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3.02 15:21

(105강) 증거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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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출 25:10-22

출 25:10-22http://onlycross.net/videos/exo/exo-251022.mp4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0.그들은 조각목으로 궤를 짜되 길이는 두 규빗 반, 너비는 한 규빗 반, 높이는 한 규빗 반이 되게 하고

11.너는 순금으로 그것을 싸되 그 안팎을 싸고 위쪽 가장자리로 돌아가며 금 테를 두르고

12.금 고리 넷을 부어 만들어 그 네 발에 달되 이쪽에 두 고리 저쪽에 두 고리를 달며

13.조각목으로 채를 만들어 금으로 싸고

14.그 채를 궤 양쪽 고리에 꿰어서 궤를 메게 하며

15.채를 궤의 고리에 꿴 대로 두고 빼내지 말지며

16.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둘지며

17.순금으로 속죄소를 만들되 길이는 두 규빗 반, 너비는 한 규빗 반이 되게 하고

18.금으로 그룹 둘을 속죄소 두 끝에 쳐서 만들되

19.한 그룹은 이 끝에, 또 한 그룹은 저 끝에 곧 속죄소 두 끝에 속죄소와 한 덩이로 연결할지며

20.그룹들은 그 날개를 높이 펴서 그 날개로 속죄소를 덮으며 그 얼굴을 서로 대하여 속죄소를 향하게 하고

21.속죄소를 궤 위에 얹고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넣으라

22.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령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

 

 

 

<설교>

성경은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드러내시고 증거 하시는 자기계시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간섭 아래 있는 이스라엘의 역사는 그 자체로 하나님의 계시가 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증거 하는 계시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스라엘의 모든 역사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성막이나 성소에 대한 규례 또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참된 만남에 있게 하는 내용이 됩니다.

 

 

본문은 증거궤에 대한 규례입니다. 그리고 증거궤와 연관 되어 증거판, 속죄소가 함께 언급됩니다. 21절의 속죄소를 궤 위에 얹고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넣으라는 말씀처럼 증거궤 속에 증거판을 넣고 궤를 덮는 덮개를 속죄소라고 이름 합니다. 과연 이 규례들이 우리에게 계시하는 하나님은 어떤 분일까요? 분명한 것은 증거궤, 증거판, 속죄소, 이 규례를 통해서 증거 되는 하나님만이 참되고, 그 하나님을 믿는 것만이 참된 믿음으로 규정된다는 것입니다.

 

 

22절에 보면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령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고 말씀합니다.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난다는 것은 속죄소에서 자기 백성을 만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만나시는 장소가 여러 곳인데 그 중의 하나가 속죄소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직 속죄소에서만 자기 백성을 만나신다는 것입니다. 만약 속죄소가 아닌 다른 곳에서 인간을 만나시면 결과는 죽음입니다. 모든 인간은 저주의 존재이고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에는 오직 죽음만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속죄소에서 하나님을 만나도 죽지 않는다면 저주의 문제, 즉 죄가 해결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여러분도 아실 것입니다. 속죄소에 뿌려지는 희생 제물의 피가 하나님과의 만남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고, 그 피로 인해서 증거 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입니다. 이것이 속죄소로 인해서 증거 되는 하나님의 자기계시입니다.

 

 

그런데 이것만 생각하게 되면 속죄소는 결국 인간의 죄를 용서하고 하나님과의 만남을 가능하게 하여 구원하는 구원용으로 곡해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항상 모든 것을 자기에게 유리한 방향으로만 해석하는 것이 인간의 습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도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피 흘려 죽으신 것으로만 인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속죄소에서 자기 백성과 만나신다고 했을 때 반드시 짚어야 하는 것은 인간이 어떤 존재로 속죄소로 나가야 하는가의 문제입니다. 그것을 증거궤와 증거판을 통해서 알게 됩니다.

 

 

증거궤에 넣을 증거판은 모세가 하나님께 받은 두 돌판을 말합니다. 그런데 처음의 돌판은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을 섬기는 것으로 인해 모세가 산 아래로 던져 깨뜨려 버립니다(32:19). 그리고 다시 하나님께 나아가 받은 돌판을 증거궤에 넣습니다. 그렇다면 증거궤에 들어가는 돌판이 증거 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증거판으로 이름 하는 것입니다.

