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4.07 15:29

(66강) 증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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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16:31-36http://onlycross.net/videos/exo/exo-163136.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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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31.이스라엘 족속이 그 이름을 만나라 하였으며 깟씨 같이 희고 맛은 꿀 섞은 과자 같았더라

32.모세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령하시기를 이것을 오멜에 채워서 너희의 대대 후손을 위하여 간수하라 이는 내가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낼 때에 광야에서 너희에게 먹인 양식을 그들에게 보이기 위함이니라 하셨다 하고

33.또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항아리를 가져다가 그 속에 만나 한 오멜을 담아 여호와 앞에 두어 너희 대대로 간수하라

34.아론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그것을 증거판 앞에 두어 간수하게 하였고

35.사람이 사는 땅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자손이 사십 년 동안 만나를 먹었으니 곧 가나안 땅 접경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만나를 먹었더라

36.오멜은 십분의 일 에바이더라

 

 

<설교>

하나님의 구원은 죽음에 있는 자를 건지셔서 죽음이 없는 생명의 세계로 집어넣으신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온갖 종교가 존재하는 세상에서 들을 수 없는 구원의 내용입니다. 종교에서는 나올 수 없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구원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이성와 상식에 도무지 맞지 않는 방식의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이성과 상식에 의한 구원은 인간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세상에서 존재했던 기간 동안의 삶의 내용과 행동을 평가해서 그 결과에 따라 천국과 지옥으로 결정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구원은 인간으로부터 출발하지 않습니다. 만약 인간으로부터 출발한다면 모든 인간에게 구원의 가능성은 사라집니다. 구원받을만한 삶을 살 수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구원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긍휼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하나님의 구원을 말한다면 구원 받은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로 관심이 집중되어야 합니다. 구원될 수 없는 자를 구원하신 이유가 하나님의 긍휼을 세상에 나타내게 하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필요한 것은 나를 구원한 하나님의 긍휼이 말로 다할 수 없는 특별한 은총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긍휼을 입었다는 것이 기쁨이 되고 감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그러한 자리로 끌어가는 것이 율법입니다.

 

 

32절에 보면 “모세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령하시기를 이것을 오멜에 채워서 너희의 대대 후손을 위하여 간수하라 이는 내가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낼 때에 광야에서 너희에게 먹인 양식을 그들에게 보이기 위함이니라 하셨다 하고”라고 말합니다.

 

 

만나를 간수하라고 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매일 만나를 주셔서 굶지 않고 살 수 있었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뜻일까요? 그것도 이유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약속의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이 자신에 대한 한 가지 사실을 잊지 않고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우린 그것을 34절의 “아론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그것을 증거판 앞에 두어 간수하게 하였고”라는 말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33절에 보면 만나를 항아리에 담아 여호와 앞에 두어 대대로 간수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호와 앞이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요? 여호와 앞은 곧 여호와 말씀 앞을 뜻합니다. 그것을 34절에서 증거판으로 말씀하는 것입니다.

 

 

증거판은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받은 십계명이 기록된 돌판입니다. 이 돌판 앞에 만나를 두어 간수하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이스라엘이 어떤 존재인가를 잊지 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원망을 들으시고 만나를 주셨습니다. 따라서 만나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원망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물입니다. 원망의 증거물을 하나님의 율법인 증거판 앞에 보관하게 하심으로써 믿음에 실패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율법에 의해 심판을 받아야 할 자들인 것을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에 대해 깨어있는 자들이라면 매일 같이 만나를 먹으면서 자신들의 실패를 자각했어야 합니다. 그것이 만나에 담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출 25:21절에 보면 “속죄소를 궤 위에 얹고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넣으라”고 말씀합니다.

