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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7:8-13http://onlycross.net/videos/exo/exo-070813.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8.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9.바로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이적을 보이라 하거든 너는 아론에게 말하기를 너의 지팡이를 들어서 바로 앞에 던지라 하라 그것이 뱀이 되리라

10.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가서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행하여 아론이 바로와 그의 신하 앞에 지팡이를 던지니 뱀이 된지라

11.바로도 현인들과 마술사들을 부르매 그 애굽 요술사들도 그들의 요술로 그와 같이 행하되

12.각 사람이 지팡이를 던지매 뱀이 되었으나 아론의 지팡이가 그들의 지팡이를 삼키니라

13.그러나 바로의 마음이 완악하여 그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더라

 

<설교>

모세와 아론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애굽으로 가서 “바로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이적을 보이라 하거든 너는 아론에게 말하기를 너의 지팡이를 들어서 바로 앞에 던지라 하라 그것이 뱀이 되리라”(9절)는 말씀대로 아론이 바로와 그의 신하 앞에서 지팡이를 던지자 지팡이가 뱀이 됩니다.

 

 

모세와 아론은 이 이적이 바로에게 어떤 영향을 주기를 기대하지 않았을까요? 아무 기대도 없이 단지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는 이유 하나로 지팡이를 던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지팡이가 뱀이 되는 것은 놀라운 이적이기 때문에 바로가 자신들이 믿는 하나님의 능력에 놀라는 결과를 기대 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상황은 전혀 다르게 흘러갑니다. 11절의 “바로도 현인들과 마술사들을 부르매 그 애굽 요술사들도 그들의 요술로 그와 같이 행하되”라는 말씀처럼 바로가 부른 애굽의 요술사들도 지팡이를 던져서 뱀이 되게 한 것입니다. 자신의 요술사들도 아론과 같은 이적을 행하는 것을 본 바로가 모세와 아론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은 예상된 결과입니다.

 

 

그런데 12절을 보면 “각 사람이 지팡이를 던지매 뱀이 되었으나 아론의 지팡이가 그들의 지팡이를 삼키니라”고 말합니다.

 

 

우린 이 내용을 보면서 아론의 지팡이가 요술사의 지팡이를 삼켰으니까 아론이 더 강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삼킨 것은 승리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결과는 바로의 마음이 완악하여 모세와 아론을 말을 듣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면 모세와 아론이 바로를 만난 일은 아무런 성과도 없이 끝난 것일까요? 적어도 드러난 표면적으로는 그렇습니다. 모세와 아론이 바로를 만나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여 지팡이를 던져 뱀이 되는 이적을 행한 일은 아무런 성과 없이 끝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일에 대한 이 같은 시각이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지 못하게 하는 높은 장벽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일하심은 우리가 생각하고 기대하는 성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끊임없이 성과를 기대하기 때문에 성과가 없다고 생각되면 실망하면서 성과를 기대할 있는 일에 마음과 관심이 기우는 것입니다.

 

 

출 4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손에 있는 지팡이를 던지라 하시고 지팡이가 뱀이 되는 이적을 보이셨습니다. 다시 모세에게 손을 내밀어 뱀의 꼬리를 잡으라 하시고 모세가 꼬리를 잡자 다시 지팡이가 됩니다.

 

 

뱀이 되었던 지팡이가 모세의 손에서 다시 지팡이가 되는 것은 하나님이 모세를 애굽으로 보내어 하실 일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뱀은 애굽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모세가 뱀의 꼬리를 잡자 지팡이가 되어 모세의 손에 쥐어져 있는 것은 하나님이 애굽을 이미 모세의 손에 붙여 놓으셨음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아론의 지팡이가 애굽 요술사의 지팡이를 삼키는 것으로 다시 보여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지팡이가 지팡이를 삼키는 것은 누구의 지팡이가 더 강한가를 보여주고자 함이 아닙니다. 지팡이는 지팡이일 뿐 더 강한 지팡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다만 누구의 손에 쥐어진 지팡인지가 다를 뿐입니다.

