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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5:1-2http://onlycross.net/videos/exo/exo-050102.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그 후에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가서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2.바로가 이르되 여호와가 누구이기에 내가 그의 목소리를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을 보내지 아니하리라

 

<설교>

지금의 기독교를 보면 교회가 교회를 모방하는 분위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행사나 프로그램, 성경공부, 조직, 운영방식 등 다양한 것들을 모방하여 시행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유는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타 교회에서 시행하여 좋은 결과를 거두었다는 것 때문입니다. 타 교회에서 좋은 결과를 거두었으니 자신의 교회에도 좋은 결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모방하여 시행하는 것입니다. 제가 의문스러운 것은 이러한 교회에서 설교되는 하나님은 과연 어떤 분인가 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본인이 믿는 것으로 인정되지 않습니다. 무엇을 믿는지, 믿음의 내용이 점검되고 판단되어야 합니다. 사람은 자신에게 힘이 되고 유리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의지하고 싶어 하고 그러한 인간성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서도 여실히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믿음으로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하는 기대와 욕구가 있습니다. 이것이 신을 찾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믿음은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 아닙니다. 이러한 믿음과 연결된 하나님은 어떤 분일까요? 당연히 ‘열심히 기도하면 응답하고 하나님을 잘 믿으면 복을 주며 지켜주는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하나님은 성경에서 언급되지 않는다는 것이 중대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심각한 것은 그러한 믿음의 문제에 대해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것입니다. 믿음이 조금 잘못 되었다 해도 어쨌든 하나님을 믿고 있고 그러면 구원 받지 않겠는가? 라는 생각으로 믿음의 문제를 대하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현대 교회는 믿음의 내용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 두지 않습니다. 믿음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보다는 열심히 믿어야 한다는 것만 강조합니다. 차를 타고 아무리 열심히 달린다 해도 길이 잘못되어 있다면 목적하는 곳에 도착할 수 없음을 간과하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애굽의 바로가 모세에게 했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여호와가 누구이기에’입니다.

 

 

모세와 아론이 바로를 만나서“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고 말합니다. 그 말을 들은 바로가 “여호와가 누구이기에 내가 그의 목소리를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을 보내지 아니하리라”고 반응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입장이라면 모세의 말을 듣고 허락했을까요? 모세가 비록 여호와의 말씀을 전하지만 바로가 그 말을 들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여호와는 바로가 믿는 신이 아닙니다. 그것만으로도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해야 할 의무는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로의 말은 단지 종교가 다르고 믿는 신이 다르기 때문에 들을 이유가 없다는 의미로만 이해할 수 없습니다. 바로의 말에는 신에 대한 인간성이 나타나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에게서도 ‘여호와가 누구이기에’라는 바로의 사고방식이 드러난다는 점에서 바로의 말은 바로 한 개인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세상의 반응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이 신앙생활에 대해 의심하고 회의감을 드러낼 때가 언제일까요? ‘믿어도 소용없다’는 생각이 들 때입니다. 즉 믿음의 가치를 자신에게서 발견하지 못할 때 의심과 함께 회의감이 드는 것입니다.

 

 

대개의 기독교인은 믿음의 가치를 내세보다는 현세에서 확인하고 싶어 합니다. 내세는 나중 일로 생각하기 때문에 내세보다는 현재의 삶에 더 집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세가 잘되는 것도 원한다고 하지만 그보다 더 강하게 원하는 것은 현재의 일입니다.

 

 

그런데 현재의 삶이 순탄하지 않고 어려움이 계속되면 믿음에 대한 의심이 들면서 ‘믿어도 소용없다’는 실망감에 빠지는 것입니다. 마치 병이 들었을 때 병원을 다니고 약을 먹으면서 효과가 있기를 기대했는데 전혀 나아지지 않을 때 ‘병원 다녀도 소용없다’는 생각이 드는 것과 같은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교회를 다니면서 믿음의 효능을 기대합니다. 그런데 삶이 전혀 나아지지 않으면 믿음의 효능이 없다고 간주합니다. 이것이 ‘여호와가 누구이기에’라고 반응하는 바로와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믿어도 소용없다’는 생각이 자신의 삶에 여호와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으로 여기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목적은 이미 하나님에 의해서 확정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세계가 있음을 세상에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택하신 백성에게 믿음을 주시고 그 믿음으로 자기를 부인하며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삶에 순종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의 효능은 사람이 자기를 위해서 자기의 뜻을 가지고 사는 것이 죄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어리석음이며 지혜는 그리스도를 알게 된 것임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굳이 모세와 아론으로 하여금 바로를 만나게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해도 바로가 듣지 않을 것을 아셨음에도 불구하고 모세와 아론을 바로 앞에 서게 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신 것은 ‘여호와가 누구이기에’라는 바로의 반응을 통해서 세상이 바로와 같은 사고방식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때문에 우리의 시각으로 볼 때는 쓸데없는 일처럼 보이고 실패한 것처럼 보이는 결과들이 실제로는 하나님의 열심에 의해서 성취되는 하나님의 일들인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를 통해서 세상을 파악하고 자신의 믿음 없음을 파악하게 된다면 그 또한 모세와 아론으로 하여금 바로를 만나게 하신 하나님의 뜻의 성취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도 예외는 아닙니다. 그들이 모세와 아론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머리 숙여 여호와를 경배했지만 그들도 결국에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자신들의 삶의 형편을 편하게 해주는 효능으로 나타나기를 원했습니다. 경배에는 그러한 속셈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속셈이 곧 애굽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 광야의 과정에서 드러난 것입니다.

 

 

‘여호와가 누구이기에’라는 바로의 말은 자신에게는 여호와라는 신의 말을 들어야 할 의무가 없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또한 여호와의 존재 자체에 대해 무시하는 의도도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라는 신을 믿는 이스라엘이 처한 형편이 바로로 하여금 충분히 그러한 생각을 하게 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가 존재하고 이스라엘을 지키고 보호하는 신이라면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종으로 지내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믿는 것은 하나님이 택하시고 부르신 백성들에게만 믿음이 선물로 주어지고 영생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의 삶이 나아지는 것보다는 영생이 주어진 것이 큰 은혜고 사랑임을 믿는 것입니다. 영원한 저주 아래 있는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주신 일로 인해 하나님은 먼지와 같은 자신에게 가장 존귀한 것을 주셨음을 믿는 이것이 믿음의 내용으로 채워져 있어야 참된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가 누구이기에’라는 바로의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 세상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아니라 믿어지지 않기에 믿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믿음을 허용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이 허용되지 않는 사람들도 믿음을 모방하게 되는데 그들의 믿음은 그리스도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효능을 지향하는 것으로 드러날 뿐입니다.

 

 

우리도 육신의 문제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일 뿐입니다. 세상이 생각하는 믿음의 효능을 기대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믿음이 소용없는 것 아닌가라는 의심에 흔들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런 자신이 바로와 다를 바 없음을 알게 됩니다. 이것이 성령이 함께 한 신자입니다.

 

 

바로와 동일한 사고방식으로 존재하는 자신을 보면서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것이 왜 최고의 혜택이 되는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것으로 감사하게 되는 것이 믿음에 의해 다스림 받는 하나님의 세계인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목적에 붙들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을 것은 하나님이 하시고 하나님이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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