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9.09 15:27

(41강) 아홉째 재앙

조회 수 1342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Extra Form
출 10:21-29http://onlycross.net/videos/exo/exo-102129.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21.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하늘을 향하여 네 손을 내밀어 애굽 땅 위에 흑암이 있게 하라 곧 더듬을 만한 흑암이리라

22.모세가 하늘을 향하여 손을 내밀매 캄캄한 흑암이 삼 일 동안 애굽 온 땅에 있어서

23.그 동안은 사람들이 서로 볼 수 없으며 자기 처소에서 일어나는 자가 없으되 온 이스라엘 자손들이 거주하는 곳에는 빛이 있었더라

24.바로가 모세를 불러서 이르되 너희는 가서 여호와를 섬기되 너희의 양과 소는 머물러 두고 너희 어린 것들은 너희와 함께 갈지니라

25.모세가 이르되 왕이라도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드릴 제사와 번제물을 우리에게 주어야 하겠고

26.우리의 가축도 우리와 함께 가고 한 마리도 남길 수 없으니 이는 우리가 그 중에서 가져다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섬길 것임이며 또 우리가 거기에 이르기까지는 어떤 것으로 여호와를 섬길는지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나

27.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으므로 그들 보내기를 기뻐하지 아니하고

28.바로가 모세에게 이르되 너는 나를 떠나가고 스스로 삼가 다시 내 얼굴을 보지 말라 네가 내 얼굴을 보는 날에는 죽으리라

29.모세가 이르되 당신이 말씀하신 대로 내가 다시는 당신의 얼굴을 보지 아니하리이다

 

 

<설교>

로마서 10장에서 바울은 ‘마음에 믿으면’‘마음으로 믿어’라는 말을 합니다. 바울의 말처럼 마음으로 믿는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마음으로 믿는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머리로 믿는 것도 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어떤 믿음이 참된가?’라고 묻는다면 당연히 마음으로 믿는 것이라고 답할 것입니다.

 

 

그런데 신자라면 누구나 자기 믿음을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믿는 것으로 여길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느낌과 감정에 의한 주관적 판단일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마음으로 믿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먼저 사람이 마음으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 가능한지부터 따져봐야 합니다. 마음으로 하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의 모든 일, 자신에게 행하신 것까지 모두 하나님이 행하신 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에게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자신이 원하는 인생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바로가 계속된 재앙에서도 이스라엘을 포기하지 않는 인간성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보내지 않는 것은 그들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것이고 그것은 끝까지 이스라엘의 주인으로 존재하고자 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소유한 주인이라는 존재 가치를 포기하지 않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악과를 먹은 인간성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 어떤 인간도 자신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가치를 더욱 굳건히 하기 위해 하나님을 찾고 그 이름을 부릅니다. 그래서 그러한 의도에서 나오는 모든 것은 믿음과는 무관한 것이고 하나님에 대해 어떤 성경적인 말을 한다 해도 지식적인 것일 뿐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마음은 성령이 임한 새 마음을 뜻합니다. 그러면 새 마음의 신자는 자신을 포기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은 하나님 백성으로 하여금 자신을 포기하게 할 목적으로 오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성령이 오심으로 자신이 하는 모든 것이 주의 은혜를 가리는 것 밖에 되지 않음을 알게 됩니다. 도덕과 윤리에서 벗어난 행동이 주의 은혜를 가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것이 주의 은혜를 가리는 것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자기 부인’이라고 하고 자기를 부인하게 되는 마음을 새 마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마음으로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어떤 행위도 공로가 되지 못하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 만이 공로가 됨을 믿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애굽의 재앙도 이러한 시각에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셔서 이스라엘을 보내지 않게 하시는 이유를 찾기가 힘들 것입니다.

 

 

바로가 이스라엘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 자신을 포기하지 못하는 인간성을 드러내는 것이라면 그것은 이스라엘도 바로가 같은 인간성을 가진 완악한 존재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바로와 같은 인간성을 가진 완악한 존재라면 이스라엘이 마음으로 하나님을 믿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고 지금까지 하나님을 믿는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도 마음과는 무관한 것입니다.

 

 

신 30:6절을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라고 말씀합니다.

 

 

마음에 할례를 베푸신다는 것은 출애굽 사건을 마음에 두게 하심으로 약속의 땅에 들어와 먹고 마시는 모든 것이 자신들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에 의한 은혜임을 알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애굽에서 나오게 된 것부터가 이스라엘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강한 권능에 의한 것임을 보게 하심으로 이스라엘로 하여금 자신들의 힘과 행함이 공로가 되어 죄어진 일은 존재하지 않음을 알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24절에 보면 “바로가 모세를 불러서 이르되 너희는 가서 여호와를 섬기되 너희의 양과 소는 머물러 두고 너희 어린 것들은 너희와 함께 갈지니라”고 말합니다.

