비로 세상에서의 평안을 누리는 것으로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비를 저주가 당연한 우리를 저주에서 건져주신 것이라면, 예수 안에서는 우리가 입고 있는 옷 한 벌에서도 자비를 느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난하게 하셨다면 그동안 입고 먹으면 살아온 것이 하나님의 자비였음을 배우는 것이고, 부자는 가난한 자를 보면서 자신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자비로 인한 것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렇게 신자는 예수 안에서 자기의 것이 상실되어 가는 사람을 뜻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께 집중하지 않으면 오히려 하나님의 자비로 존재함을 상실하게 됩니다. 그리고 세상의 것으로 풍족해지는 자신을 꿈꾸게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 같이 되고자 했던 인간의 환상입니다. 이 환상이 깨어지고 하나님의 자비로 저주에서 건짐 받은 것이 참된 현실임을 알고 감사하게 되는 것이 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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