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3.09 15:46

(106강) 진설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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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출 25:23-30

출 25:23-30http://onlycross.net/videos/exo/exo-252330.mp4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23.너는 조각목으로 상을 만들되 길이는 두 규빗, 너비는 한 규빗, 높이는 한 규빗 반이 되게 하고

24.순금으로 싸고 주위에 금 테를 두르고

25.그 주위에 손바닥 넓이만한 턱을 만들고 그 턱 주위에 금으로 테를 만들고

26.그것을 위하여 금 고리 넷을 만들어 그 네 발 위 네 모퉁이에 달되

27.턱 곁에 붙이라 이는 상을 멜 채를 꿸 곳이며

28.또 조각목으로 그 채를 만들고 금으로 싸라 상을 이것으로 멜 것이니라

29.너는 대접과 숟가락과 병과 붓는 잔을 만들되 순금으로 만들며

30.상 위에 진설병을 두어 항상 내 앞에 있게 할지니라

 

 

 

<설교>

믿음의 근본은 할 수 있다라는 자기신념으로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신 것을 실현시키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없다라는 하나님의 선언에 항복하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인간의 무능함에 눈을 뜨고,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안되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찾게 되는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인간의 모든 가능성을 부정합니다. 따라서 믿음을 인간으로 하여금 실천하게 하는 능력으로 해석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믿음이 아니라 인간의 종교적 신념을 추구하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런 점에서 현대 교회의 심각성은 믿음에 대한 무지에 있습니다. 믿음과 인간의 신념을 분별하지 못하고 인간에게서 시작되는 것을 믿음으로 해석하기 때문에 결국 인간의 결단과 의지를 촉구하는 양상만 드러내는 것입니다.

 

 

신자는 이 차이를 잘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종교적 신념을 믿음으로 혼동하여 자신의 실천 문제로 인해 고민하고 근심하는 오류에 매몰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지 않는 것이 신앙이고, 하나님이 기뻐 하시는 일을 하는 것이 신자다운 모습으로 각인되어 있는데 정작 생각하는 신자다움에 미치지 못하는 자기의 현실로 인해 고민과 근심에 붙들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대다수 기독교인의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고, 근본적인 이유는 믿음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어떤 존재이며, 믿음이 무엇이고,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모든 답은 당연히 성경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알지 못한 무지한 자로 성경이 보여주는 믿음의 세계에만 집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오류투성이의 인간일 뿐임을 깨닫게 되면서 하나님이 도우시는 은혜가 아니면 안되는 인간의 한계 앞에서 항복하고 십자가에 피 흘리신 예수에게서 나의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깊고 높은 사랑을 보게 하시는 것이 우리는 부르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뜻과 일하심을 모든 성경에서 배우고 확인할 수 있습니다. 25장에서부터 말씀되고 있는 성막과 성소, 지난 수요일에 말씀드린 증거궤와 속죄소, 그리고 본문에서 언급되는 진설병과 상, 이 모든 내용들도 인간이 누구이며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속죄소는 하나님이 인간을 만나주시는 자리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만나주시는 자리가 하나님에 의해 지정되는 것은 속죄소가 아닌 다른 어디에서도 하나님과의 만남은 있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속죄소에는 인간의 죄로 인해 죽임을 당한 희생 제물의 피가 뿌려지고 속죄소 아래 법궤에는 인간의 죄를 증거 하는 돌판이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하나님은 인간이 아니라 희생 제물의 피를 보시고 만나신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을 만날 수 없는 저주의 존재입니다. 무능하고 무가치합니다. 이러한 인간성이 변하고 개선되어 조금이라도 가능성 있게 되는 것은 없습니다. 죄의 존재로 살다가 죄의 존재로 죽는 것이 전부입니다. 다만 신자는 하나님의 용서의 은총 안에서 죽는 것이 신자 아닌 자와 다를 뿐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인간을 전혀 다른 운명에 있게 한다는 점에서 속죄소가 담고 있는 내용은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본문의 진설병은 속죄소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상 위에 진설병을 두어 항상 내 앞에 있게 할지니라”(30)고 말씀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진설병은 상에 진열해 놓는 떡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너는 고운 가루를 가져다가 떡 열두 개를 굽되 각 덩이를 십분의 이 에바로 하여 여호와 앞 순결한 상 위에 두 줄로 한 줄에 여섯씩 진설하고”(24:5,6)라는 말씀을 보면 진설병은 열 두 개로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를 상징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진설병을 상 위에 진열하여 성소에 두는 것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떡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받으시는 거룩한 백성이 누구인가 하는 것은 진설병에 담긴 내막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진설병을 상에 진열하라 하시고 그것을 하나님이 받으시는 거룩한 떡으로 구별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에 의해 존재하게 됨을 말합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한 필요조건이나 노력이 인간에게 요구되는 것은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인간의 의로운 행함을 받으시고 백성으로 삼으신다고 말하는 것은 모두 거짓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진설병이 무교병인 것은 이스라엘의 출애굽과 연결됩니다. 애굽에 장자 죽음이라는 마지막 재앙을 내리시면서 이스라엘에게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라고 명하셨고, 하나님이 보낸 천사가 피를 보고 그 집을 지나감으로 죽음의 심판에서 살아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날 저녁에 양의 고기와 함께 무교병과 쓴나물을 먹으라고 합니다(12:6-8).

