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2.15 16:24

(95강) 율법과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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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출 23:1-5

출 23:1-5http://onlycross.net/videos/exo/exo-230105.mp4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너는 거짓된 풍설을 퍼뜨리지 말며 악인과 연합하여 위증하는 증인이 되지 말며

2.다수를 따라 악을 행하지 말며 송사에 다수를 따라 부당한 증언을 하지 말며

3.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해서 편벽되이 두둔하지 말지니라

4.네가 만일 네 원수의 길 잃은 소나 나귀를 보거든 반드시 그 사람에게로 돌릴지며

5.네가 만일 너를 미워하는 자의 나귀가 짐을 싣고 엎드러짐을 보거든 그것을 버려두지 말고 그것을 도와 그 짐을 부릴지니라

 

<설교>

자기 행동이 바르면 복을 받고 바르지 않으면 벌을 받는다는 것은 종교심을 버릴 수 없는 인간의 본질적 성향이고 판단입니다. 선악 판단의 기준을 행동에 두는 것입니다. 이 내용을 여러분이 잘 안다 해도 자기 행동을 보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행동이 선악 기준의 판단이 되지 않고, 제아무리 바른 행동이 있다 해도 의가 되지 않음을 잘 알고 있지만 자신에 대해서든 타인에 대해서든 행동에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게 되는 것이 인간성입니다.

 

 

그런데 자기 행동을 기준으로 선악을 판단함으로써 경험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롬 8:30절의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는 말씀처럼 우리의 행위와 관계없이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신 사랑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경험하지 못하기에 사랑을 증거 하는 것이 아니라 옳다고 판단되는 자기 행위를 증거 하는 결과만 드러나게 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실감합니까? 실감하신다면 무엇이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실감하게 합니까? 대개의 기독교인들은 이런 문제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실감하는 것은 아예 기대하지 않는다는 말이 맞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능을 단순한 기적으로 이해하고, 성경에 등장하는 기적은 현재의 시대에서는 경험할 수 없다는 것으로 생각이 굳어져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전능은 현재도 계속되고 있고, 우리 또한 하나님의 전능하심으로 존재합니다. 다시 말해서 신자는 하나님이 부르신 세계, 그리스도 안에서 전능과 기적을 경험하며 존재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 됨으로써 죄인 된 자를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전능을 경험하고 확인하게 됩니다.

 

 

이처럼 의로움이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의한 결과라면 인간은 자기 의의 문제에 대해 염려하거나 의로운 자 되기 위해 행함을 살피지 않아도 됩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자유입니다. 그런데도 현실에서 드러나는 신앙의 모습은 자유가 아니라 무거운 짐에 억눌린 것뿐입니다. 율법으로 자신을 살피고 판단하려고 하기 때문에 율법에 갇혀서 신앙이 짐이 되는 결과만 초래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이유와 취지를 잘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1-3절의 너는 거짓된 풍설을 퍼뜨리지 말며 악인과 연합하여 위증하는 증인이 되지 말며 다수를 따라 악을 행하지 말며 송사에 다수를 따라 부당한 증언을 하지 말며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해서 편벽되이 두둔하지 말지니라는 하나님의 법이 여러분에게 무엇을 생각하게 합니까?

 

 

거짓된 풍설을 퍼뜨리지 말라는 것은 사실이 아닌 말, 없는 말을 함으로써 거짓 소문을 퍼뜨리지 말라는 뜻입니다. 만약 거짓된 풍설을 퍼뜨린다면 그것은 악한 감정 때문일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좋지 않은 인간관계가 거짓된 풍설을 퍼뜨리는 것으로까지 이어지는 것입니다. 악인과 연합하여 위증 한다면 악인을 위해서 거짓말을 하는 것이기에 그것 역시 좋지 않은 인간관계와 연관이 있다 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는 이런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굳이 현재 사회에서 드러나는 현상이 아니라 선악과를 먹은 인간의 역사에서 동일하게 드러나는 죄입니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이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는 하나님의 추궁에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라며 하나님과 여자에게 그 책임을 돌리는 것에서부터 자기를 위해서 자기중심으로 존재하는 인간성이 낱낱이 드러난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율법 앞에서 자신을 생각하게 되어 있습니다. 율법을 지켰는지 지키지 않았는지를 살피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처럼 거짓된 풍설을 퍼뜨린 적이 없다거나 악인과 연합하여 위증한 적이 없다고 판단되면 율법 앞에서 착한 신자가 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됩니다. 이것이 자기에게 의가 되는 방향으로만 가려고 하는 자기 사랑입니다.

