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3.30 15:26

(109강) 널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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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출 26:15-17

출 26:15-17http://onlycross.net/videos/exo/exo-261517.mp4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5.너는 조각목으로 성막을 위하여 널판을 만들어 세우되

16.각 판의 길이는 열 규빗, 너비는 한 규빗 반으로 하고

17.각 판에 두 촉씩 내어 서로 연결하게 하되 너는 성막 널판을 다 그와 같이 하라

 

 

<설교>

기독교인이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것은 신앙생활을 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보편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신앙생활은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는 모른 채 자기를 위해 신을 찾는 본성으로 부지런히 기독교적인 활동을 하는 것입니다. 모든 목적과 이유와 방향을 자신에게 두고 자기를 위해 신과 정상적인 관계 유지를 위해 노력하는 것을 신앙생활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이 신과 정상적인 관계에 있다는 의미가 되고, 그것이 복과 구원을 가능하게 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자신이 책임져야 할 문제로 생각합니다.

 

 

믿음을 본인이 책임져야 한다면 우리가 흔히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배후에 계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믿음의 책임을 잘 감당하면 복을 주고 잘못하면 벌을 주는 역할을 위해 계시는 것일까요? 이것이 인간에 대해 무지한 사람의 종교적 시각입니다. 하나님이 배후에 계시는 이유가 믿음에 대해 무능한 인간을 붙들어서 하나님과의 정상적인 관계에 있게 하는 것임을 모르는 것입니다. 때문에 항상 은혜로 고백되어야 하는 믿음이 자기 자랑이 되는 것입니다.

 

 

가독교인의 큰 오해는 자신이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복과 구원을 얻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죄의 존재라는 사실에 무지한 것이고 성경이 증거 하는 인간의 실체에 대해 아예 생각을 닫아 버린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자신에게 필요하고 이익이 되는 정보를 제공하는 용도로만 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다수의 기독교인은 구약성경보다 신약성경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짙습니다. 예수를 믿는 믿음과 신앙생활에 대한 구체적인 가르침과 정보가 구약보다 신약성경에 집중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구약성경을 가볍게 생각함으로 인해서 구약이 보여주는인간은 저주의 존재라는 실체를 간과한 채 신약성경을 보기 때문에 인간에게 가능성을 둔 신앙생활이 강조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막을 만들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인간은 하나님을 만날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먼저 분명히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인간과 만나시기 위해 속죄소를 마들라고 하신 것에서 하나님과의 만남은 하나님으로 인해 가능하게 된 놀라운 은총의 사건이라는 것도 알게 됩니다. 이처럼 성막에 대한 내용을 하나하나 살펴가게 되면 인간의 가능성은 지워지고 다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은 성막을 위한 널판을 만들라는 내용입니다. 너는 조각목으로 성막을 위하여 널판을 만들어 세우되 각 판의 길이는 열 규빗, 너비는 한 규빗 반으로 하고 각 판에 두 촉씩 내어 서로 연결하게 하되 너는 성막 널판을 다 그와 같이 하라”(15-17)는 말씀으로 시작되는데 먼저 성막 널판의 용도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성막의 형태는 직사각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동쪽은 제사장이 출입하는 문으로 휘장을 만들어 치지만(36) 남쪽, 북쪽, 서쪽은 널판을 만들어 세우고 그 위에 네 겹의 덮개를 덮어 성막이 됩니다. 여기에 소요되는 널판은 남쪽 스무 개, 북쪽 스무 개, 서쪽 여섯 개, 모퉁이에 두 개로 모두 마흔 여덟 개입니다. 그리고 널판을 받칠 받침대로 은 받침을 만들라고 하신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18-25).