 

 

우박과 메뚜기 재앙으로 가축과 곡식이 남아있지 않은 상황에서 애굽의 생존에 중요하고 필요한 것은 양과 소입니다. 따라서 양과 소는 머물러 두라고 타협 하는 것은 자신의 생존 문제만큼은 포기하지 않고자 하는 집착을 보여주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와 함께 이스라엘을 포함한 우리 모두의 인간성임을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생각하면 흑암은 고통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지금까지의 재앙은 애굽을 고통스럽게 하고 목숨을 잃거나 큰 위협이 되는 사건들이었지만 흑암은 단지 빛이 사라진 어둠의 상태일 뿐 육신에 고통을 주거나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은 아닌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로는 흑암의 상황을 우습게 여기면서 더 버틸 수도 있는데 삼일 만에 항복하고 모세를 불러 양과 소는 두고 나가라고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애굽은 태양을 신으로 섬깁니다. 따라서 흑암이 계속 된다는 것은 애굽의 신인 태양이 힘을 잃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것은 곧 애굽의 멸망을 실질적으로 느끼게 하는 공포와 두려움이 될 수 있습니다. 고통은 아니지만 공포와 두려움에 의해 이스라엘을 보내겠다고 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거주하는 곳에는 빛이 있습니다. 애굽은 흑암으로 덮인 상태에서 이스라엘에만 빛이 있는 것이 바로로 하여금 하나님의 존재를 느끼게 한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실제하며 이스라엘에게 함께 한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바로가 이스라엘을 보내는 것도 이스라엘을 보내면 하나님이라는 신도 이스라엘과 함께 나갈 것이고 애굽은 하나님과 무관하게 될 것으로 계산한 것이 아닌가도 생각됩니다.

 

 

이것은 바로가 10절에서 “내가 너희와 너희의 어린 아이들을 보내면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 함과 같으니라”고 말하는 것에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들까지 이스라엘 모두를 보내면 하나님도 그들과 함께 한다는 것이 바로의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즉, 바로는 이스라엘 전부를 보내면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여 애굽에서 나갈 것이기 때문에 재앙에서 벗어나게 될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하나님께 항복하고자 하는 흉내를 낸 것이기 때문에 자기의 생존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을 부르거나 믿고자 하는 모든 것은 마음으로 믿는 믿음에 해당되지 않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흑암과 빛은 애굽과 이스라엘을 구분합니다. 하지만 애굽과 이스라엘의 인간성은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셔서 자기를 포기하지 않음을 이스라엘을 보내지 않는 것으로 드러내신 것입니다. 이스라엘도 동일한 인간성의 존재일 뿐이고 따라서 그들 역시 흑암에 속한 자일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게 빛이 있는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언약이 이스라엘을 보호하고 흑암에서 구출하였음을 빛이 있게 하신 것으로 보이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이것을 알게 된다면 자신들이 누리는 모든 것에 그들의 공로는 없음을 인정하게 됩니다. 이것이 자기 부인인데 이스라엘은 이러한 이스라엘 됨에 실패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빛으로 오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의 빛이시고 빛의 세계는 곧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만이 인정되고 인간의 모든 의와 공로는 부인되는 세계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자기의 공로를 포기하지 않고 자기 가치를 지키고자 하는 것이 곧 바로의 완악함이고 흑암의 세계임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빛으로 오심으로 세상은 빛과 흑암으로 선명하고 분명하게 구분된 것입니다.

 

 

예수 안에서의 시작과 마침은 예수님입니다. 예수 안에서 나를 포기하지 않는 나의 완악함을 보게 되면 예수님의 공로가 아니면 안되는 이유가 더욱 분명해질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함께 하시는 것은 우리의 의가 아닌 제물이 되신 예수님의 피의 희생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부름 받음으로 빛에 속한 자입니다. 이것을 마음으로 믿는다면 자기의 공로와 의는 부인할 것입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성경본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설교 원고는 없습니다 신윤식 2022.01.01 933
공지 암, 옵, 욘 성경강해 방으로 옮겼습니다. 신윤식 2011.02.28 7254
공지 이전 홈페이지 수요일설교 들어가기 은석교회 2010.01.01 39866
116 출 27:9-19 (112강) 성막의 뜰 신윤식 2019.04.20 577
115 출 27:1-8 (111강) 제단 신윤식 2019.04.13 508
114 출 26:31-37 (110강) 휘장 신윤식 2019.04.06 724
113 출 26:15-17 (109강) 널판 신윤식 2019.03.30 462
112 출 26:1-14 (108강) 성막 신윤식 2019.03.23 565
111 출 25:31-40 (107강) 등잔대 신윤식 2019.03.16 487
110 출 25:23-30 (106강) 진설병 신윤식 2019.03.09 548
109 출 25:10-22 (105강) 증거궤 신윤식 2019.03.02 676
108 출 25:1-9 (104강) 예물 신윤식 2019.02.23 501
107 출 24:12-18 (103강) 사십 일 사십 야 신윤식 2019.02.16 587
106 출 24:1-8 (102강) 언약의 피 신윤식 2019.02.09 543
105 출 23:27-33 (101강) 왕벌을 보내리니 신윤식 2019.02.02 1108
104 출 23:20-26 (100강) 여호와를 섬기라 신윤식 2019.01.26 604
103 출 23:18-19 (99강) 생명과 생존 신윤식 2019.01.19 584
102 출 23:14-17 (98강) 세 절기 신윤식 2019.01.12 589
101 출 23:10-13 (97강) 안식 신윤식 2019.01.05 503
100 출 23:6-9 (96강) 나그네의 사정 신윤식 2018.12.29 578
99 출 23:1-5 (95강) 율법과 인간 신윤식 2018.12.15 642
98 출 22:25-31 (94강) 자비의 법 신윤식 2018.12.08 571
97 출 22:18-20 (93강) 살려두지 말라 신윤식 2018.12.01 779
Board Pagination Prev 1 ... 5 6 7 8 9 10 11 12 13 14 15 Next
/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