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8.05 16:07

(36강) 일곱째 재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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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9:22-26http://onlycross.net/videos/exo/exo-092226.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22.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하늘을 향하여 손을 들어 애굽 전국에 우박이 애굽 땅의 사람과 짐승과 밭의 모든 채소에 내리게 하라

23.모세가 하늘을 향하여 지팡이를 들매 여호와께서 우렛소리와 우박을 보내시고 불을 내려 땅에 달리게 하시니라 여호와께서 우박을 애굽 땅에 내리시매

24.우박이 내림과 불덩이가 우박에 섞여 내림이 심히 맹렬하니 나라가 생긴 그 때로부터 애굽 온 땅에는 그와 같은 일이 없었더라

25.우박이 애굽 온 땅에서 사람과 짐승을 막론하고 밭에 있는 모든 것을 쳤으며 우박이 또 밭의 모든 채소를 치고 들의 모든 나무를 꺾었으되

26.이스라엘 자손들이 있는 그 곳 고센 땅에는 우박이 없었더라

 

<설교>

애굽의 재앙은 20여 일 동안 계속됩니다. 20여 일 동안 10가지의 재앙을 겪는다면 애굽이란 나라는 엉망이 되었다고 봐야 합니다. 더군다나 돌림병으로 모든 가축이 죽고 사람과 짐승에게 악성 종기가 생기고 본문의 내용처럼 애굽 전국에 불덩이가 섞인 우박이 사람과 짐승, 땅의 채소에 떨어진다면 애굽은 존재 자체가 위태롭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고통과 위기상황에서도 바로의 완악함은 변하지 않습니다. 물론 우박 재앙을 견디지 못한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 자신이 범죄 했다고 하면서 여호와는 의로우시고 자신과 애굽 백성은 악하다는 말을 하지만(28절) 그 또한 고통의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편일 뿐 그의 본심은 아닌 것입니다. 때문에 우박이 사라지자 또 다시 마음을 완악하게 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지 않은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완악함은 무엇으로도 깨어지지 않습니다. 고통이 주어지고 기적을 체험하고 풍요를 누린다 해도 인간은 끝까지 완악한 마음의 소유자로 존재할 것입니다. 이것을 전제 한다면 ‘이렇게 하면 됩니다’라는 말은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현대 교회를 보면 인간의 무능을 말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행함을 말합니다. 인간이 무능하다는 것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라는 뜻인데도 불구하고 행함을 말하는 것은 교회로서 행함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할 수 없는 것과 할 수 있는 것을 구분하게 되는데 이것은 타협일 뿐입니다. 성경에서도 벗어나지 않고 사람도 만족시키고자 하는 수단이지만 타협은 이미 성경에서 벗어난 것일 뿐임을 주지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면서 하신 말씀 가운데 하나가 ‘다 이루었다’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하실 일은 다 이루셨지만 우리가 할 일은 남아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물론 신자 된 우리가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다 이루신 그 일이 우리에게 의로움이 되고 구원이 됨을 믿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신자는 예수님의 다 이루심을 증거하고 전파하는 존재인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성령이 오셔서 예수님이 다 이루신 십자가를 알게 하시고 믿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의 성령 받음은 인간의 무능함을 고백하며 예수님의 행하심만을 자랑하고 높이는 것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행함이 타인보다 부족해서 부끄러움이 되는 것은 없습니다. 행함의 문제로 인해서 게으르다고 판단되는 것도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의로우심으로 우리가 의로운 자로 인정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이기에 누구든 행함의 문제로 신앙의 여부를 판단한다면 그것이 곧 예수님의 은혜와 의를 훼방하는 것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인간의 부끄러움은 행함에 있지 않고 죄에 있습니다. 자기를 위해 선악과를 먹은 것으로 이미 부끄러움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 부끄러움은 우리가 선한 행동을 한다고 해서 가려지지 않습니다. 길은 그리스도에게만 있습니다. 모든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피 아래에서만 죄의 부끄러움이 가려지는 것입니다.

