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강) 이제 가라

by 신윤식 posted Feb 18,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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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4:10-17http://onlycross.net/videos/exo/exo-041017.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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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0.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오 주여 나는 본래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자니이다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령하신 후에도 역시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11.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냐 누가 말 못 하는 자나 못 듣는 자나 눈 밝은 자나 맹인이 되게 하였느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12.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

13.모세가 이르되 오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

14.여호와께서 모세를 향하여 노하여 이르시되 레위 사람 네 형 아론이 있지 아니하냐 그가 말 잘 하는 것을 내가 아노라 그가 너를 만나러 나오나니 그가 너를 볼 때에 그의 마음에 기쁨이 있을 것이라

15.너는 그에게 말하고 그의 입에 할 말을 주라 내가 네 입과 그의 입에 함께 있어서 너희들이 행할 일을 가르치리라

16.그가 너를 대신하여 백성에게 말할 것이니 그는 네 입을 대신할 것이요 너는 그에게 하나님 같이 되리라

17.너는 이 지팡이를 손에 잡고 이것으로 이적을 행할지니라

 

<설교>

세상에 위대한 사람은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타인에 비해 뛰어나고 훌륭한 일을 하거나 업적을 이룬 사람을 가리켜 위대하다는 말로 칭송을 하지만 그것은 인간에 대한 인간의 평가일 뿐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세계에서의 인간은 항상 자기 생각과 고집으로 완악함만 드러내는 지의 존재로 드러날 뿐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하는 일에 관심 두지 않습니다. 당연히 인간의 일로 인해 기뻐하시거나 보상을 주시는 것도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을 하면 상을 주신다는 것은 인간의 착각일 뿐입니다. 우리는 신앙적 행동으로 규정될 수 있는 일을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러한 생각 자체가 하나님의 생각에 대해서는 도외시 한 처사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모세라는 인물을 우리와 다른 특별한 존재로 보면 안됩니다. 이것은 모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에 공통적으로 해당되는 것이고 우리 자신 역시 이러한 시각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특별한 일을 한 특별한 존재이기 때문에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하심에 장악 되어 있는 상태가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모세는 지팡이가 뱀이 되고 손에 문둥병이 생기는 것을 체험했고 애굽에 가서는 나일 강 물이 땅에서 피가 되게 하겠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으로 모세가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모세는 애굽으로 가지 못합니다. 여전히 자신의 조건으로 인한 염려와 걱정이 앞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것은 우리의 조건을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신자가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자기 문제로 인한 염려와 걱정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 또한 모세와 동일하게 나의 문제로 인한 염려를 떨쳐 버리지 못합니다. 이러한 현실을 실감하게 되면 자신의 믿음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인한 결과임을 자인할 수밖에 없습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고 받아들이게 되는 것도 머리로 이해하고 인정하는 차원이 아니라 매일 반복되는 실패와 죄의 현실을 실감하면서 우리에게는 믿음의 가능성이 먼지만큼도 없음을 자각함으로 나타나는 결과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우리의 실패까지 이용하시면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10절을 보면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오 주여 나는 본래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자니이다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령하신 후에도 역시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여전히 자기 걱정에 붙들려 있습니다. 모세의 걱정은 자신이 본래 말을 잘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아마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려면 말을 잘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순종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시지 자신의 말 재주가 아님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시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냐 누가 말 못 하는 자나 못 듣는 자나 눈 밝은 자나 맹인이 되게 하였느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11,12절)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내가 말하고 내가 보고 듣는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나의 것은 없습니다. 입도 눈도 귀도 하나님이 지으셨기에 하나님의 주관 아래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모세가 자신이 말을 해야 하고 자신의 말 재주로 이스라엘 자손을 설득시켜서 애굽에서 나오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것 자체를 이해하지 못한 것일 뿐입니다.

