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6.29 15:52

(119강) 속죄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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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출 29:10-14

출 29:10-14http://onlycross.net/videos/exo/exo-291014.mp4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0.너는 수송아지를 회막 앞으로 끌어오고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그 송아지 머리에 안수할지며

11.너는 회막 문 여호와 앞에서 그 송아지를 잡고

12.그 피를 네 손가락으로 제단 뿔들에 바르고 그 피 전부를 제단 밑에 쏟을지며

13.내장에 덮인 모든 기름과 간 위에 있는 꺼풀과 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을 가져다가 제단 위에 불사르고

14.그 수소의 고기와 가죽과 똥을 진 밖에서 불사르라 이는 속죄제니라

 

 

<설교>

신자는 모든 죄가 용서된 사람입니다. 하지만 죄가 용서 된 것이 전부가 아니라 죄를 용서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며 기뻐하는 것이 있어야 신자입니다. 즉 자신의 죄가 용서되고 구원 받았다는 것으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도무지 용서 받을 수 없는 죄의 존재를 용서하신 사랑의 위대함을 알게 되고 그것이 감사와 기쁨이 되는 사람이 신자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자는 십자가를 용서와 구원의 용도가 아닌 하나님의 사랑이 증거 되는 현장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자기 구원이 아닌 독생자 예수를 십자가에서 저주 받은 자로 죽게 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에 마음을 두는 신자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사장 위임식에 등장하는 속죄제 또한 그러한 시각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속죄제는 말 그대로 죄를 용서받기 위한 제사입니다. 따라서 제사장 위임식에 속죄제를 드리라는 것은 제사장 역시 이스라엘 백성과 동일하게 용서 받아야 할 죄의 존재임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10절의 너는 수송아지를 회막 앞으로 끌어오고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그 송아지 머리에 안수할지며라는 말씀에서도 드러납니다. 제물로 끌려 나온 송아지 머리에 안수하는 것은 죄를 전가시키는 의미인 것이고, 그것은 곧 위임받는 제사장 역시 용서 받아야 할 죄인임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속죄제를 단지 제사장의 죄를 용서하기 위한 것으로만 이해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속죄제는 제사장의 죄를 용서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될 것입니다. 지금의 기독교인들이 십자가를 자기 구원을 위한 죄 용서의 도구와 수단으로만 여기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것이 십자가로 드러나는 하나님의 마음은 외면하고 자신에게만 모든 관심을 두고 살아가는 인간의 악함입니다.

 

 

하나님은 속죄제 제물로 끌려 나온 송아지를 회막 문 여호와 앞에서 잡으라고 합니다. 송아지가 죽어야 하는 이유는 송아지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송아지의 머리에 안수한 아론과 그 아들들, 즉 인간에게 있습니다. 인간의 죄를 짊어졌기에 대신 죄의 값으로 죽임을 당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론과 그 아들들은 송아지가 죽임을 당하는 것을 보면서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서 죽임을 당해야 할 죄의 존재임을 마음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데 만약 속죄제를 죄 용서를 위한 수단으로만 생각한다면 송아지가 눈앞에서 죽임을 당하는 것을 목격하면서 자신이 죽음의 존재라는 사실은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속죄제를 드렸으니 죄를 용서 받았다는 떳떳함으로 하나님께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속죄제는 제사장으로 하여금 죄인으로 하나님께 나오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죄인이라는 사실만 알고 있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죄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히 여기심의 은총이 마음에 담긴 자로 하나님을 찾는 것이 제사장을 세우시는 하나님의 취지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제사장을 세워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가르치고자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사장이 속죄제의 의미를 모른다면 어떻게 될까요? 자신이 제사장이라는 것만 과시하려고 할 것입니다. 제사를 주관하는 거룩한 제사장으로 백성들보다 하나님과 더 가까운 관계에 있으며 백성들을 대신해서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것을 내세우며 대접을 받고자 할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현재 사회에서 목사가 일반 신자에 비해서 거룩한 존재로 대접받고자 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제사장이 속죄제의 의미를 모른 채 속죄 제사를 드리는 것처럼, 목사 또한 십자가의 의미를 모른 채 예수를 말하고 예배를 인도하고 설교를 하면서 목사라는 허울 좋은 직책만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12-14절을 보면 그 피를 네 손가락으로 제단 뿔들에 바르고 그 피 전부를 제단 밑에 쏟을지며 내장에 덮인 모든 기름과 간 위에 있는 꺼풀과 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을 가져다가 제단 위에 불사르고 그 수소의 고기와 가죽과 똥을 진 밖에서 불사르라 이는 속죄제니라고 말씀합니다.