 

 

출 4장에서 지팡이가 뱀이 되는 이적을 보이신 뒤에 모세의 손이 문둥병에 걸렸다가 다시 깨끗해지는 것을 경험하게 합니다. 하나님은 이것으로 이스라엘이 어떤 현실 아래 있는가를 보이십니다.

 

 

문둥병은 저주를 상징하며 그것이 인간이 처한 현실입니다. 애굽도 이스라엘도 죄로 인해 저주 아래 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그들을 치료하여 깨끗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모세를 애굽으로 보내시는 것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출해 내고자 하시는 목적에 의해서가 아니라 애굽과 동일하게 문둥병 걸린 저주의 존재인 그들을 깨끗한 자로 치료하시겠다는 뜻에 의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애굽은 저주 아래 있는 심판의 존재 그대로일 뿐입니다. 이것이 지팡이가 뱀이 되고 지팡이가 지팡이를 삼키는 이적에 담긴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아론의 지팡이도 뱀이 되었고 애굽 요술사의 지팡이도 뱀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과 애굽의 동일한 본질입니다. 하지만 극명하게 다른 것은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 아래 있고 애굽은 언약 밖에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언약에 의해서 치료를 받아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의 자리에 서게 됩니다. 하지만 애굽은 부요, 강함과 상관없이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심판의 존재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누구를 복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 아래 있고 애굽은 내어버려두신 상태입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은 하나님의 언약 아래 있는 자와 내어버려두신 상태에 있는 자로 구분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택한 자와 택하지 않은 자의 다른 점입니다.

 

 

롬 1:28절에 보면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라고 말합니다.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신 것이 세상의 형편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문둥병에 걸린 저주의 상태 그대로 살다가 저의 심판으로 종결될 인생에 속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생이 돈이 있고 권력이 있다 해서 가치 있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상실한 마음은 가치 없는 마음을 의미합니다. 우리도 가치 없는 상실한 마음으로 살아가던 사람들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우리 마음에 믿음을 주시고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해서 가치 없는 더러운 마음이 깨끗함을 받은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하신 선한 일입니다.

 

 

지금의 기독교인들은 신자의 가치를 윤리와 도덕적 행함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사람됨을 두고 세상과 경쟁하면서 동일한 길을 가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생명이신 예수가 없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신자 된 우리의 가치는 세상에 있지 않습니다. 세상이 칭찬하는 어떤 행동이 우리를 가치 있는 존재가 되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가치는 생명이신 그리스도께 있고,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있게 하신 것으로 가치 있는 자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그리스도가 계심으로 인생의 마지막이 달라진 것입니다.

 

 

13절 끝에 보면 “여호와의 말씀과 같더라”라고 말합니다. 바로에 대한 여호와의 말씀은 여호와의 표징과 이적을 애굽 땅에서 많이 행할 것이지만 바로가 모세와 아론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대로 바로는 모세와 아론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세상은 여호와의 말씀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 이루어졌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마 13:13-14)는 말씀과 같이 세상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도 보아도 알지 못합니다.

 

 

이러한 세상의 현실에서 세상을 보면서 심판을 보게 되고 말씀을 들으면서 예수님을 깨닫게 되는 것이 복입니다. 이 복을 복으로 알고 감사하게 되는 것 또한 하나님이 간섭하신 증거입니다.

 

 

이스라엘의 이스라엘 됨은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만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알고 언약에 의해서 존재함을 믿는 것이 이스라엘다움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세상이 심판을 받는 것은 죄를 범해서가 아니라 언약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신자가 자신과 세상을 보는 시각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의 세상은 하나님의 언약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자신이 일하는 것으로만 생각합니다. 하지만 진짜 현실은 하나님의 일하심에 의해서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이 있어서 저주의 존재인 우리가 예수님을 알게 되고, 들어도 들을 수 없는 복음을 들으면서 십자가의 은혜를 깨닫게 됩니다. 이것을 복으로 누리는 사람이 신자이며, 그것으로 신자는 세상을 이긴 자로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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