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4.20 15:38

(112강) 성막의 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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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출 27:9-19

출 27:9-19http://onlycross.net/videos/exo/exo-270919.mp4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9.너는 성막의 뜰을 만들지니 남쪽을 향하여 뜰 남쪽에 너비가 백 규빗의 세마포 휘장을 쳐서 그 한 쪽을 당하게 할지니

10.그 기둥이 스물이며 그 받침 스물은 놋으로 하고 그 기둥의 갈고리와 가름대는 은으로 할지며

11.그 북쪽에도 너비가 백 규빗의 포장을 치되 그 기둥이 스물이며 그 기둥의 받침 스물은 놋으로 하고 그 기둥의 갈고리와 가름대는 은으로 할지며

12.뜰의 옆 곧 서쪽에 너비 쉰 규빗의 포장을 치되 그 기둥이 열이요 받침이 열이며

13.동쪽을 향하여 뜰 동쪽의 너비도 쉰 규빗이 될지며

14.문 이쪽을 위하여 포장이 열다섯 규빗이며 그 기둥이 셋이요 받침이 셋이요

15.문 저쪽을 위하여도 포장이 열다섯 규빗이며 그 기둥이 셋이요 받침이 셋이며

16.뜰 문을 위하여는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 실로 수 놓아 짠 스무 규빗의 휘장이 있게 할지니 그 기둥이 넷이요 받침이 넷이며

17.뜰 주위 모든 기둥의 가름대와 갈고리는 은이요 그 받침은 놋이며

18.뜰의 길이는 백 규빗이요 너비는 쉰 규빗이요 세마포 휘장의 높이는 다섯 규빗이요 그 받침은 놋이며

19.성막에서 쓰는 모든 기구와 그 말뚝과 뜰의 포장 말뚝을 다 놋으로 할지니라

 

 

<설교>

인간이 신을 찾는 것은 자신에게 위급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 해결을 위한 도움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문제가 해결되고 평온한 일상에서는 신을 찾지 않습니다. 찾을 이유도 필요도 느끼지 않는 것입니다. 다만 신의 노여움을 사지 않기 위해 신을 섬기고 있음을 보여주는 의식만 유지하는 것이 전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의 실상이라 해도 잘못된 말은 아닐 것입니다.

 

 

인간의 이러한 현실은 당연히 이스라엘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애굽에서 바로의 횡포로 고통을 겪을 때, 약속의 땅에 들어간 후에도 주변 강대국의 위협으로 위태로움을 느낄 때 그들은 하나님을 찾았지만 평안할 때는 잊고 살았습니다. 애굽에서 큰 일을 행하신 그의 구원자 하나님을 그들이 잊었나니 그는 함의 땅에서 기사와 홍해에서 놀랄 만한 일을 행하신 이시로다”(106:21-22)는 내용이 그들의 실상에 대한 증거이며 우리의 실상에 대한 증거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잊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행하신 기적을 잊었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존재 근거가 하나님께 있음을 잊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살게 하셔서 사는 것이고, 하나님이 있게 하셔서 있는 것이며, 그것이 곧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잊은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잊은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닌 자기의 뜻을 위해 살고자 하는 것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잊은 것은 곧 우리가 하나님을 잊고 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을 잊었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신앙생활과 무관합니다. 즉 열심히 예배를 드리고 기도하고 헌금하는 그런 행위가 하나님을 잊지 않고 있다는 증거가 아닌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을 잊은 자로 교회를 찾는 종교인이 바로 우리의 현실일 수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스라엘은 어린양의 희생이 있었기에 죽음의 통과하고 애굽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것을 잊지 말고 기억하라는 뜻으로 세우신 것이 유월절 의식이며 이것을 이스라엘 안에 새겨두기 위해 세우게 하신 것이 성막입니다. 따라서 성막에 담긴 취지는 행하라가 아니라 기억하라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제단에서 죽임을 당하고 불태워지는 제물을 보면서도 기억해야 할 것을 기억하지 못하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잊어버립니다. 그리고 대신 제물을 바치고 제사를 드리는 자기들의 행위만 기억했을 뿐입니다. 이것이 예수를 말하면서도 십자가의 피로 말미암아 베풀어진 은혜는 잊고, 자신들이 행하고 있는 것만 기억하는 기독교인과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제물이 불태워지는 제단은 성막의 뜰에 있습니다. 그리고 본문에서는 뜰에 대해 너는 성막의 뜰을 만들지니 남쪽을 향하여 뜰 남쪽에 너비가 백 규빗의 세마포 휘장을 쳐서 그 한 쪽을 당하게 할지니(92)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성막의 뜰은 남쪽과 북쪽에 각각 백 규빗의 세마포 휘장을 치고, 서쪽에는 50규빗의 포장, 동쪽에는 뜰 문이 되는 스무 규빗의 휘장과 문 양쪽에 열다섯 규빗 씩의 포장을 치는 것으로 만들어 집니다. 포장이 담 역할을 하고 포장 안이 뜰이 되는 것입니다.