 

 

널판의 재료는 조각목입니다. 널판만이 아니라 증거궤와 채, 널판에 사용되는 띠 등의 모든 것을 조각목으로 만들라고 하십니다. 조각목은 아카시아 나무입니다. 성막이라는 거룩한 하나님의 집에는 크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할 수 있는 나무이기도 합니다. 차라리 솔로몬 성전 건축에 사용된 백향목이 더 어울리는 재료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생각은 성막을 잘 만드는 것이 곧 하나님께 기쁨과 영광이 된다는 사고방식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막을 만들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보다는 성막을 통해서 얻을 유익에만 관심을 두는 것입니다. 마치 앞에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신앙생활 잘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복을 주신다는 것과 일치되는 사고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카시아 나무인 조각목에서 먼저 생각할 것은 가시나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가시는 특별한 의미로 출발합니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에게 저주하신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3:18)는 말씀에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가시가 하나님의 저주를 상징한다는 점에서 조각목은 단순한 나무로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삼하 23:6절의 그러나 사악한 자는 다 내버려질 가시나무 같으니 이는 손으로 잡을 수 없음이로다라는 말에서는 가시나무를 내버려질 사악한 자로 언급합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고후 12:7절에서 가시를 사탄의 사자로 빗대어 말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가시에 내포된 의미를 생각해 보면 조각목은 저주 받은 존재로 버림받아야 할 사악한 자가 곧 이스라엘이라는 것을 보게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조각목이 저주 받은 인간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조각목 그대로 하나님의 거룩한 성막의 재료로 사용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조각목을 금으로 싸라는 말씀과 연결하여 이해할 수 있습니다.

 

 

29절에서 그 널판들을 금으로 싸고 그 널판들의 띠를 꿸 금 고리를 만들고 그 띠를 금으로 싸라고 말씀하는 것처럼 조각목으로 된 널판과 띠를 금으로 싸게 하십니다. 이 외에도 증거궤와 떡을 진열하는 상 등 성막에 사용된 조각목들은 금으로 싸이게 됩니다. 이것은 마치 조각목의 가시가 의미하는 저주가 금에 싸이는 것을 연상하게 합니다.

 

 

25장에 보면 증거궤는 조각목으로 만들어 금으로 싸지만 그 위에 얹게 되는 속죄소는 순금으로 만듭니다. 그리고 순금으로 된 속죄소 위에 희생 제물의 피가 뿌려짐으로써 증거궤의 물건이 의미하는 이스라엘의 죄가 용서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하면 조각목을 금으로 싸게 하신 것은 저주 아래 있는 인간을 희생 제물의 피로 인한 용서의 은혜 안에 있게 하신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것으로 성막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가 넘치는 거룩한 집으로 이스라엘 안에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거룩한 성막의 재료로 사용될 가치가 없는 조각목이 금으로 싸임으로 인해서 성막의 재료가 되는 영광을 입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한 자로 부름 받은 신자가 입은 영광입니다.

 

 

바울이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3:16)라고 말한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으로 불릴 가치가 있습니까? 그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실 만큼 깨끗한 심령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되어진 혜택들입니다. 이것을 생각하면 신자는 하나님의 성전 된 것만으로도 무한한 복과 영광에 참여되어 있는 것입니다.

 

 

널판에 대해 한 가지 더 생각할 것은 모든 널판이 띠로 인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널판이 하나하나 독립적인 객체로 성막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묶여진 관계로 사용된다는 점에서 교회의 의미를 생각하게 합니다. 교회는 성령으로 하나 된 관계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띠로 연결된 널판 모두가 조각목이기에 자신을 자랑할 수 없는 것처럼 교회는 모두가 죄의 존재로 하나님께 서게 된다는 점에서 동일합니다. 또한 예수의 피로 죄가 용서된 거룩한 존재로 부름 받았다는 점에서도 동일합니다. 이것이 성막 널판이 증거 하는 교회 됨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현대 교회가 알고 있고 목적하는 교회는 위선이고 거짓으로 판단될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는 모두가 죄로 인해 저주 받은 인간으로, 무능하고 무가치한 자로 함께 합니다. 그리고 모든 죄가 예수님의 피의 은혜에 싸인 자로 존재합니다. 이 모든 것이 의미하는 것은 교회는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만 높이고 자랑할 뿐 인간의 의는 언급될 수도 자랑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충만해야 하는 것은 저주 받은 자에게 베풀어진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자비입니다. 이것을 위해 교회가 결코 잊으면 안될 것은 저주 받은 죽음의 존재를 하나님이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하면 신자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영광입니다. 오직 하나님이 택하시고 부르신 백성에게만 있는 영광이 우리의 영원한 기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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