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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6:20-27http://onlycross.net/videos/exo/exo-062027.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20.아므람은 그들의 아버지의 누이 요게벳을 아내로 맞이하였고 그는 아론과 모세를 낳았으며 아므람의 나이는 백삼십칠 세였으며

21.이스할의 아들들은 고라와 네벡과 시그리요

22.웃시엘의 아들들은 미사엘과 엘사반과 시드리요

23.아론은 암미나답의 딸 나손의 누이 엘리세바를 아내로 맞이하였고 그는 나답과 아비후와 엘르아살과 이다말을 낳았으며

24.고라의 아들들은 앗실과 엘가나와 아비아삽이니 이들은 고라 사람의 족장이요

25.아론의 아들 엘르아살은 부디엘의 딸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였고 그는 비느하스를 낳았으니 이들은 레위 사람의 조상을 따라 가족의 어른들이라

26.이스라엘 자손을 그들의 군대대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라 하신 여호와의 명령을 받은 자는 이 아론과 모세요

27.애굽 왕 바로에게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내보내라 말한 사람도 이 모세와 아론이었더라

 

 

<설교>

하나님은 다시 모세에게 바로에게 가서 하나님의 말씀 전하라고 하고, 모세는 자신은 입이 둔하다고 하면서 ‘이스라엘도 자기 말을 듣지 않는데 바로가 듣겠는가?’라며 실현성이 없는 일이라는 자기 입장을 고수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모세의 말을 듣지 않으시고 거듭 바로에게 말하라고 하시고(29절) 모세는 여전히 입이 둔하다는 자기 입장만 내세웁니다(30절). 그런데 이러한 대화 중간에 갑자기 아론과 모세의 족보가 등장하는 것이 이상합니다.

 

 

대개의 기독교인들은 족보에 대해 크게 의미를 두지 않으려고 합니다. 우리가 이해하는 족보처럼 한 가문의 번성과 그 후손에 대한 이야기로만 여기는 정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족보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의도가 분명히 있습니다. 때문에 족보 이야기도 간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 모세는 자신이 바로에게 간다고 해서 달라질 것이 없다는 현실적인 문제만 생각합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바로에게 가서 경험한 것이 실패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 모세가 바로를 만난 결과는 실패 그 자체였습니다.

 

 

 바로는 여호와를 무시했고 오히려 이스라엘의 노역을 가중시켰으며 그로 인해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원망을 들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지만 마음이 상한 그들은 아예 듣지 않았습니다. 그런 현실에서 바로가 모세의 말을 들을 것을 기대하기는 무리입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이 하신다는 믿음으로 가면 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말씀드린 것처럼 모세가 경험한 현실은 ‘하나님이 가라고 해서 갔는데 실패했다’는 것입니다. 그 경험이 모세로 하여금 ‘다시 가도 너는 안된다’는 생각에 붙들리게 한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고 족보 이야기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본문의 족보에는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야곱의 열 두 아들이 모두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르우벤, 시므온, 레위만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14절에서 르우벤의 아들들을 말하고, 15절에서는 시므온의 아들들, 16절에서는 레위의 아들들의 이름을 말합니다. 그리고 17절부터도 계속 레위의 후손들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것도 이상한 것은 르우벤과 시므온의 아들들이 언급되긴 하지만 레위의 후손에 대한 내용으로 집중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20절에 보면 “아므람은 그들의 아버지의 누이 요게벳을 아내로 맞이하였고 그는 아론과 모세를 낳았으며 아므람의 나이는 백삼십칠 세였으며”라고 말합니다.

 

 

아론과 모세의 족보를 말하고자 한 것이라면 르우벤과 시므온에 대한 내용은 없어도 됩니다. 그런데 굳이 르우벤과 시므온의 아들들에 대해서는 말하면서 나머지 아들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부터 생각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창 49장에 보면 야곱이 아들들을 불러 축복을 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리고 3-7절까지는 르우벤과 시므온과 레위에 대한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들 세 사람에 대한 축복의 내용을 보면 공통점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도무지 축복이라고 할 수 없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창 49:7절을 보면 시므온과 레위에 대해서 “그 노여움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고 말합니다. 아예 저주의 말을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본문의 족보에 등장하는 세 사람은 야곱에게 저주의 말을 들은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저주 받은 가문입니다.