 

 

성막 뜰에서 제사장이 하는 일은 백성들이 가져온 제물을 죽이고 제단에서 불에 태우는 것입니다. 그 광경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끌려온 제물이 죽임을 당하는 울음소리와 그 몸이 불에 태워지는 냄새로 가득할 것입니다. 따라서 성막의 뜰은 죽음을 보여주는 의식의 장소가 되는 것입니다. 누구의 죽음을 보여주는 것일까요? 당연히 이스라엘의 죽음입니다.

 

 

그렇다면 성막 뜰에서 이스라엘이 기억할 것은 당연히 죄로 인한 자신들의 죽음입니다. 희생 제물을 죽이면서 자신의 죽음을 실감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죽음을 보여주는 것이 제사의 의미이고 제사장의 역할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반복 되면서 제사를 행하는 것에 의미를 두게 되고, 자신들의 제사 행위가 하나님을 기쁘게 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미신의 수준으로 전락된 것입니다.

 

 

홍해에서의 구원은 구원될 가치가 없는 자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위한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구원입니다.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베푸셔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증언하는 백성 되게 하시는 것이 이스라엘을 부르신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시편 106:8절에서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그들을 구원하셨으니 그의 큰 권능을 만인이 알게 하려 하심이로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으로 구원은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십자가의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심, 이 모든 것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함이 아니라는 뜻이 됩니다. 그런데 인간이 오로지 자기 구원과 복에 중심을 두고 예수를 말하기 때문에 이스라엘과 똑같이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난 미신으로 전락된 기독교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러한 문제에 대한 심각성이 없다면 우리 역시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잊은 자로 살면서도 스스로를 믿음 가운데 있다고 착각하는 종교인의 현실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성막의 뜰에는 이스라엘의 죄로 인한 제물의 죽음이 있습니다. 즉 죄가 넘치는 현장이 성막의 뜰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는 바울의 말처럼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는 현장이 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는 죽음의 존재입니다. 그들 속에 자기의 피로 용서하시는 하나님으로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흘리신 피로 인해서 심판을 받아야 할 죄의 존재가 심판에서 벗어나 생명에 거하게 됨을 보게 되고 실감하게 되는 것이 성막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 부름을 받고 그리스도 와 함께 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어떤 의미인가를 여러분은 아십니까? 예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복을 받고 천국에 간다고 믿으신다면 예수를 단지 미신의 수준에서 생각하는 것일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3장에 보면 다니엘의 세 친구가 금 신상에게 절하라는 느부갓네살의 명령을 거역하여 풀무불에 던져지는 내용이 있습니다. 느부갓네살은 세 사람을 결박하여 던졌는데 그가 보게 된 것은 결박되지 않은 네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넷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다는 말을 합니다(3:24-25).

 

 

불은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풀무불은 하나님의 심판이 행해지는 세상 현실을 보여줍니다. 즉 우리는 죄의 존재로 심판의 세상에 던져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이 함께 하심으로 죽음의 존재가 죽지 않은 몸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로 말미암아 누리는 신자의 복입니다.

 

 

성막의 뜰은 죽음의 세상에서 죽지 않는 신자의 복이 증거 되는 현장입니다. 죄 없는 제물의 죽음으로 인해 죽어야 할 자가 죽음에서 해방된 것입니다. 제물의 죽음에서 하나님의 용서를 보는 신자는 자신의 존재 근거가 자신이나 세상이 아닌 하나님의 용서에 있음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세상의 형편이나 환경의 문제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함께 한 신자는 죽음의 권세에서 해방된 자로 삽니다. 결박당해 풀무불에 던져진 세 사람이 결박 되지 아니한 모습으로 있는 것 또한 그것을 말해줍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부름 받은 신자가 누리는 권세입니다. 그래서 신자에게 참된 권세는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일 뿐입니다.

 

 

신자에게 축복은 소유가 아니라 죽음에 결박당한 인간이 예수님의 권세로 해방된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이 베푸시는 축복을 알기 위해서는 인간은 죄인이며 죽음의 존재라는 사실이 자신의 실상으로 명확히 받아들여져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죄를 보게 하는 것으로 베풀어지는 것입니다.

 

 

성막의 뜰이 제물의 죽음이 의가 되고, 그 의로움 안에서 이스라엘이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처럼 십자가는 예수님의 피가 의가 되어 그 의로움 안에 존재하는 신자 됨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신자는 복을 받는 자가 아니라 부족함이 없는 복의 세계에서 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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