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8.12 16:33

(37강) 바로의 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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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9:27-35http://onlycross.net/videos/exo/exo-092735.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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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27.바로가 사람을 보내어 모세와 아론을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이번은 내가 범죄하였노라 여호와는 의로우시고 나와 나의 백성은 악하도다

28.여호와께 구하여 이 우렛소리와 우박을 그만 그치게 하라 내가 너희를 보내리니 너희가 다시는 머물지 아니하리라

29.모세가 그에게 이르되 내가 성에서 나가서 곧 내 손을 여호와를 향하여 펴리니 그리하면 우렛소리가 그치고 우박이 다시 있지 아니할지라 세상이 여호와께 속한 줄을 왕이 알리이다

30.그러나 왕과 왕의 신하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아직도 두려워하지 아니할 줄을 내가 아나이다

31.그 때에 보리는 이삭이 나왔고 삼은 꽃이 피었으므로 삼과 보리가 상하였으나

32.그러나 밀과 쌀보리는 자라지 아니한 고로 상하지 아니하였더라

33.모세가 바로를 떠나 성에서 나가 여호와를 향하여 손을 펴매 우렛소리와 우박이 그치고 비가 땅에 내리지 아니하니라

34.바로가 비와 우박과 우렛소리가 그친 것을 보고 다시 범죄하여 마음을 완악하게 하니 그와 그의 신하가 꼭 같더라

35.바로의 마음이 완악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내보내지 아니하였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심과 같더라

 

 

<설교>

애굽은 이어지는 하나님의 재앙으로 인해서 위기상황에 처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불덩이가 섞인 우박이 내린 재앙만으로도 애굽의 온 땅은 엉망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박은 애굽 온 땅의 사람과 가축을 막론하고 밭에 있는 모든 채소를 치고 나무를 꺾어 버렸습니다. 이 상황을 상상해 보십시오. 많은 사람과 가축이 죽고 먹을 채소가 남아 있지 않은 사태가 벌어졌다면 누구라도 굴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완악한 바로도 결국 모세와 아론을 불러서 “이번은 내가 범죄하였노라 여호와는 의로우시고 나와 나의 백성은 악하도다 여호와께 구하여 이 우렛소리와 우박을 그만 그치게 하라 내가 너희를 보내리니 너희가 다시는 머물지 아니하리라”(27-28절)는 말로 하나님께 굴복하는 것 같은 모습을 보여줍니다.

 

 

바로의 입에서 ‘내가 범죄하였노라’‘나와 나의 백성은 악하도다’는 고백이 나온다는 것은 참으로 놀랄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로와 같은 사람에게는 도무지 기대할 수 없는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바로의 고백만 본다면 그는 하나님께 굴복한 사람이고 자신의 죄인 됨을 아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28절에서 “여호와께 구하여 이 우렛소리와 우박을 그만 그치게 하라 내가 너희를 보내리니 너희가 다시는 머물지 아니하리라”고 말함으로써 하나님의 능력 앞에서 완전히 항복한 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바로가 비와 우박과 우렛소리가 그친 것을 보고 다시 범죄하여 마음을 완악하게 하니 그와 그의 신하가 꼭 같더라”(34절)는 말처럼 바로는 또 다시 재앙이 있기 전의 상태로 되돌아갑니다.

 

 

그런데 바로의 범죄는 무엇일까요? 이스라엘을 보내겠다고 했다가 보내지 않은 불순종, 변심일까요? 물론 그것도 범죄가 아니라고 할 수는 없지만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31,32절을 보면 “그 때에 보리는 이삭이 나왔고 삼은 꽃이 피었으므로 삼과 보리가 상하였으나 그러나 밀과 쌀보리는 자라지 아니한 고로 상하지 아니하였더라”고 말합니다.

 

 

보리 이삭이 나오고 삼이 꽃을 피는 때가 1-2월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때는 아직 밀과 쌀보리가 자라지 않을 시기이기 때문에 우박 재앙에서도 밀과 쌀보리는 남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먹을 것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비록 보리와 삼은 상하여 먹지 못하게 되었지만 땅에는 아직 밀과 쌀보리가 남았고 자라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보면 바로는 비와 우박과 우렛소리가 그친 것을 보면서 아직 자기에게는 밀과 쌀보리가 남았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그것에 희망을 둠으로써 마음이 변신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직 밀과 쌀보리가 남아 있으니 살 수 있고 지금의 현실을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따라서 바로의 범죄는 눈에 보이는 것, 자신에게 남아 있고 존재하는 것을 힘으로 믿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으로 바로의 범죄는 바로 한 사람의 범죄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범죄고 우리가 곧 완악한 마음의 존재라는 사실이 발각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바로가 이방인이라는 생각을 접어야 합니다. 물론 바로가 이방인인 것은 사실이지만 이방인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한다면 바로를 통해서 드러나는 이방인과 다를 바 없는 우리의 완악함에 대해서는 보지 못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의 변심에는 아직 애굽에는 밀과 쌀보리가 남아 있다는 것이 영향을 끼쳤을 것입니다. 밀과 쌀보리가 바로의 희망이 된 것입니다. 결국 바로는 지금까지의 모든 재앙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의해서라는 것을 알았으면서도 재앙을 통해서 애굽의 모든 것이 하나님께 장악되어 있다는 사실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박으로 인해서 보리와 삼이 상했다면 남은 밀과 쌀보리도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생각했어야 합니다. 언제든 하나님이 하고자 하신다면 밀과 쌀보리까지 상하게 하실 수 있음을 생각하다면 남은 밀과 쌀보리가 희망이 될 수 없음을 알았을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입니다.