 

 

모세가 할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는 것입니다. 모세의 말을 들은 이스라엘이 어떻게 반응하든 그것은 모세가 염려할 문제가 아닙니다. 말씀을 들은 이스라엘이 말씀을 듣고 순종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일하신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모세와 더불어 우리 또한 ‘내가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내 말을 듣고 예수를 믿게 될까’를 생각하고 염려하는 것입니다. ‘내 말을 듣고 비웃으면 어떻게 하지’라는 생각들이 하나님의 일하심은 간과하고 자신이 책임지려고 하는 발상임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가 말을 잘 해서 믿음이 가능하게 되는 것은 없습니다. 제아무리 논리정연하게 달변가처럼 말을 잘 했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모세가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기적으로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표징을 보여줬음에도 말을 하지 못한다는 구실로 애굽으로 가기를 거부하는 모습이 답답하다고 생각되십니까? 하지만 모세의 그 모습이 우리의 실상이고 장차 드러날 이스라엘의 실상이기도 합니다. 그러한 실상이 하나님이 모세를 이스라엘에게 보내심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이 애굽과 다르지 않은 뱀의 속성의 존재이고 저주의 자식임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애굽과 동일한 속성을 가진 존재임이 드러나는 것으로 하나님의 일이 끝나지 않습니다. 애굽과 다를 바 없이 죽임을 당해야 하는 존재가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통해서 자기 백성을 죽음에서 건지시는 하나님의 방식이 증거 되는 것입니다. 죽음의 세상에서 죽어야 하는 존재를 살려내신 하나님의 일이 참된 이적으로 세상에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17절의 “너는 이 지팡이를 손에 잡고 이것으로 이적을 행할지니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즉 하나님의 기적은 지팡이를 뱀으로 변하게 하는 신비한 마술과 같은 일이 아니라 죽음의 세력에 붙들린 존재를 생명의 세계로 이끌어 내시는 하나님의 일 자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여전히 자신이 일해야 한다는 생각에 붙들려 있습니다. 그래서 “오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라고 하소연하자 하나님은 노하시면서 “레위 사람 네 형 아론이 있지 아니하냐 그가 말 잘 하는 것을 내가 아노라 그가 너를 만나러 나오나니 그가 너를 볼 때에 그의 마음에 기쁨이 있을 것이라 너는 그에게 말하고 그의 입에 할 말을 주라 내가 네 입과 그의 입에 함께 있어서 너희들이 행할 일을 가르치리라 그가 너를 대신하여 백성에게 말할 것이니 그는 네 입을 대신할 것이요 너는 그에게 하나님 같이 되리라”고 말씀합니다.

 

 

모세가 아니더라도 아론이 있고 아론이 말을 잘한다면 모세 대신 아론을 보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굳이 모세를 고집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만약 아론이 말을 잘한다는 이유로 모세 대신 보내신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는 말을 잘해야 한다’는 조건을 추가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일하심에 인간의 말 재주가 첨가되는 결과를 초래할 뿐입니다.

 

 

따라서 자기 염려와 불안과 걱정으로 가득한 모세를 보내셨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오게 되고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게 된다면 그 모든 일에 인간은 개입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홀로 하셨습니다’는 고백을 하게 될 뿐입니다. 이처처럼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사건들 하나하나는 인간의 무능력함과 함께 믿음 없음을 드러내는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언약대로 되는 결과 속에서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것을 실감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이 믿음에 의해서 하나님께 굴복하게 됩니다. 자신의 행함과 실천으로 가능한 것은 전혀 존재하지 않으면 다만 수치로 가득한 부끄러운 자로 하나님께 나올 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모세에게 지팡이를 손에 잡고 이적을 행하라는 것은 모세에게 그만한 능력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일하신다는 것을 증거 하는 것이 모세의 역할이라는 뜻입니다.

 

 

신자 된 우리의 역할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의 능력으로 어떤 일을 이루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모든 일을 이루신다는 것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구원이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에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신에 대해 염려할 것이 없는 신자의 본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