 

 

제물로 끌려 나온 송아지는 온 몸이 해체되어 불에 태워집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제물이 겪는 모든 것은 죄로 인해 저주 받을 인간이 당해야 할 것들입니다. 인간이 죄로 인해 어떤 처지에 있는가를 제물을 보면서 그 모든 죄를 용서하신 사랑의 크심을 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이 그 사랑을 깨닫고 사랑에 의해 살아가는 자신들의 현실로 인해 감사하게 하는 것이 제사장을 세우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9장에 보면 긍휼의 그릇과 진노의 그릇에 대한 내용이 있습니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있다는 것입니다. 귀히 쓰는 그릇은 긍휼의 그릇이고 천히 쓰는 그릇은 진노의 그릇입니다. 그리고 진노의 그릇은 지옥으로 들어가고 긍휼의 그릇은 천국으로 들어갑니다. 이 모든 것이 토기장이, 즉 하나님의 권한이라는 것은 긍휼의 그릇으로 쓰임 받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진노의 그릇에 비해 그릇 자체가 가치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릇의 재질이 다르거나 귀하게 쓸 가치가 있는 그릇이었다면 토기장이의 권한이 아니어도 그릇은 구별될 것입니다. 하지만 긍휼의 그릇이든 진노의 그릇이든 동일한 진흙으로 만들어집니다. 그래서 어떤 그릇으로 사용하는가는 전적으로 토기장이의 권한입니다. 그렇다면 긍휼의 그릇은 자신이 귀하게 쓰는 그릇임을 자랑할 것이 아니라 진노의 그릇과 다르지 않은 자신을 긍휼이 그릇으로 사용하는 토기장이의 뜻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긍휼의 그릇은 하나님의 긍휼이 담긴 그릇이라는 뜻입니다. 그릇이 귀한 것이 아니라 긍휼이 귀하기 때문에 귀히 쓰는 그릇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제사장이며 신자입니다. 즉 제사장은 하나님의 긍휼을 담아 이스라엘에게 전달할 용도로 부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긍휼을 속죄제에 끌려 나와 불에 태워지는 제물을 통해서 배우라는 것이 속죄제에 담긴 의미입니다.

 

 

긍휼은 그릇이 스스로 담을 수 없습니다. 그릇이 스스로 자신에게 담고자 하는 것은 자기를 위한 것입니다. 자기 이름과 영광에 힘이 되는 것을 담기 위해 살아갑니다. 하지만 결국 담기는 것은 죄일 뿐이고 그래서 진노의 그릇으로 쓰이는 것입니다.

 

 

반면에 긍휼의 그릇은 죄가 전혀 담기지 않은 것이 아니라 담겨 있는 죄를 하나님의 긍휼이 덮고 있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때문의 긍휼의 그릇은 자신에게 담긴 죄를 보면서 긍휼로 그 모든 죄를 덮으신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진노의 자식을 불쌍히 여기시고 구원하셔서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감사와 기쁨이 되는 그릇으로 세상에 남겨 놓으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죄를 드러내고 죄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실감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4:12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라고 말씀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죄를 드러냅니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우리에게 개입하심으로 죄가 고스란히 드러나고 죄로 말미암아 긍휼하심에 마음을 두게 되는 그것이 구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 받은 신자는나 구원 받았다가 아니라 구원하신 주만 바라보면서 구원의 능력이 되는 주의 공로만 자랑하는 것입니다.

 

 

죄의 존재인 우리를 무엇이 신자 되게 했을까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입니다. 때문에 구원 받은 신자는 십자가에 피 흘리신 주만 보게 됩니다. 이러한 신자가 함께 하는 교회는 교회를 어떻게 만들까?’를 궁리하는 것이 아니라 주만 자랑하는 것에 마음을 둘 뿐입니다. 이것이 긍휼의 그릇으로 사는 것입니다.

 

 

벧전 2장에서 신자는 제사장으로 지칭합니다. 그렇다면 제사장인 우리에게 속죄제 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제물로 삼아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 것입니다. 뻔한 내용이라고 흘려듣지 마시고 과연 십자가로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하심이 담긴 그릇으로 사는가를 생각하십시오. 사랑과 긍휼이 담긴 그들이 제사장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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