 

 

자기 사랑이 없는 인간은 없습니다. 그리고 자기 사랑에 의해서 끊임없이 스스로를 살핍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세상의 도덕과 종교성을 기준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종교성에서만 벗어나지 않으면 자신을 옳다고 판단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허술한 것인가를 알지 못한 채 인간의 도덕, 종교성에만 저촉되지 않으면 신앙에 문제없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야 말로 자기 사랑에 단단히 갇혀 있는 현실을 보여준다 할 것입니다.

 

 

4-5절을 보면 네가 만일 네 원수의 길 잃은 소나 나귀를 보거든 반드시 그 사람에게로 돌릴지며 네가 만일 너를 미워하는 자의 나귀가 짐을 싣고 엎드러짐을 보거든 그것을 버려두지 말고 그것을 도와 그 짐을 부릴지니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인간관계, 인간의 감정 모든 것을 초월하지 않으면 나타날 수 없는 것입니다. 단순히 이웃의 나귀나 소가 길 잃은 것을 봤을 때라면 주인에게 돌릴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 상대가 원수이고 미워하는 자라면 문제는 달라집니다. 이웃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이 이웃의 피해를 즐기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22:1-2절을 보면 네 형제의 소나 양이 길 잃은 것을 보거든 못 본 체하지 말고 너는 반드시 그것들을 끌어다가 네 형제에게 돌릴 것이요 네 형제가 네게서 멀거나 또는 네가 그를 알지 못하거든 그 짐승을 네 집으로 끌고 가서 네 형제가 찾기까지 네게 두었다가 그에게 돌려 줄지니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실천할 수 있습니까? 할 수 있다고 생각될 것입니다. 이웃의 소나 양이 길을 잃은 것을 봤다면 당연히 알려주는 것이 옳고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형제의 범위에 원수와 미워하는 이웃까지 포함되면 문제는 달라집니다. 원수를 돕고 싶은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러한 법을 주시는 이유는 이스라엘을 수준 높은 도덕적 나라로 만들기 위한 취지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수준 높은 도덕적 나라가 된다 해도 선악과를 먹은 인간성은 애굽과 동일하고 따라서 애굽과 함께 심판에 속했을 뿐입니다.

 

 

이런 그들에게 주어진 것이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입니다.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고 자비를 베풀만한 자들이어서가 아닙니다. 광야에서 드러났던 이스라엘의 실상은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하지만 원수를 원수가 아닌 긍휼과 자비로 대하심으로 약속의 땅에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원수의 길 잃은 소나 나귀를 보든 그 사람에게 돌리라는 말씀에 담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원수에 대해서, 미워하는 사람에 대해서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원수가 생각나는 순간 하나님의 말씀은 사라지고 인간관계, 감정만 남게 됩니다. 그리고 감정에 의해 행동합니다. 우리의 인간관계는 이러한 모습으로만 드러납니다. 원수는 원수같이, 미워하는 사람은 미움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51:17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상한 심령은 신자가 자신의 죄를 봄으로 나타나는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뜻합니다. 눈물을 흘리고 울면서 회개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에게서는 의가 나올 수 없는 거짓된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됨으로써 자신에 대해 모든 가능성과 의를 포기하는 마음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상한 심령을 구하시는 것입니다.

 

 

상한 심령은 우리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성령이 오심으로 죄를 깨닫고 자신이 저주에 속한 죽은 자임을 아는 자리에서 나타나는 마음입니다. 우리를 이러한 상한 심령의 백성으로 만들기 위해 율법이 있고, 율법이 죄를 보게 하면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로 끌어가는 것입니다.

 

 

8:7절의 말씀처럼 자기를 사랑하고자 하는 육신의 생각으로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도 굴복할 수도 없습니다. 굴복하고자 하는 생각조차도 굴복으로 인한 자기 의를 추구하는 자기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는 것은 법에 의해서 저주와 죽음이라는 자기 상태를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육신의 실천으로 인한 모든 의의 가능성을 포기하고 죄인입니다는 고백이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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