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4.22 16:09

(23강) 입이 둔한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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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6:10-13http://onlycross.net/videos/exo/exo-061013.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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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0.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11.들어가서 애굽 왕 바로에게 말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내어 보내게 하라

12.모세가 여호와 앞에 고하여 가로되 이스라엘 자손도 나를 듣지 아니하였거든 바로가 어찌 들으리이까 나는 입이 둔한 자니이다

13.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사 그들로 이스라엘 자손과 애굽 왕 바로에게 명을 전하고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시니라

 

 

<설교>

신자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믿음의 의미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는다는 것이고, 따라서 하나님이 행하신 모든 것을 선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대개의 사람들에게 믿음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인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이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거나 흔들리면 믿음에 혼란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하나님은 왜 항상 우리의 현실을 흔드시는가?’라는 질문과 함께 믿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굳이 하나님을 신앙하는 신자의 현실의 삶을 흔드시면서 일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모든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현실을 흔드시기보다는 평안하게 해주시기를 원합니다. 그것이 인간의 당연한 바램입니다.

 

 

하지만 현실의 평안은 인간에게 유리한 것일 뿐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목적에 부합되는 아닙니다. 때문에 우리의 현실은 하나님의 뜻에 장악되어 있음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소원과는 무관하게 온전히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는 방향으로 이끌려 가는 것이 우리의 현실인 것입니다. 이것을 알지 못하거나 부인한 채 자기의 소원과 뜻이 이루어지는 현실만을 기대하기 때문에 원망과 불평과 불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11절에서 하나님은 다시 모세에게 “들어가서 애굽 왕 바로에게 말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내보내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도 내 말을 듣지 아니하였거든 바로가 어찌 들으리이까 나는 입이 둔한 자니이다”라는 말로 반응합니다.

 

 

모세는 이미 애굽에 가서 이스라엘과 바로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하지만 그로 인해 모세가 경험한 것은 이스라엘의 원망과 바로의 완고함입니다. 바로는 모세가 전하는 여호와를 무시하며 오히려 이스라엘 자손의 노역을 가중시켰습니다. 그 때문에 힘들어진 이스라엘 자손은 모세를 원망합니다. 처음에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는 당장 모든 고난이 멈출 것을 기대했는데 현실은 오히려 노역이 가중됨으로 삶이 힘들어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러한 반응을 경험했던 모세이기에 또 다시 바로에게 가서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내보내게 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는 지시에 순순히 따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입이 둔하다는 말을 반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스라엘 자손과 바로의 반응을 자신의 실패로 생각한 것 같습니다. 자신이 말을 잘못해서 초래된 결과로 여기고 입이 둔하다는 이유로 또 다시 바로에게 가서 말을 전하라는 지시를 받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무엇보다 이스라엘 자손도 자신의 말을 듣지 않았음을 언급합니다. 하나님을 신앙하는 같은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자기 말을 듣지 않았는데 하물며 이방인인 바로가 듣겠느냐는 것입니다. 결국 모세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취지를 알지 못하기에 현실적인 문제를 이유로 자신이 바로에게 간다 해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모세의 말도 충분히 일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모세를 바로에게 보내시는 것이 바로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내보게 하는 것에 목적을 두었을 때의 일입니다. 그런데 모세를 바로에게 보내시는 목적은 그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입이 둔하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한 모세의 입장과 생각에 의한 현실적 조건과 문제로 인한 염려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의 반응을 이미 예상하셨습니다. 출 4:21절에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가 애굽으로 돌아가거든 내가 네 손에 준 이적을 바로 앞에서 다 행하라 그러나 내가 그의 마음을 완악하게 한즉 그가 백성을 보내 주지 아니하리니”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완악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모든 인간은 완악합니다. 모세를 위시해서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해도 자신에게 불리하다고 생각되면 거부하는 것이 본래 습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보면 모세를 바로에게 보내시는 이유는 바로의 완악을 드러내심으로써 이스라엘 또한 완악한 존재이며 따라서 애굽과 동일하게 심판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알게 하고자 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완악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것이라면 바로의 완악은 말씀을 만남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이것이 모세를 바로에게 보내서 말씀을 전하라고 하신 이유입니다. 인간이 얼마나 자기 입장에서 자기중심으로 살아가는지, 그리고 납득되지 않는 말씀에 대해서는 얼마나 완악해지는지가 말씀을 만남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세가 입이 둔하다고 말하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을 납득할 수 없다는 의미가 담긴 완악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납득할 수 없는 상황을 수없이 겪으며 살아갑니다. ‘하나님 왜 이렇게 하십니까?’라는 원망에도 주어진 현재 상황을 납득할 수 없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것이 뭔가 하면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고 바로와 같은 완악함이 되는 것입니다.

 

 

포도원 품꾼 비유에서도 일찍 와서 일한 품꾼이 자신보다 적은 시간 일한 사람과 동일한 품삯을 받았을 때 그것을 부당하게 여기는 것도 완악함입니다. 많이 일한 사람과 적게 일한 사람을 동일하게 대우하는 주인의 처사가 이해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속성이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늘 자신의 현재에 대해 감사하고 기뻐하기보다는 불만과 불평으로 채워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해되지 않은 현실로 인해서 우리의 완악함이 드러나는 것이라면 현실의 모든 일들이 우리의 뜻대로 될 때 완악함은 감추어진 채 드러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의 완악함은 알지 못할 것이고 스스로를 문제없는 존재로 생각할 것입니다.

 

 

모세는 바로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을 때 바로가 그 말을 받아들이고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내 보내는 것으로 하나님이 자신을 보낸 목적이 달성되는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입이 둔한 자신은 적임자가 아니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모세를 보내신 하나님의 뜻은 바로가 완악함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말씀하며 이스라엘 자손을 내 보내지 않고 오히려 노역을 더 가중시키는 것으로 성취된 것입니다. 애당초 바로의 완악을 드러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원망을 받고 다시 모세는 하나님을 원망하고 바로는 ‘여호와가 누구이기에’하는 말로 하나님을 무시하는 모든 결과들이 실상은 하나님의 작정대로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현실의 일들이 우리 생각대로 잘되어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현실이 우리 생각대로 잘된다는 것은 나에게 유리한 대로 되어진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언제나 우리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펼쳐지고 이루어진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성경을 보시면서 하나님이 하신 일들을 납득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만드신 평화로운 에덴동산에 사탄이 등장하는 것부터 우리가 납득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등장하는 하나님의 일들에 대한 우리의 생각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하나님 편에서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시각에서, 하나님의 입장에서 성경을 보는 것 자체가 말씀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보면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되고 그 하나님께로 믿음의 방향이 맞춰지는 것도 성령의 은총인 것입니다.

 

 

고후 1:20절의 말씀처럼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든 일이 예가 됩니다. 우리 안에서는 완악함이 끊임없이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해 아니오라고 반발합니다. 이것이 바로와 다르지 않은 우리의 본질임을 안다면 우리에게 당연한 것은 심판임을 알 것입니다. 이처럼 지금 나에게 당연한 것이 심판이라는 사실에 눈을 뜬다면 모든 현실은 예로 다가올 것입니다. 이것이 현재를 바라보는 신자의 시각이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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