 

 

증거판은 하나님의 궤, 즉 법궤에 보관되고 법궤를 덮은 뚜껑, 속죄소에 희생 제물의 피가 뿌려집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아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에 의해서 심판을 받아야 할 이스라엘이 죄 없는 제물의 희생으로 모든 죄가 용서되고 구원 받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만나를 증거판 앞에 간수하라는 것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세우시는 것과 같습니다. 말씀 앞에 세워진 이스라엘에게는 말씀이 있는 그 자리가 심판의 자리가 됩니다. 그 증거물이 만나입니다.

 

 

그런데 심판의 자리에 희생 제물의 피가 뿌려짐으로써 죄가 용서되고 심판에서 건짐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희생의 피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요? 심판의 자리를 몰랐을 때보다는 더 큰 기쁨과 감사의 마음이 있게 될 것입니다. 희생 제물의 피로 인한 하나님의 구원이 놀라운 은혜와 복으로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원망했음에도 불구하고 심판에서 건짐 받고 생명이 보존되는 은총을 입었다는 사실이 감사로 머물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이러한 백성으로 만들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십자가가 바로 그것을 말해줍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예수님을 죽였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아들의 피 흘림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신 긍휼과 사랑의 현장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구원의 가능성이 없는 실패자일 뿐입니다. 봉사의 일을 한다면 봉사를 하는 실패자이고, 기도를 한다면 기도하는 실패자인 것입니다. 무엇으로도 우리를 실패자에서 성공자로 바꿔 놓지 못합니다. 이것을 깊이 자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물과 양식이 없는 환경으로 데려가시는 이유를 잘 생각해야 합니다. 원망과 불평을 하게 해서 실패하게 하시고, 실패자에게 만나를 주심으로써 만나조차 받을 수 없는 존재임을 알게 하고자 하신 것이라면 우리도 예수님 앞에서 우리의 존재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을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보시면 교회를 다니고 예수를 잘 믿었다고 생각되는 우리가 사실은 날마다 원망과 불만으로 살았던 것 밖에 없음을 알 것입니다. 우리가 있어야 할 본래 자리는 실패자로서 저주와 죽음의 자리인데 예수님의 피가 우리의 실패를 가리시고 저주에서 건져낸 것임을 알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다 하셨습니다’라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기독교인들은 스스로를 실패자로 인식하지 않습니다. 광야의 이스라엘처럼 매일 원망과 불만을 안고 살면서도 그것이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을 해서 원하는 것을 받는 것에 마음을 둡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자신이 하나님을 이용하고 있다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합니다.

 

 

롬 5:12절에서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세상의 실상은 사망입니다. 세상 여기저기에 사람을 감동하게 할 만한 착한 일과 사람이 있다 해도 그것 때문에 세상에 들어온 죄가 사라지지 않습니다. 세상에 들어온 죄는 모든 사람을 사망에 붙들어 놓습니다. 그래서 평생을 살면서 착한 일을 쌓았다 해도 사망이라는 결국을 피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세상에 또 한 사람으로 인한 놀라운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한 사람이 세상에 오시고 그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함을 받아 생명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실패는 아담 안에서 난 것이고, 성공은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예수 안에 있게 되어 거룩한 신자가 된 것입니다.

 

 

착하게 사는 것이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만약 착하게 살고 교회생활도 성실히 잘하고 있다면 자신이 말씀 앞에서 실패자라는 것을 잊게 될 것입니다. 설사 인간은 모두 실패자라는 말을 듣는다 해도 자신은 예외로 할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십자가는 구원의 수단일 뿐입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본래 자리가 저주임을 보여준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서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성공이 아닌 실패의 길로 가자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일에서 실패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신앙의 성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실패를 보는 길로 가자는 것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신자는 자기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자랑합니다. 십자가 앞에 자신을 세워 본다면 나의 죄를 대신해서 피 흘려 죽으신 예수님 앞에서 자랑할 나의 것이 있을 수 없음을 아는 자가 신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구원될 수 없는 존재라는 증거물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말씀으로 확인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을 확인할 때 십자가만이 자랑이 되는 이유를 알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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