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2.01 16:34

(93강) 살려두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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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출 22:18-20

출 22:18-20http://onlycross.net/videos/exo/exo-221820.mp4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8.너는 무당을 살려두지 말라

19.짐승과 행음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20.여호와 외에 다른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자는 멸할지니라

 

 

 

<설교>

하나님은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으시고 우리와 대화도 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마치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으신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간섭아래 있습니다. 그 증거가 구약에는 율법으로 주어졌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신 것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간섭아래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스라엘은 율법을 지키면 복 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하나님의 간섭 아래 있음을 실감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율법은 우리가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닙니다. 가령 본문의너는 무당을 살려두지 말라 짐승과 행음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여호와 외에 다른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자는 멸할지니라”(18-20)는 율법을 보면 지나치다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무당이 왜 죽어야 하는 것일까요? 무당이 죽어야 할 죄는 무엇입니까? 단지 하는 일이 무당이라는 이유로 죽여야 하는 것일까요? 짐승과 행음하는 자도 반드시 죽이라고 합니다. 짐승과 행음하는 것이 옳은 것은 아니지만 타인에게 해를 끼친 것은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죽임을 당해야 할 정도의 죄라고는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외에 다른 신에게 제사 드리는 자도 멸하라고 하지만 이 또한 세상 기준에서 보면 독선으로 비춰질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 외에도 죽이라고 명하시는 율법은 많습니다. 사람을 죽인 자, 아버지와 어머니를 치거나 저주한 자, 사람을 납치한 자, 안식일에 일하는 자도 죽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이해하는 사랑의 하나님, 자비의 하나님과는 어울리지 않는 율법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죽이라고 명하시는 그들을 죽이는 것이 하늘의 원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고 납득하지 못한다 해도 하나님은 율법으로 하늘의 원리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고, 이스라엘을 땅의 원리가 아닌 하늘의 원리로 다스리신다는 뜻으로 율법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죽이라고 명하시는 것은 행동이 악해서가 아니라 사고방식이 하늘의 원리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행동에 초점을 두게 되면 아마 우리는 나 자신을 무당과 한통속으로 보지 않을 것입니다.‘무당은 귀신을 섬기는 사람이고 신자인 나는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인데 어떻게 한통속인가?’라는 생각이 앞서기 때문입니다.

 

 

또한 당연히 짐승과 행음하는 자도 아니고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는 우상숭배자도 아니라고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과는 아무 연관이 없습니다. 성경에서 이 내용을 지워도 됩니다. 이 외에도 율법의 많은 내용이 나와 무관하기에 지워도 되는 구절만 늘어갈 것입니다.

 

 

하지만 행동이 아니라 사고방식, 그 속성에 초점을 두면 달라집니다. 즉 무당의 행동이 죽임을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성이 죽임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늘의 원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죽이라고 명하는 자들의 속성으로 들어가게 되면 거기에서 우리 자신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무당이나 짐승과 행음하는 자,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는 자와도 우리 모두가 한통속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에 대해서, 그리고 우리 자신에 대해서 정확히 아는 것입니다.

 

 

무당은 인간의 인생에 관여합니다. 그리고 인생에 관여하고 판단 할 때 기준을 행함에 둡니다. 인간의 운명이 행함에 의해 달라지는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나쁜 운명을 좋은 운명으로 바꾸는 것 역시 행함에 달렸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간섭아래 있음을 생각한다면 운명이 행함에 달렸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간섭을 부인하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사고방식을 거부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무당을 죽이라는 율법인 것입니다.

 

 

인간이 무당을 찾아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귀신의 힘이 주어졌다고 믿는 무당의 도움을 받아 자기 운명을 바꾸거나 유리한 길로 안내 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무당을 자기 인생을 행복하게 해줄 일만 있는 방향으로 인도해줄 권세자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늘의 원리와 어떻게 다른지를 바울을 예로 들어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권세와 힘이 오직 예수님에게만 있다고 믿었습니다. 자신의 모든 삶도 예수님의 권세에 의한 것으로 믿었기에 어떤 사건이 있다 해도 예수님을 증거 하기 위한 도구로 해석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에게는 인생을 행복하게 해주는 다른 것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바울에게는 기쁨이고 평강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믿음으로 바울은 예수님의 권세에 붙들려 있는 것이 곧 부족함이 없는 만족이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만약 자기 인생을 위해 무당을 찾아간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권세를 권세의 전부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고 예수님이 힘이고 인생의 전부라는 것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 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가 전부인 하늘이 원리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무당을 죽이라는 것으로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무당은 세상이 살아가는 속성, 원리를 의미합니다. 그러한 세상의 속성에서 벗어나는 것이 구원이며 하늘에 속한 백성인 것을 율법에 담아 말씀하시는 것으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이러한 율법이 우리에게 외치는 것은 우리가 곧 죽임을 당해야 할 무당이라는 것입니다.

 

 

삼상 28장에 보면 사무엘이 죽고 이스라엘의 왕이었던 사울이 신접한 자와 박수를 그 땅에서 쫓아낸 내용이 있습니다. 만약 사울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고자 한 것이었으면 신접한 자와 박수는 죽여야 합니다. 그런데 죽이지 않고 쫓아내었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왕이라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 것으로 짐작됩니다. 사무엘이 없는 상황에서 백성들의 지지를 얻는 것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형식적인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무엘이 죽고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두려웠던 사울이 하나님께 기도했지만 하나님은 전혀 응답하지 않습니다. 결국 사울은 신하들에게 신접한 여인을 찾으라 지시하고, 신하들이 말한 엔돌에 있는 신접한 여인을 찾아가서 죽은 사무엘을 불러올리라고 합니다. 죽은 사무엘이라도 만나서 도움을 받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무당을 찾고 죽은 사무엘을 만나고 싶어 하는 사울이 하나님을 살아계시는 분으로 믿는다고 할 수 있을까요? 사울이 하나님을 살아 계셔서 자신을 간섭하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인도해 가시는 분으로 믿었다면 어땠을까요? 그리고 자신에게 발생하는 모든 사태가 비록 이스라엘이나 자신에게는 실패가 되고 고통이 된다 해도 그 또한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믿었다면 어땠을까요? 그랬다면 사울에게 신접한 여인은 죽여야 할 대상이었을 뿐입니다.

 

 

우리는 내 인생에 좋은 일만 있기를 바랍니다. 좋은 일만 있어야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욕구입니다. 행복과 즐거움이 인생의 전부로 채워져 있는 것입니다. 그처럼 자기 인생을 위해 무당을 찾고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이 자기를 더럽히는 것이 된다는 것에는 전혀 무감각할 뿐입니다.

 

 

짐승과 행음하는 자는 반드시 죽이라고 하시는데, 짐승과 행음하는 것도 자신을 더럽히는 것이지만 그것보다는 자기의 즐거움 쾌락이 우선이기에 짐승과 행음하는 이방 풍습을 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결국 자기를 위해 살아가고 자기를 위해 하나님을 찾는 것이 무당이나 다른 신을 찾는 것과 다르지 않음을 율법으로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인생에 불안과 두려움이 있습니까? 우리에게 불안과 두려움이 있다는 것은 내가 원하고 바라고 기대하는 내 인생, 나의 삶이 따로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인생이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으면 어쩌나?’라는 불안과 두려움에 붙들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본래적 불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신자에게는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내가 원하는 인생을 기준으로 확인하려고 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뜻대로 되지 않은 인생에서 우리의 믿음 없음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고 그리스도를 위해 사용되는 인생임을 알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거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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