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8.03 15:35

(124강) 생명의 속전

조회 수 1889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Extra Form
성경본문 출 30:11-16

출 30:11-16http://onlycross.net/videos/exo/exo-301116.mp4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1.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2.네가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를 조사할 때에 조사 받은 각 사람은 그들을 계수할 때에 자기의 생명의 속전을 여호와께 드릴지니 이는 그것을 계수할 때에 그들 중에 질병이 없게 하려 함이라

13.무릇 계수 중에 드는 자마다 성소의 세겔로 반 세겔을 낼지니 한 세겔은 이십 게라라 그 반 세겔을 여호와께 드릴지며

14.계수 중에 드는 모든 자 곧 스무 살 이상 된 자가 여호와께 드리되

15.너희의 생명을 대속하기 위하여 여호와께 드릴 때에 부자라고 반 세겔에서 더 내지 말고 가난한 자라고 덜 내지 말지며

16.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속전을 취하여 회막 봉사에 쓰라 이것이 여호와 앞에서 이스라엘 자손의 기념이 되어서 너희의 생명을 대속하리라

 

 

<설교>

우리가 천국에 가고 싶고 영생을 얻고 싶고 복을 받고 싶다 해도 원하는 대로 되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에 문제가 있거나 열심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성품이 선하지 못해서도 아닙니다. 설령 세상이 성인으로 칭송할 정로로 성화되어 하나님께 나아간다 해도 천국의 문은 열리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처한 진짜 현실입니다. 이 현실을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한다면 참된 믿음의 세계 또한 알 수 없습니다.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죽은 이유를 생각해 보십시오. 세상의 기준으로 판단한다면 이들에게 저주의 심판을 받아야 할 악한 행위는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들을 심판의 불로 죽이신 이유는 하나님이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로 분향 한 것 때문입니다. 다른 불로 향을 사르는 것이 하나님께 향기로운 냄새가 아니라 진노를 일으키는 냄새가 되어 심판으로 되돌아온 것입니다. 따라서 다른 불로 분향한 것에 대해 진노하신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면 인간의 참된 현실도 알지 못하고 인간이 원하는 현실만 고집하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도 예외가 아닙니다. 생명의 속전을 여호와께 드리라는 말씀에서 하나님이 인간을 어떻게 보시는지를 찾지 못하면 우리는 인간이 처한 현실에 대해서는 보지 못한 채 다만 인간이 추구하는 믿음의 세계만 고집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고 신앙한다는 명목으로 행해지는 우리의 모든 것은 오히려 하나님을 진노하게 하는 냄새가 되어 심판으로 되돌아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11,12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가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를 조사할 때에 조사 받은 각 사람은 그들을 계수할 때에 자기의 생명의 속전을 여호와께 드릴지니 이는 그것을 계수할 때에 그들 중에 질병이 없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속전은죄를 면제 받기 위해 바치는 돈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생명의 속전은 죄가 용서되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바치는 돈이라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하지만 우리의 죄는 돈으로 면제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피로도 죄는 면제가 아니라 용서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생명이든 죄든 우리가 바치는 속전으로 해결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속전을 바치라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여기에서 인간이 하나님 앞에 어떤 마음 자체로 나와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13절을 보면 무릇 계수 중에 드는 자마다 성소의 세겔로 반 세겔을 낼지니 한 세겔은 이십 게라라 그 반 세겔을 여호와께 드릴지며라고 말씀합니다.

 

 

반 세겔은 당시 노동자의 이틀 품삯이라고 합니다. 생명의 속전으로 바치라고 하기에는 너무 작은 액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노동자와 같은 빈곤한 사람에게는 반 세겔이 적당할 수 있겠지만 부자에게는 하찮은 액수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부자와 가난한 자에 대해 차등을 두면 어떨까요? 각기 형편에 따라 속전을 바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공평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의 공평은 모두가 동일한 죄 아래서 심판을 받아야 할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생명의 속전으로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15절을 보면 너희의 생명을 대속하기 위하여 여호와께 드릴 때에 부자라고 반 세겔에서 더 내지 말고 가난한 자라고 덜 내지 말지며라고 말씀합니다.

 

 

부자, 가난한 자라는 세상의 형편에 따라 속전의 액수가 달라지지 않습니다. 이것은 생명을 대속하는 문제에서 모든 인간은 동일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즉 모든 인간은 세상에서의 존재 위치와 형편을 초월하여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죄가 용서되어야 생명을 얻는 처지에 있을 뿐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13절에서 성소의 세겔로 반 세겔을 내라고 합니다. 성소의 세겔은 성소에서 사용되는 세겔이라는 뜻이고, 이것이 나중에 유대사회에서 성전세가 됩니다. 이처럼 성소의 세겔로 생명의 속전을 내게 하는 이유는 속전을 어디에 사용하는 가로 알 수 있습니다.

 

 

16절을 보면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속전을 취하여 회막 봉사에 쓰라 이것이 여호와 앞에서 이스라엘 자손의 기념이 되어서 너희의 생명을 대속하리라고 말씀합니다.

 

 

회막 봉사는 속죄 제물을 바쳐서 제사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성막은 제사가 있음으로 유지됩니다. 다시 말해서 속전을 회막 봉사에 사용함으로써 회막 봉사가 유지되고, 회막 봉사를 통해서 죄가 용서되는 속죄가 있고 그로 인해 생명을 얻는다는 뜻으로 이해되는 것입니다.