 

 

롬 13:13,14절에 보면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정욕은 자기 성취를 위한 욕구를 뜻합니다. 다라서 모든 인간은 자기 정욕으로 살아가는 것이고 정욕을 위하여 도모하는 모든 일은 육신의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으로 드러나는 것은 ‘할 수 있다’는 선동에 휩쓸려 하나님의 일이라는 명목으로 행하는 모든 일이 실제로는 육신의 일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계 16:15절에 보면 “보라 내가 도둑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의 부끄러움을 가려서 보이지 않게 하는 옷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의 행함과 실천으로는 부끄러움을 가릴 수 없다는 뜻입니다.

 

 

나의 속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부끄러움을 보이지 않을 수 있겠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부끄러운 존재일 뿐입니다. 그 부끄러움이 예수의 피로 가려지기에 예수 안에 있는 것이 곧 복의 세계를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정체성으로 굳건히 그 내면에 살아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신자이기에 예수 안에 있는 신자의 본질은 생명이지만 예수 밖의 세상의 본질은 심판일 수밖에 없습니다.

 

 

22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하늘을 향하여 손을 들어 애굽 전국에 우박이 애굽 땅의 사람과 짐승과 밭의 모든 채소에 내리게 하라”고 말합니다.

 

 

우박이 애굽 전국의 사람과 짐승과 채소에 내린다면 당장 생존 문제로 인해 혼란을 겪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26절을 보면 이스라엘이 거하는 하는 고센 땅에는 우박이 없습니다. 대개의 기독교인들이 이것을 기대합니다. 하나님이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를 이런 방식으로 구별해 주실 것을 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머무는 땅에 우박이 내리지 않은 것은 단지 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이어서 애굽이 겪는 재앙에서 제외시켜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에 속하지 않은 자가 누구인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아브라함 자손으로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졌음을 생각해 보면 하나님의 심판에 속하지 않은 자는 약속 아래 있는 자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애굽 자체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세상이고 이스라엘 또한 그 세상에 존재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이 그들을 심판에서 건져내는 것입니다. 그 약속이 어린양으로 오신 그리스도로 이루어질 것을 장자 재앙에서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집이 죽음에서 건짐 받는 것으로 증거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거하는 땅에 우박이 떨어지지 않는 것을 두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재앙으로부터 지키시고 보호하신 것으로 말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지금의 세상일을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수많은 사건과 재난이 발생하지만 그 어떤 경우에도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구별되어 발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육신을 도우시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위해 도우시고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불덩이가 섞인 우박이 우리가 살아가는 땅에 떨어진다면 세상의 종말이 왔는가 보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의 시대에서 진짜 재앙은 어린양의 피를 바르지 않는 모든 자는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장자 재앙을 통해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피의 은혜를 알지 못하고 믿지 않는 세상은 이미 재앙 아래 있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지금의 시대를 종말이라고 말합니다.

 

 

지진, 가뭄, 홍수 등의 재해로 인해서 많은 사람이 죽기도 합니다. 쓰나미로 인해서 수십만 명이 죽은 재난도 기억합니다. 하지만 그것도 결국은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인생으로써 가야 할 길을 가는 것뿐입니다.

 

 

때문에 재난을 겪지 않는다 하여 재난을 겪는 사람보다 의롭다고도 할 수 없습니다. 평안을 누린다 해도 예수 밖에 있다면 그 자체가 재앙이고 심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세상을 향해서 주저하지 않고 ‘나는 복 있는 자다’라고 외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가 우리를 심판에서 건졌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세상을 돈이 있으면 살만한 곳으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그것이 바로의 시각입니다. 반복 되는 재앙에서도 이스라엘 백성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도 그 이유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붙들고 있어야 그들을 이용하여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를 완악하게 한 것입니다.

 

 

사실 애굽이 특별히 잘못했다고 할 것은 없습니다. 수백 년간 애굽 땅에 신세지며 살아온 이스라엘을 애굽이 다스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자신의 노예를 갑자기 나타난 한 사람의 말을 듣고 보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인간의 완악함인 것을 바로를 통해서 보이신 것입니다.

 

 

이스라엘도 바로와 똑같이 완악한 존재입니다. 그런 그들의 땅에 우박이 떨어지지 않은 것은 심판과 구원은 인간의 가치에 따라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하고자 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 선택에 의한 것임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신자는 하나님의 선택을 증거 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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