 

 

하지만 바로는 하나님이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보다는 현재의 상황에서 벗어나는 것에만 마음을 둡니다. 그래서 주어진 형편에 따라 수시로 마음과 생각이 변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우박 재앙 속에서 밀과 쌀보리를 남겨 두신 것도 애굽을 불쌍히 여겨서 먹고 살 것은 남겨 주신 것이라기보다는 세상에 의지하고 희망을 둘만한 것이 있을 때 인간이 어떻게 변심하는가를 보여주고자 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로가 범죄 했다고 고백하는 것도 당연히 실제로 자신의 죄악을 깨닫고 회개하는 마음에 의한 고백이 아닙니다. 재앙의 원인을 이스라엘을 보내지 않은 죄로 인한 것으로 생각하고 범죄 했다고 고백함으로 신의 마음을 달래고 재앙을 멈추게 하고자 하는 의도적인 말이었을 뿐입니다.

 

 

지금의 기독교인들도 어려움이 있을 때 가장 먼저 죄에 대해 생각합니다. 하나님께 죄를 범한 것이 있기 때문에 벌 받는 것으로 짐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죄인이라고 고백하고, 형편이 나아지면 다시 돌변하는 것을 수시로 보게 될 뿐입니다.

 

 

그런데 사실 하나님의 행하심에도 일관성이 없게 보입니다. 가령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생활할 때 먹을 것과 마실 것 문제로 하나님을 원망하자 불뱀을 보내서 많은 사람을 죽게 한 일이 있습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반석에서 물을 내어 마시게 하시고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내려서 먹게 하시고 고기를 먹지 못해 불평하자 메추라기를 보내기도 하십니다.

 

 

동일한 불평과 원망에 대해서 한편으로는 불뱀으로 반응하시고 또 한편으로는 그들이 원하는 것을 주신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처럼 일관성이 없는 듯한 일로 인해서 우리의 삶에 일하시는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난감할 수도 있습니다.

 

 

신 8장에서는 그것을 이스라엘을 낮추시고 시험하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불뱀을 보내신 것도 시험하기 위함이고 물과 만나를 주신 것도 시험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시험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은 그들이 어떤 상황에 있다 해도 본성적으로 하나님을 원망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고통의 길로 인도하신다면 분명 원망과 불평으로 반응할 것입니다. 그러면 고통이 없는 평안으로 인도하시다면 불평과 원망이 없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은 어떤 현실에서도 지속적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지루함을 느끼는 족속이기 때문에 결국 원망과 불평이 자리하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삶에 주어지는 어려움도 평안도 하나님의 시험인 것입니다. 어려움에서 나에게 나와지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게 하시는 시험이고, 평안에서 나와지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게 하시는 시험입니다. 따라서 신자가 시험의 의미를 알고 잘 치른다면 비로소 구원될 수 없는 자신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낮아진 마음입니다.

 

 

만약 바로가 하나님이 누구신가? 를 알게 되고 구원을 받는다면 우리는 무엇을 깨닫게 될까요? 바로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바로와 같은 자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진심으로 범죄 한 자라는 고백과 함께 구원될 자격이 없는 자로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부르게 된다면 바로를 그렇게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 외에 달리 할 말이 없게 됩니다.

 

 

그렇다면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가 바로와 같은 존재라고 했을 때 하나님의 능력을 무엇으로 확인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바로와 같이 보이는 것에 희망을 두고 살아가는 완악한 존재라는 사실에 눈을 뜨게 된 것이고, 구원될 수 없는 존재임을 자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에게 십자가의 은혜가 감동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생각하고 알아가고 배우게 될 때 감사가 있고 감동이 되십니까? 예수님을 알게 된 것을 세상에서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보다 더 존귀한 은혜로 받아들이십니까? 그것이 곧 하나님의 능력이고 지금까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지내왔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를 이 은혜에 붙들어 놓기 위해 날마다 시험하시며 변심하는 나를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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