 

 

성막의 중심은 거룩한 제물의 피로 인한 속죄입니다. 속죄의 기능으로 존재하는 것이 성막이며 성전입니다. 따라서 누구든 성막을 자기 복과 구원을 위한 도구나 방법으로 이용한다면 그것은 다른 불을 담아 분향하는 나답과 아비후와 다르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흘리는 제물의 피와 희생을 마음에 두지 않은 분향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다른 불의 의미입니다. 이것이 지금의 우리가 예수의 피로 말미암은 속죄를 잊은 채 자기 구원과 복에 뜻을 두고 예수를 찾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14절에 보면 계수 중에 드는 모든 자 곧 스무 살 이상 된 자가 여호와께 드리되라고 말씀합니다.

 

 

속전을 드리는 일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백성으로 계수되는 스무 살 이상 된 모든 자는 속전을 드려야 합니다. 계수되는 사람들의 행동이나 성품은 모두 동일하지 않습니다. 착하다고 인정받을 수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과 무관하게 스무 살 이상 된 모든 성인은 속전을 드려야 합니다. 이러한 내용이 의미하는 것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인간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속전을 바치면서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속전의 의미를 모르게 되면 인간은 결국 다른 죄를 만들어 내게 됩니다. 속전을 바치는 것을 이스라엘다운 신앙의 행동으로 여긴다면 바치지 않는 것을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엄중한 죄로 규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행위에 초점을 두는 잘못됨입니다.

 

 

속전을 바치지 않는 것이 죄가 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말씀드린 것처럼 속전은 회막 봉사에 사용됩니다. 회막 봉사에는 죄가 용서되는 기능이 있습니다. 따라서 속전을 바치는 것은 회막 봉사를 통해서 죄가 용서되지 않으면 안되는 자신을 바라보는 고백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속전을 바치지 않는 것은 단지 하나님께 바쳐야 할 돈을 바치지 않는 죄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죄가 용서되어야 할 존재로 보지 않는 죄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속전을 바치는 것에 초점을 두고 하나님이 마치 바치는 것을 받아주시는 것처럼 오해함으로써 지금도 교회가 바치는 것을 신앙의 행위로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의 처지와 현실에 대해서는 무지하고 무관심하다는 증거로 드러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불을 담아 분향하는 나답과 아비후에게서 현대 교회의 실상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21:6절에 보면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라고 말합니다.

 

 

속죄를 받아야 할 죽음의 존재인 우리에게 생명수 샘물은 가장 가치 있는 존귀한 것입니다. 존귀한 것이 값없이 주어졌습니다. 값없이 주어진 것은 값없이 받아야 합니다. 때문에 생명의 문제 앞에서는 어떤 인간도 자신의 공로든 무엇이든 자신의 것을 내어 놓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세상에 존재하는 일평생 동안 우리의 생생한 현실로 존재해야 합니다. 그것이 참된 믿음의 세계입니다.

 

 

지금의 우리에게 반 세겔의 생명의 속전은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이 생명의 속전으로 하나님께 바쳐짐으로 우리의 속죄가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속전으로 바쳐지고 다 이루었다고 하신 그리스도께 속한 것이 신자이기 때문에 참된 믿음을 아는 신자는 그리스도의 피로 죄가 용서된 자로 함께 하게 되는 것입니다.

 

 

부자든 가난한 자든 신자는 세상에서의 형편과 처지를 넘어서 예수의 피로 용서 받은 자로 함께 합니다. 말씀을 다 이루신 예수님으로 인해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에 감사하는 사람으로 함께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피로 세워진 교회이기에 교회는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그리스도의 피만 높이고 자랑합니다. 교회가 증거 할 것은 다만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입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성경본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설교 원고는 없습니다 신윤식 2022.01.01 940
공지 암, 옵, 욘 성경강해 방으로 옮겼습니다. 신윤식 2011.02.28 7264
공지 이전 홈페이지 수요일설교 들어가기 은석교회 2010.01.01 40055
139 출 33:1-6 (135강) 장신구를 떼어 내라 신윤식 2020.06.06 24547
138 출 32:30-35 (134강) 여호와의 책 신윤식 2020.05.30 859
137 출 32:25-29 (133강) 헌신 신윤식 2020.05.23 1384
136 출 32:15-20 (131강) 깨어진 돌판 1 신윤식 2020.05.19 409
135 출 32:21-24 (132강) 추궁과 변명 신윤식 2020.05.16 880
134 출 32:7-14 (130강) 모세의 기도 신윤식 2019.09.28 2114
133 출 32:1-6 (129강) 금송아지 신윤식 2019.09.21 625
132 출 31:12-18 (128강) 안식일 신윤식 2019.09.07 680
131 출 31:1-11 (127강) 지혜 신윤식 2019.08.31 516
130 출 30:22-33 (126강) 거룩한 관유 신윤식 2019.08.24 711
129 출 30:17-21 (125강) 물두멍 신윤식 2019.08.17 802
» 출 30:11-16 (124강) 생명의 속전 신윤식 2019.08.03 1889
127 출 30:1-10 (123강) 분향할 제단 신윤식 2019.07.27 593
126 출 29:38-46 (122강) 늘 드릴 번제 신윤식 2019.07.20 534
125 출 29:26-28 (121강) 요제물과 거제물 신윤식 2019.07.13 1960
124 출 29:19-25 (120강) 위임식의 숫양 신윤식 2019.07.06 595
123 출 29:10-14 (119강) 속죄제 신윤식 2019.06.29 563
122 출 29:1-9 (118강) 제사장 위임 신윤식 2019.06.21 517
121 출 28:40-43 (117강) 제사장 직분 신윤식 2019.06.08 619
120 출 28:36-39 (116강) 패 신윤식 2019.06.01 547
Board Pagination Prev 1 ... 4 5 6 7 8 9 10 11 12 13 ... 15 Next
/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