 

 

르우벤은 야곱의 첩 빌하와 동침을 한 사람이고 시므온과 레위는 여동생 디나가 세겜의 족장 아들에게 강간을 당한 일로 인해서 세겜의 남자를 모두 죽이는 복수를 했습니다. 그러 인해 야곱이 저주의 말을 한 것입니다.

 

 

저주 받은 가문이라면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 것은 몰락입니다. 그런데 본문의 족보를 보면 저주 받은 가문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르우벤이나 시므온은 동일하게 아들을 낳고 번성합니다. 특히 레위의 가문은 아론과 모세로까지 이어지고 하나님은 모세와 아론을 불러서 애굽으로 보내시며 이스라엘의 출애굽이라는 큰일에 앞장세웁니다.

 

 

족보를 통해서 드러나는 것은 모세는 저주 받은 가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저주 받은 가문의 모세를 지금껏 존재하게 한 것은 무엇일까요? 모세만이 아니라 저주 받은 가문인 르우벤과 시므온 레위 모두를 몰락하지 않고 존재하고 번성하게 된 것이 무엇일까요? 우리가 내릴 수 있는 답은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긍휼뿐입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긍휼 덕분이라는 것 밖에 달리 할 말이 없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법으로 이들 가문을 다스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당연히 심판하셨을 것입니다. 그것이 저주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이들 가문이 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이 다스렸기에 존재한다는 것이 모세에게 하나님의 율법이 주어지는 것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율법을 받아 산에서 내려왔을 때 아론은 백성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금송아지를 만들어 하나님으로 이름하고 춤추며 섬기고 있었습니다. 모세가 받은 율법에 의하면 이스라엘은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모세는 율법을 깨뜨려 버리고 출 32:30-33절에서는 이스라엘의 용서를 위해 하나님께 죄를 사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법을 지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용서만이 이스라엘이 존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모세가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에 의한 용서가 이스라엘을 책임지고 있으며 그로 인해 이스라엘을 존재하게 된다는 것을 모세가 처음에는 몰랐습니다. 자신이 이스라엘을 책임져야 하는 것으로만 알았던 것입니다.

 

 

모세가 ‘나는 입이 둔한 자이오니’라는 말을 반복하는 것은 바로에게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는 것을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나가게 하는 것이 자신이 해야 할 자기 책임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은 입이 둔해서 그 일을 할 수 없다는 것만 반복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책임지고 계신 분은 하나님이시고, 모세조차도 하나님이 책임지고 계신다는 것을 족보 이야기를 통해서 보이시는 것입니다. 저주 받은 가문의 모세에게 찾아오시고 부르시고 애굽으로 보내시는 것도 이스라엘을 무엇으로 존재하는가를 알게 하기 위함인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롬 11:22절을 보면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준엄하심이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고 말합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인자에 의해 존재한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인자하심이 우리 가운데 있어 그 혜택을 누리게 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저주의 가문에 속한 자로서 하나님의 준엄하심에 의해 찍혀 버린바 되어야 하지만 인자하심이 우리를 붙들고 있는 이것이 우리의 존재 근거인 것입니다. 이것을 알지 못하면 자신의 신앙을 자기가 책임지려고 하게 됩니다.

 

 

잘 믿어야 한다는 것도 스스로를 책임지려는 발상일 뿐입니다. 잘 믿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잘 믿고 잘 믿지 않는 것이 우리의 의지와 노력에 의해 달라지는 문제가 아님을 알자는 것입니다.

 

 

신자로서 잘 믿는 것은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이 나를 붙들고 있음을 믿고 나의 행함이 나를 신자 되게 하는 것이 아님을 아는 자로 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에만 머물러 사는 것이 가장 잘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말을 잘하고 못하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슨 말을 하는지가 중요합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는 고백을 더듬거리며 했든 유창한 말로 했든 진심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머무르고자 하는 그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으로 삽니까? ‘나는 입이 둔해서 안됩니다’라고 말하는 모세는 저주의 가문에 속한 자신이 무엇으로 사는지를 몰랐습니다. 우리도 저주에 가문에 속한 존재였습니다. 그런 우리가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하심으로 거룩한 예수님의 가문에 속하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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