 

 

증거궤에는 증거판만이 아니라 만나를 넣은 항아리와 아론의 지팡이도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것들 모두가 이스라엘의 죄와 연관되어 있음을 생각한다면 증거궤 또한 이스라엘의 죄를 증거 하는 용도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증거궤가 보관되는 성막을 증거막이라고 합니다(38:21). 9:15절에서는 증거의 성막으로 지칭하기도 합니다. 성막을 증거막으로도 지칭하는 것도 성막 역시 인간의 죄를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성막과 증거궤, 증거판, 속죄소, 이들 모두가 이스라엘의 죄를 가리키고 증거하고 있음을 생각한다면 성막을 지으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성막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알았다면 자신들과 함께 하는 성막을 볼 때마다 죄로 인해 죽음의 존재인 자신들의 실상을 깨달았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나아갈 때마다 제물이 피 흘리며 죽는 것을 통해서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의 자신들의 실상이라는 것을 선명히 감지했어야 합니다. 이것이 성막으로 드러나는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성막을 하나님이 계시는 거룩한 전으로만 바라봤습니다. 그래서 거룩한 전에 나아가 제사하면 그것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고, 하나님은 그 보상으로 복을 주실 것이라고 기대한 것입니다. 열심히 제사하고 제물을 바치는 자신들의 행위를 하나님을 섬기는 의로 움으로 간주하고 자신들이야 말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부심과 착각에 매인 것입니다. 인간의 죄를 증거 하는 성막에서 오히려 의를 보는 우를 범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잘못됨이고 지금 우리의 잘못됨이기도 합니다.

 

 

18-20절의 금으로 그룹 둘을 속죄소 두 끝에 쳐서 만들되 한 그룹은 이 끝에, 또 한 그룹은 저 끝에 곧 속죄소 두 끝에 속죄소와 한 덩이로 연결할지며 그룹들은 그 날개를 높이 펴서 그 날개로 속죄소를 덮으며 그 얼굴을 서로 대하여 속죄소를 향하게 하고라는 말씀을 보면 속죄소에 그룹 둘이 있음을 봅니다.

 

 

그룹은 천사를 말하는데 속죄소 양쪽 끝에 각기 하나씩 만들어 집니다. 그룹의 날개는 높이 펴서 속죄소를 덮고 있고, 얼굴은 서로 마주 대한 채 속죄소를 향하여 있는 모습입니다. 그룹이 이러한 모습으로 속죄소에 만들어지는 취지는 무엇일까요?

 

 

3:24절에 보면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고 말합니다.

 

 

성경에 처음 등장하는 그룹의 역할은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스스로 생명 나무의 길을 감으로서 생명을 얻는 길은 막혔습니다. 세상 어디에도 생명의 길은 없습니다. 어떤 방식과 노력으로도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다른 길을 주신 것이 속죄소입니다. 속죄소에서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지고 저주의 존재인 인간이 저주에서 벗어나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때문에 속죄소는 인간의 의와 공로를 부정합니다. 인간이 자신의 의와 공로를 가지고 속죄소로 나온다면 그것이 속죄소에 뿌려진 제물의 희생을 멸시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전을 더럽히는 결과가 될 뿐입니다. 그렇게 보면 속죄소의 그룹은 희생 제물의 피로만 가능한 생명의 길을 지키는 역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은 인간이 자신의 의와 공로를 가지고 나오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증거궤와 속죄소, 이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성취되었음을 아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십자가를 믿는 믿음의 세계에서 인간의 의와 공로는 인정될 수 없는 것임을 분명히 직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시각에서 인간의 공로와 실천의 열심을 강조하는 지금의 교회를 들여다보면 결코 참된 믿음의 길을 가는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고전 3:16,17절에 보면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 말합니다.

 

 

성령이 함께 하는 신자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을 기억하십시오. 따라서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힌다는 것은 스스로를 더럽힌다는 뜻이 됩니다. 나쁜 행실로 인해서 더러워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피의 능력이 우리를 저주의 세력으로부터 끊어내고 거룩하게 하셨다는 복음의 말씀을 외면하고 자기의 의와 공로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스스로를 더럽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를 하나님이 멸하신다는 말씀에 깊은 경각심을 가져야 합니다.

 

 

성령이 함께 하는 신자가 하나님의 성전이라면, 특별히 거룩한 성전이 있는 곳을 찾을 이유가 없습니다. 날마다 자기의 죄를 확인하며 그 모든 죄를 대신하여 피 흘려 죽으신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깊은 사랑과 긍휼을 깨닫고 감사하는 것이 성전으로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구원이 불가능한 무능하고 무가치한 자로 생명의 길이신 주께 나오게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은혜만 감사가 되게 합니다. 그것이 성전으로 존재하는 신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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