 

 

무교병은 고난의 떡입니다(16:3). 이스라엘이 죽음이라는 심판을 지나 애굽에서 나오기위해 죄 없는 양이 죽임을 당하는 희생이 있었음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설병은 희생 제물의 피로 인해 살았습니다라는 고백과 같은 것이고, 그러한 고백이 있는 자가 하나님이 받으시는 거룩한 백성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낸 천사가 애굽인과 이스라엘인의 여부를 구별하여 심판을 행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천사의 기준은 오직 양의 피였을 뿐입니다. 집에 악한 살인자가 있다 해도 피가 있으면 피를 보고 지나갔고 칭송받는 훌륭한 도덕군자가 있다 해도 피가 없으면 가차 없이 심판을 행했습니다. 피가 죽음의 증표였기 때문에 피 있는 집을 이미 죽음의 심판을 받은 것으로 간주한 것입니다.

 

 

그래서 무교병을 먹는 것은 자신을 희생의 피가 아니면 구원 될 수 없는 무능하고 무가치한 자로 여기는 것이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자라는 것에 항복하고 주께 나오는 십자가를 믿는 믿음의 내용이 되는 것입니다. 이 믿음에는 신자 된 자가 힘과 열심을 내어서 하나님을 뜻을 이루어야 한다거나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을 지켜 행해야 한다는 등의 요구가 자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이 있는 자가 하나님이 받으시는 거룩한 백성이라는 것을 진설병을 상에 진열하게 하심으로 이스라엘에게 증거 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무교병은 양의 피가 아니면 이스라엘도 죽음의 존재일 뿐이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저주에 속한 불쌍한 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가 우리에게 선포하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시지 않았다면,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지 않았다면, 우리는 다만 죽음과 저주의 존재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십자가에서 자신의 실상을 바르게 파악한다면 예수님의 피는 불쌍한 자에게 베풀어진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9장에 보면 두 소경이 예수님을 따라가면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치는 내용이 있습니다. 자신들을 불쌍히 보시고 자비를 베풀어 달라는 외침입니다. 이들에게 예수님은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라고 말씀하시고 두 소경은 그러하오이다라고 답합니다.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는 말씀은내가 너희의 눈을 뜨게 해 줄 것을 믿느냐라는 뜻이라기보다는자비를 베풀 자로 믿느냐?’라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처럼 십자가는 세상을 살기 위해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채워주기 위해 오신 예수가 아니라 저주에 붙들린 불쌍한 자인 우리를 저주에서 구원하기 위해 오신 예수님을 증거 합니다. 이런 점에서 자기 필요를 위해 찾는 예수는 예수가 아니라는 사실이 명백하다 할 것입니다.

 

 

우리는 진설병으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 수 있습니다. 적어도 하나님은 인간의 행함이나 의로움을 보시고 백성으로 받으시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성막에서 제물을 잡고 진설병을 안식일마다 새 것으로 바꾸고, 대제사장이 희생 제물을 피를 들고 속죄소로 나아가는 일을 반복하면서도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몰랐습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믿음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신자란 이러한 불가능 속에서 존재하는 기적의 증거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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